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45) 미국 3년 - 프린스톤 초년

프린스톤 초년

 

그 때 윤하영[1] 씨도 프린스톤에 계셨기에 가자마자 찾아뵜다. 그는 우리 그룹의 최연장자였기에 형장(兄長)으로 대접했다.

학교에서는 내가 일본에서 신학을 마쳤대서 대학원 코스에 등록시킨다. 과목 선택은 맘대로다. 기숙사는 브라운 홀식사 클럽은 프라이어였다.

나는 주로 메첸(Gresham Machen)[2]의 강의를 택했다. 그는 근본주의 신학의 투사라는 의미에서 인기가 있었고 강의도 무던히 명석했다.

나는 아오야마에서 신신학일변도로 지냈기에 여기서는 보수신학계열을 주로 택했다. 메첸의 저서는 다 읽었다. 그의 강의 바울종교의 기원, 처녀 탄생등도 들었다. 즈위머의 모하멧교강의, 바스(VOS)의 메시아론, 어드맨[3]의 성서약해 등등 강의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지만, 책은 읽을 수 있었고 시험 때에는 학생들이 프린트한 강의록과 과거의 시험문제집을 돌려주기 때문에 그것이 내게도 회람되는 것이었다. 바스의 강의는 십년 내 꼭 같은 내용이고, 시험문제도 같은 것이라고 한다. 사실 그대로였다. 레춰의 교회사 시험은 답안부피로 점수 딴다는 이야기어서 그 시간에는 부피조성을 위한 타자경쟁이 한몫 본다는 까싶.

어쨌든, 내게는 닿지도 않는 이야기다. 그러나 시험에서 B이하로 내려가는 과목은 없었다.

 

학생 그룹들이 있어서 나도 여기저기 끼어봤다. 알고보니 그것이 메첸 지지파와 반대파로 갈라진 파쟁이었기에 나는 아무데도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메첸 박사는 신약전공이고 희랍어 교본도 손수 쓴 분이다. 독신이어서 기숙사 방 둘을 얻어 하나는 서재, 하나는 침실로 쓰셨다. 낭하에 뚜껑 뗀 사과궤짝을 놓아, 가고오는 학생이 맘대로 주어먹게 했다.

가담가담[4] 파티를 열고 학생들을 불러 다과를 나누며 맘대로 대화하게 한다. 장기도 두고 췌커도 잘한다.

 

그러나 원래가 전투적 근본주의총수(摠帥)였기에 사랑투지에 눌려 낯에 화색이 없었다. 이건 내 추측일 것이다. 그는 나를 가까이 해 주셨다. 한국의 박형룡 교수가 그이를 그대로 본딴 그의 제자셨단다. 박형룡 씨는 내가 프린스톤 가기 전에 졸업하고 귀국했기에 나하고는 학우로서의 친교가 없다.

겨울이 닥쳤는데 내게는 외투가 없었다. 박형룡 씨가 입다 두고 간 외투라면서 김성락(?)이 내게 넘겨준다. 그는 학생 때에도 뚱뚱했던 모양이어서 내게는 맞지 않았다. 고양이 우장[5] 쓴 격이었다. 길에 나서면 아이들이 깔깔대며 웃는다. 그래도 추워 떨기보다는 나았다.

 

김성락 씨는 그 때 프린스톤에서 매스터 코스를 하고 있었는데 다음 해에 매스터 칭호를 받았다. 그는 도량이 넓고 생각이 깊은 친구여서 초년생인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유명한 김선두[6] 목사님 맏아드님이다.

프린스톤 캠버스 가까이 수림 속에 무명용사들의 무덤이 있었다. Friend and Foe Lie Together라고 새긴 둥그런 뚜껑이 덮인 무덤이다. 속에는 독립전쟁 때 벌판에 버려진 용사들 유해를 네켠 내켠 할 것 없이 한 구덩이에 묻어버린 것이라 한다. 김성락 씨는 자주 나를 데리고 거기 가서 기도하곤 했.

미상불 인상적인 고장이었다.

우리는 한국과 한국 민족의 자주 독립을 위해 기도했고 한국교회를 위해서도 간구했다.

한경직 씨는 숭실중학, 숭전, 미국의 엠포리아 대학을 정규로 마치고 프린스톤 신학에 들어와 일학년부터 졸업반에까지 올라 온 정규로 공부한 학생이다.

머리 좋고 영어도 자유롭고, 인품이 온유하고, 인간 관계가 원만했다. 사상은 그 당시 프린스톤 분위기로서는 Liberal한 편이었으며 졸업하면 대학원에서 학업을 계속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매일 미열이 있고, 소화가 좋지 않았다. 운동하면 소화가 나을 거라고 일부러 달음박질, 핸드볼 등을 일과로 했다. 그러나 오히려 더해간다. 우리는 교의를 찾아갔다. 교의는 진찰하자마자 절대안정을 명한다. 운동했다니까 제일 안할 일을 했다면서 나무란다.

의사 영감이 밝히지는 않았지만 T.B.[7] 인 것을 나도 눈치챘다. 졸업하자 곧 미시간의 켈록 공장에 가서 거기 전속병원에서 자세하게 진단해 봤다. 폐결핵 2기여서 늦은 감이 있다는 것이었다. 더스케키의 장로교 요양원에 가도록 주선되어 2년반인가 거기서 요양했다. 요양원에서 내게 보낸 편지 가운데 하나님께서 내게 십삼 년만 더 살게 해 주십사고 기도한다는 구절이 있었다. 어떤 계산에서 그 연한이 산출됐는지 나는 지금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지금 칠십이 넘어 팔십을 향하고 있다. 하나님의 긍휼이라 믿는다.

 

윤하영 씨는 프린스톤에서 Special Student4년을 계셨다. 신학사상은 근본주의 그대로요, 학문적으로 보다도 실제 목회에 진출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학교에서도 그것을 권하고 있었다. 억지로 일이년 더 계시다가 귀국했다. 신의주제일교회[8] 목사로, 미상불 목회에는 성공이었고 교회 정치에도 근본주의 노선에서 공헌했다 하겠다. 해방 후 월남하여 관계에 투신, 충북도지사로도 계셨지만 정계의 변동이 정치수명을 약화했고 삶의 수명도 단축시킨 게 아닌가 생각된다.


[각주]

  1. 윤하영(尹河英, 1889~1956) -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웠으며 1905년 선천주재 북장로회 선교사 램프(南行里)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램프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가산교회 등지에서 시무하였다. 이후 선천고등성경학교에 입학하여 3년동안 수학한 후 1916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191931운동과 관련하여 1년 정도 옥고를 치루고 1921년 졸업(14)하였다. 그해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고 용천군 용계동교회에 부임하여 시무하였으며 1923년에는 광화, 덕동 2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대학에 적을 두고 상해 임시정부를 도와 군자금 모금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1924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하였다. 1929년 귀국 후 신의주제일교회에서 시무하였고, 1939년에는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반대 등으로 1941년 구속되어 6개월간 옥살이를 겪었다. 이때 그는 목사직도 박탈당하였다. 해방과 함께 다시 신의주제일교회 목사로 복직된 그는 신의주제이교회 한경직 목사 등과 함께 평북의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국 최초의 정당인 기독교사회민주당19459월에 창당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의 진주와 공산당 정권의 득세로 그와 정당에 탄압으로 인하여 1947년 월남하여 미군정청의 요청으로 충청북도 도지사가 되어 남한에서 민주정부 수립에 참여하게 되었다.
  2. 존 그레섬 메첸(John Gresham Machen, 1881~1937) - 1906년부터 1929년까지 프린스턴 신학교의 신약 교수였고 프린스턴 신학교가 현대신학을 수용하자 1929년 분리하여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을 창설하였다.
  3. 중도적 입장이었던 찰스 어드맨(Charles Eerdman)은 당시 한국에 선교사로 와 있던 월터 어드맨(Walter Eerdman, 1877-1948)의 형이다. 고지수, 김재준과 개신교 민주화운동의 기원, 도서출판선인, 2016, 72.
  4. 가담가담 - ‘이따금의 북한어
  5. 우장 - 몸이 비에 젖지 않도록 비옷을 차려입음
  6. 김선두(金善斗, 1876~1949) 장로교 목사. 평남 평양 출생. 1901년 기독교에 입교했고 1907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평양 숭실사범 강습과를 수료하고 1910년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동안 1907년부터 숭실중학교 교원으로 재직했으며 1908년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로 장립되었고 같은 해 숭덕(崇德)ㆍ숭현(崇賢) 양학교 교감으로 봉직했다. 1909년에는 평양 서문밖교회 장로로도 봉직한 그는 1913년에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졸업(6)하고 그해 6월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어 서문밖교회 목사로 부임했고 15년 숭실전문학교 강사를 겸임했으며 그해 평양노회장에 피선되었다. 17년 장로회 총회장에 피선되었고 31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하여 평양시위운동을 주도했다. 1922년 평양신학교에 출강했으며 평남 대동군에 있는 송산리교회를 담임하였고 24년 평양의 신암교회에서 시무했다. 26년 평북 선천에 있는 신성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는 한편 1930년에 다시 평양노회장에 피선되었고 33년 함북 성진에 있는 욱정교회를 맡아 시무하였다. 35년 만주 봉천교회 목사, 38년 봉천신학교 교수를 역임하는 한편 일제 말기에 강요된 신사참배에 적극 반대하여 참배거부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키고 직접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 교계는 물론 정계 거물들과 회담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귀국 후 일제에 의해 수감되었고 그가 의도한 운동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해방후 1946년 월남하여 교회와 신학교를 위해 봉사하던 중 1949년 서울에서 별세했다.
  7. 결핵(Tuberculosis)
  8. 신의주제일교회 - 1911년 평북 신의주 매기동 8에 설립된 장로교회. 일찍이 이신화ㆍ이명화ㆍ김신국 등이 믿고 인근 마전(麻田)교회에 출석하며 예배를 드렸다. 신의주는 국경의 요지로 시가가 번창하고 경제적으로도 풍요해짐으로 각처로부터 이주민이 늘고 여러 기독교인도 이주하였다. 즉 황택규, 김병원, 이항엽, 조보근, 장준영, 김관필, 김용즙, 김세의, 임관호, 임주조, 장여학 등이 이주하므로 새 신자가 크게 증가하였다. 이들은 모두 합심하여 계속 전도하는 한편 8간짜리 예배당을 건립하고 교회를 설립하였다. 초대 요격자로는 장덕로 목사가 부임했고 이어 한석진 목사도 시무한 바 있다. 1916년에는 김병원, 김치복 양인을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를 조직하므로 조직교회로 발전하였다. 이어 교세가 급증하면서 1920년에 삼일교회, 1922년에 제2교회 등을 분립한 바 있다. 1940년 당시에는 윤하영 목사와 김효한 목사, 그리고 장로 고정륜(1917), 이항엽(1918), 이진경(1925), 백지엽(1925), 이명식(1929), 이태순(1936), 어명선(1934), 장형식(1934), 차근배(1934), 조시찬(1936), 이용실(1937), 전경현(1937), 이일록(1939), 안국보(1939), 김이귀(1936) 등이 시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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