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77) 간도 3년 - 간도로

간도로

 

그때 아내는 만삭이었다.

하기 휴가도 끝날 무렵 하루는 숭전 교장으로 혼자 남아 있는 마우리[1] 선교사가 몸소 내 집에 찾아왔다. 마우리박사는 한국 선교사 중에서 단 한 사람 웨스턴 출신 내 동창이었다. 그래서 좀 다른 데가 있었다. 선교사들이 다 귀국했는데도 혼자 끝까지 남아 있었다. 숭전이 그대로 있는 동안 자기는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취직할 생각이 없느냐고 묻는다.

웬 영문이냐구 따졌더니 북간도 용정 은진중학교 교장에게서 교목 겸 성경교사 한 사람 취천해 달라는 편지가 왔다는 것이었다. 너를 취천[2]해도 좋으냐 한다. 좋다고 대답했더니 그럼 당장 떠날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비는 자담이란다. 산정째교회에서 작별 정표라고 얼마 보내왔다. 부산 있는 만우형에게 통지하고 약속한 날짜에 서울서 만나기로 했다. 경흥 창꼴집까지 갈 차표는 샀다. 서울서 여관에 들 돈은 없다. 그래서 남대문교회 김영주 목사에게 하룻밤 유숙을 청해 두었다. 그는 고향 친구로서 그가 스쿨톤 선교사 서기로 있을 때 순회강연도 같이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 목사는 정거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여관갈 돈도 없고해서 덮어놓고 정거장 뒤 합동에 있는 그의 사택으로 갔다. 식모가 나와 코딱지만한 행랑방을 보이면서 여기서 여섯 식구 자라는 것이었다. 호떡 몇 개 사다가 아이들을 먹이고 끼어 앉아 밤을 새웠다. 김 목사는 그때 부흥회에 들떠 안채에서 통성기도로 철야하는 중이라 했다. 은혜 위에 은혜를, 은혜 위에 은혜를이것이 밤새도록 반복하는 단 한마디 쎄리프였다.

김 목사는 종시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부인도 나오지 않는다. 부흥도상인사절(復興途上人事絶)이랄까. 아무튼 철저한 신령파가 된 것 같았다. 우리가 온 것을 마귀 유혹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밤 깊어서 식모가 밥을 한 상 차려내왔다. 우리는 이튿날 새벽같이 나왔다.


[각주]

  1. 모우리(Mowry, Eil M. 1880~1971) -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교육가. 한국명 모의리(牟義理). 미국 오하이오주 출생으로 우스터(1906), 웨스턴신학교(1909)를 졸업하였고, 부인(Lois Thomas)과 함께 한국 선교사로 1909102일에 내한하였다. 평양을 중심으로 교육ㆍ전도사업에 헌신하게 되었는데, 숭실학교 교사와 평양의 숭인ㆍ숭덕 등 지방 14개 소학교 교장직을 역임하였고 26개 교회를 시찰하였다.
    그는 한국의 독립운동과 민족 정신에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다. 191931운동 당시에는 만세시위를 주동하던 숭실학교의 제자들을 도와준 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당시 교사인 김영신(金永信), 숭실학교 학생 김태술(金泰述)ㆍ박기복(朴基福)ㆍ이인선(李仁善) 등이 모우리 집에 숨어있다가 발각되었는데, 그는 범인장닉죄(犯人藏匿罪)로 평양감옥에 구금되었고 징역 6개월에 구형되었다. 1심에서 징역 6, 2심에서 1개월, 3심에서 벌금 50원을 물고 석방된 그는 이후 일경의 삼엄한 감시 대상이 되었다.
    1935년 평양에 있는 기독교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 문제가 일어나면서 매큔(尹山溫) 박사는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의 교장직에서 19361월 모두 물러나게 되었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회에서는 34일에 모우리 박사를 숭실전문학교 교장으로 그리고 숭실중학교 명예교장으로 하여 사태의 수습을 기하기로 하였다. 모우리 교장은 진통기의 학교를 이끌고 나가기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결국 19371029일 북장로회 선교회에서는 일대 용단을 내려 폐교하기로 결정을 내려 숭실전문학교ㆍ숭실중학교ㆍ숭의여학교 등 삼숭(三崇)의 폐교계를 제출하게 되어 1938319일 폐교됨으로 그의 교장직도 이로써 끝났다. 이후 그는 평양에 계속 머물면서 교회를 돌보았는데 1940년 강제 추방되기 전까지 1주일에 2-3교회를 인도하는 활약을 보였다. 19491월 한국 선교 40년의 생활을 마치고 은퇴하였다. 한국 정부는 그의 봉사와 공로를 기려 1950(건국공로훈장 문화훈장)1968(국민장)에 훈장을 수여하였다. 1967년 숭실대학 창립 70년을 맞아 잠시 한국에 나왔던 그는 1971년 미국에서 별세하였다. 김재준 목사를 은진중학교에 추천할 당시에는 숭실대학교 제5대 학장(1936.3-1938.3)으로 있을 때였다.
  2. 취천 - ‘추천의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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