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61) 돌아와 보니 - 교회 순방

교회 순방

 

나는 집을 떠나 경흥군 일대의 교회들을 순방하기로 했다. 우선 사십 리를 걸어 경흥읍교회를 찾았다. 그런 시련을 겪으면서도 그 동안에 언덕 위 성황당을 뭉개버리고 거기에다 놀라운 새 예배당을 세웠다. 나는 며칠 있으며 밤 강연, 낮 심방, 청년들과의 친교 등으로 봉사했다. 거기서 수하(水下)로 내려가며 여러 교회들을 역방했다. 웅상교회는 만우형의 본교회여서 며칠 더 있었다. 그 교회 송원규 장로는 전부터의 친구다. 그는 내게, 어디 시골교회, 전도사로 밀어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시골교회 전도사는 자신이 없었다. 그 길로 회령읍에 가서 캐나다 선교사 버베지 목사 댁에서 저녁 대접도 받았다. 그런데 마침 회령교회[1]에서 함북노회가 모이는 중이었다. 청년 전도사들은 나를 신학석사라고 치켜 올리며 따라다녔다. 문준히 전도사가 실업가 이용석 씨와 가까웠기에 이 씨 저택에서 유했다.

청년들은 내가 노회 앞에서 귀국인사라도 하게 해 본다고 노회 임원들에게 교섭했었으나 퇴짜 맞은 모양이었다.

선교사 소개도 없이 노회나 총회의 추천도 없이 제멋대로 나갔던 사람을 이제 와서 우리가 알게 뭐냐 하는 마음 뽄새는 내가 떠날 때에 동결된 그대로였다.[2] 나는 노회 뒷좌석에서 얼마동안 방청했다. 방청금지까지는 아니었으니 천만다행이라고 하겠다. 내 인상으로는 은혜도 화평도 증발된 사무절차 뿐이었는데 예외 없이 평양신학교 출신 목사님들이니만큼 정통신학일색이었다. 나는 좀더 복음적인 신학교육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정통주의는 그대로가 율법주의여서 거기에는 자유하는 인간이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목사님들과 노회원 장로님들 얼굴은 평화 없는 목사 탈(마스크)로 굳어져 있었다.


[각주]

  1. 회령교회(會寧敎會) - 1908년 함북 회령군 회령읍에 설립된 장로교회. 성진에 있던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에서 안순용을 파송 전도케함으로 황학빈, 김홍준, 김희원, 윤천녀 등이 믿고 윤천녀의 집에서 예배드림으로 교회를 설립했다. 1910년에 이르러 교회성장이 부진함으로 성진선교부에서 김문삼을 특별히 파송하여 시무케함으로 기와집 2채를 매입하여 예배당과 목사 사택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함경대리회로부터 선교사 맥라우드와 목사 김영제를 회령교회 당회위원으로 임명하고 교회를 고나리하도록 하였으며 선교사회에서는 여전도인 이마리아를 파송하여 부인회를 돕도록 하였다. 1911년 선교사 바커(A. H. Barker ; 朴傑), 맥도널드, 의사 맨스필드 부부와 어학교사 강두화, 김관식, 김석현, 유영호, 최경재 등이 성진으로부터 이주하여 전도함으로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1915년 집사 김기현, 장규현, 황학빈, 서창희, 최경재, 최병악, 김기정과 영수 장홍규 등이 시무하였으며 191931운동 당시 최경재가 만세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동하였고다수의 교인들이 투옥되었으며 예배당이 파괴되는 등 핍박이 극심하였다. 1923년 최경재가 조사로 시무하였으며 장로 남윤용, 안홍태 등이 시무하였다. 그후 1940년 당시에는 전도사 한국보와 장로 최진숙(1926년 장립), 최상호(1928년 장립), 김종진(1931년 장립), 노덕순(1919년 장립) 등이 시무하였다.
  2. 송창근과 김재준이 캐나다 선교부의 지원 없이 유학을 다녀온 것과 달리 비슷한 시기 함경도 출신의 채필근(동경제국대학), 강봉우(동경고등사범), 김관식(토론토, 프린스턴신학), 문재린(캐나다 임마뉴엘신학) 등은 모두 캐나다 선교부의 지원으로 유학을 다녀온 경우였다. 고지수, 김재준과 개신교 민주화운동의 기원, 도서출판선인, 2016,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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