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창꼴집』에
식구는 하용(河鏞) 조카가 데리고 함경선 기차에 올랐다. 다음날이면 아오지에 내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며칠 후에 간다고 했다. 나는 『만우』와 함께 서울에 남았다. 『만우』의 부산 사업 이야기도 들었다. 이제 이후 우리의 할 일도 의논했다. 당분간 나는 만주에서, 『만우』는 부산에서 주어진 일에 머물기로 했다. 다시 모일 때를 기약하며 작별했다.
만삭된 아내는 날짜로 따지면 벌써 산일이 지난 셈이란다. 그런 걸 데리고 먼 길을 떠난 것이다.
기차 칸에서 해산해도 할 수 없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육감이 그랬다는 말이다.
아내도 태연했다. 결국 아무 일도 없었다. 나는 며칠 후에 뒤따라 『창꼴집』에 갔다. 다른 집들은 무너지다 남은 폐허 같았지만 『창꼴집』만은 아직 옛 모습이 남아 있었다. 맹자(孟子)가 『부모님 가족이 계시고 형제 탈없이 지내는 것이 첫째 즐거움』이라(父母俱存兄弟無故一樂也) 했는데 칠십 넘으신 부모님이 안녕하시고 모여앉은 식구들 반겨주니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나보다 먼저 가 있는 내 식구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빠, 큰엄마, 언니, 오빠들에게 귀염받아 응석이 늘었다. 아내는 『창꼴집』에 가자마자 『첫 아들』을 낳았다. 할머니는 하늘에 오를 듯 즐거워하셨단다. 『연달아 손녀 셋이었는데 또 손녀였더라면 할머니는 무척이나 노여웠을 것』이라면서 아내도 좋아했다.
이번에는 할아버지께서 나더러 이름 지으라시기에 『은용』(恩鏞)이라고 했다. 『은진』(恩眞) 가는 도중에 『은혜』로 보내주신 생명이래서 『은』자를 붙였다.
아내와 아이들은 한 달쯤 큰댁에서 쉬게 하고 나는 혼자서 간도 용정으로 갔다. 동쪽으로는 태평양 건너까지 발전했지만 대륙 쪽으로는 두만강을 건너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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