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50) 미국 3년 - 강의환의 급서(急逝)

강의환의 급서(急逝)

 

그런데 하루는 월요일 밤 늦게 와 보니 내 룸메이트 강의환 군이 안절부절 딩구는[1] 것이었다. 웬일이냐?했더니 식중독인 것 같다면서 당장 오랜지 쥬스와 설사약을 사다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의예과 사년을 마친 사람이란 크레딧때문에 두말없이 그대로 했다. 그는 점점 더했다. 계속 토하고 딩군다. 새로 한 시였지만 나는 학교에 비상사태를 알리고 곧 의사를 청했다. 그는 끝까지 의사 청하는 걸 반대했다. 의사가 뭘 아느냐는 것이었다. 어쨌든, 학교에서도 나오고 의사도 왔다.

의사는 급성맹장염인데 너무 늦어서 터진지 오래고 복막염도 심하게 됐다고 한다. 당장 입원 수술해야 한대서 그리했다. 가는 즉시 수술했다. 중태지만 간혹 낫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튿날 그는 아프지 않다고 좋아했다. 의사도 경과가 생각보다 순조롭다고 했다. 그 날 밤에 이상한 말을 한다.

내일은 온전히 나아 퇴원할테니 갈아입을 내복과 와이셔츠와 빨아 대려 놓은 양복 위 아래와를 아침에 갖고 와 달라는 것이었다. 의복들이 단스[2] 속에 차근차근 정돈되 있었다.

이튿날 아침, 의복을 갖고 갔다. 그는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병원 대합실에 나 보러 왔다는 사람이 수십 명인데 병원에서 들여놓지 않아 내게로 오지 못하고 있다면서 웬 사람이 저렇게 많은가고 한다. 나는 헛소린줄 알고, 적당히 대답했다.

의사 간호원 사오 명이 종종걸음으로 강군 병상에 둘러싼다. 나도 같이 서 있었다. 강군을 피가 전부 곤두솟아서 귀, , , 코 할 것 없이 구멍마다 샘처럼 콸콸 내 뿜는다. 의사 간호원 모두 피투성이 된다. 그래도 까딱없이 그 피를 받아내고 씻어내며 엄숙하게 최후를 지켜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너무 끔찍스러울 거라고 나를 나가라고 했다. 내가 물러난 지 삼분 쯤 되어서 Passed away라고 전했다.

유해는 장의사에게 건사[3]했고 장례식 일체는 학교에서 맡았다. 켈소교장 주례로 학교 채플에서 영결식이 있었다. 학생, 졸업생, 목사 등 약 이백 명이 모여 애도해 주었다. 묘소에서도 교장이 하관식을 인도했다. 장지까지 자동차 사십여 대가 따랐다. 외국학생의 애처로운 불행을 더 많이 위로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건 후일담이지만 그후 만 30년이 지난 1963년에 피츠버그에 들러 성묘했다. 작은 비석이 아직도 그를 지키고 있다.

한 주일 지나 졸업식이 있었다. 피츠버그 제일장로교회에서 거행됐다. 뺑큇[4]이니 프로셋션[5]이니 상당히 거창했다.

강의환 군도 졸업생 명단에 있었다. 그의 졸업 논문은 내가 책으로 제본하여 학교에 제출했기 때문에 심사를 거쳐 그의 생전에 졸업이 결정된 것이었다.

임자 없는 졸업장이 졸업장함에 하나 남았다. 식이 끝난 다음 내가 찾아다가 그의 아버님인 강두화[6] 목사님께 보내드렸다.


[각주]

  1. 딩굴다 - ‘뒹굴다’(누워서 몸을 이리저리 구르다)의 비표준어
  2. 단스 - ‘장롱을 속되게 이르는 말
  3. 건사 - 물건을 잘 거두어 보호함
  4. 연회, 축하연(banquet)
  5. 행렬, 행진, 진행(procession)
  6. 강두화(姜斗和, 1874~?) - 장로교 목사, 교육자. 함남 정평(定平) 출생. 강두송(姜斗松) 목사의 형. 1907년 정평 31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성진(城津) 보수(普修)학교 학감을 거쳐 204월 용정(龍井) 영신(永新)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1917년에 장로안수를 받았으며 1919년에는 함북노회 교역자 생활비 증가를 위한 임시위원이 되어 각 교회 박봉교역자를 위해 수고하였다. 1919년에 신학교에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간도(間道)ㆍ토성포교회에서 시무하였다. 그후 용정ㆍ주을(朱乙)교회, 나진항(羅津巷)교회 등에서 시무하였고, 1940년 당시 대동(大同)군 장현(長峴)교회에서 시무하였다. 이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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