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60) 돌아와 보니 - 김태훈 장로님

김태훈 장로님

 

내가 미국가 있는 동안 경흥읍교회[1]에는 김태훈 장로님 사건이란 것이 있었다고 한다. 원래 경흥읍교회는 애국지사들의 개화운동 초기에 세워진 오랜 교회로서 채필근[2] 목사가 동경 유학 때까지 십년 이상 목회했고 그를 이어 김관식[3] 목사님이 캐나다 유학 때까지 목회했다.

김태훈 장로님은 창설 장로로서 경흥교회 주인이랄만 했다. 그는 목사 받드는 겸손, 교회 섬기는 충성, 개척전도의 열성, 젊은이들에 대한 기대와 사랑 등등 신앙과 덕행의 심볼이었다. 나도 청년 때, 간혹 경흥읍에 들리면, 으레 김 장로님 댁에 유숙했다. 그는 손수 식상을 들어다 놓고 기도하고 성경말씀으로 격려하곤 하셨다. 내가 서울서 돌아와 귀낙동에 소학교 세우고 마감녁에 교회를 시작할 때에도 김 장로님이 사십 리 길을 걸어오셔서 한 달에 두세 번 돌봐 주셨다. 처음에는 모일 데 없어 버들 숲, 시냇가에서 두세 번 같이 기도하고 예배하셨다. 내가 작별인사 드리고 미국 떠날 때, 그는 십리 길을 같이 걸어 언덕 위까지 오셨다. 그는 길가에 꿇어 앉아 나를 축복해 주시고 내 모습 안 보일 때까지 서 계셨다. 나는 그이를 내 교부(敎父)같이 존경했다. 그런데 내가 미국서 돌아왔을 때 그는 없으셨다.

 

우상

 

그에게는 아들이 한 분 밖에 없었다. 그 아드님은 천재로 알려진 젊은이로서 러샤말, 일본말, 중국말, 얼마의 영어까지도 자유로 지껄이는 재주꾼이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탕자였다. 그는 러샤, 중국, 만주 일대를 메주 밟듯 하면서 괴상한 장사를 했다.

그는 오래간만에 작은 불상을 하나 갖고 집에 나타났다. 한 옛날 금동제 불상인데 일본에 밀수하면 한몫 본다고 아버님께 소근거렸다. 그리고 그것을 안방 농장 위에 세워뒀다. 그런데 항간에는 김태훈 장로가 안방에 우상을 모시고 있다는 소문이 낭자하게 퍼졌다.

불상우상이라는 선교사들의 가르침에 맹종하던 그 당시 교회에는 여론이 뒤끓었다. 결국 김태훈 장로님은 책벌 대상이 됐다.

그건 불상을 모신것이 아니라, 아들이 상품으로 사 온 것을 둬둔것뿐이다해도 장로가 그런 걸 집안에 들여놓다니 말이 되느냐?는 것이었다. 아드님은 또 구름 가듯 어디론가 사라졌다. 강 건너 만주나 시베리아로 갔을 거라고 했다.

 

김태훈 장로님은 고민했다. 원로 장로로서 교회에 부덕(不德)을 끼쳤다는 것, 채필근, 김관식, 두 목사님에게 면목 없다는 것, 일종의 배교자같이 됐다는 것, 성직을 더럽히고 자신의 이름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 등등 - 이제는 더 살아야 할 아무 의미도 없다고 느끼셨다. 그래서 그는 하루, 뒷산 낙엽송 밀림 속에 그 불상을 파묻고 그 옆에서 자살하셨다.

 

그릇된 죄책감이 은혜를 눌러 양심과 이성까지도 질식시킨 것이라 하겠다. 한국교회가 얼마나 율법주의자였다는 걸 이 사건으로서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비극뒤이어 교회 청년들의 간통사건까지 발설되어 경흥교회는 태풍 속의 일엽주(一葉舟)같이 뛰놀았다. 그래도 교회는 침몰하지 않았다.


[각주]

  1. 경흥읍교회는 1910년 설립되었다. 김계언의 전도로 흥명학교 교장 김태훈과 교사 김문협 등 17인이 믿게 되어 흥명학교 강당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되었다. 채필근, 김관식, 김유직, 정기현 목사 등이 이 교회를 담임하였다.
  2. 채필근(蔡弼近, 1885~1973) - 호는 片雲(편운).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했다. 숭실전문학교와 조선신학교 교수를 역임한 교육자. 해방 후 친일 행위로 투옥되기도 하였음.
  3. 김관식(金觀植, 1888~1948) - 1908년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북간도로 향하는 도중에 함경남도 이원(利原)에 머물렀고, 이원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기독교인이 되었다. 1917년 경흥교회에서 장로로 피택, 1920년 함북노회에서 장로로 장립되었다. 1921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캐나다 장로교회 전도부의 학비보조를 받아 캐나다 녹스신학교를 거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구약을 전공했다. 귀국 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장으로 재직(1927-1938). 1938년 평양 장대현교회 목사가 되었고, 교회탄압이 가중되자 다시 목회를 중단하고 평양 근방 농촌에 은거했다. 그러나 일제의 강압으로 1945719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 조직될 때에는 그 교단의 통리(統理)가 되었고, 한달도 못되어 815 해방을 맞게 되어 월남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교회연합운동을 벌였으며, 1948WCC 암스테르담 대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