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81) 간도 3년 - 『영국덕이』

영국덕이

 

용정에 도착한 다음날 영국데기[1]라는 캐나다 선교사 마을 부루스[2] 교장 부부를 방문했다. 반가운 표정이었다. 아직도 여름 방학이라 학교는 비었고 교정에는 풀이 자랐다. 길 양켠의 포플러 나무가 가로수라기보다는 숲이 되 있었다. 나무는 땅의 영광이다. 언덕 기슭에는 선교부에서 경영하는 병원이 있다. 이름은 동산병원이고 원장은 뿔랙이란 의사고 한국인 의사도 몇 분 있었다. 31일 독립운동 그때에는 데모군중의 보호구역으로 이름난 고장이란다. 중국 순경도 일본 순사도 못 들어오는 치외법권구역이었기 때문이다.

병원 바로 뒤 언덕 기슭에 명신소학교, 명신중학교가 있다. 모두 여자들 교육기관으로서의 밋션스쿨이다. 그 옆에 동산교회[3]가 있다. 담임은 이성국[4] 목사였다. 그리고 시내에 문재린[5] 목사가 담임한 중앙교회[6]가 있다. 그래서 교회, 학교, 병원의 삼위일체적 선교방안이 실시되 왔던 것이다.

선교사 주택 뒤에는 초장이 있어 젖소 몇 마리 한가로웠다. 그 뒤로 더 올라가면 중국인 공동묘지다. 땅 위 또는 파헤친 구덩이에 뚜껑 제쳐진 관들이 너저분하다. 선교사가 주택 뒤뜰 가장자리에 행랑식으로 길게 지은 한옥은 선교사 기관에서 일하는 한국인들 사택이다.

은진중학도 물론 영국데기에 있다.[7] 학교교사(敎舍)라기보다 큼직한 주택 같은 집이었다. 강당은 세우다만 어설픈 건물이어서 여기서도 역시 강당부터 완성해야 할 판이었다.

 

간도란 곳은 조선독립운동자들의 거점이기도 했고 후에는 공산주의자들의 활동무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군국주의자들의 병참기지로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일본군대의 한국인 학살이 조수처럼 밀려오고 밀려가곤 했다.

내가 가기 바로 전 학기에도 은진학교에서 좌익학생들의 난동이 벌어져서 교감이었던 이태준[8] 목사와 부루스 교장은 생명이 위험할 뻔했다 한다. 그러나 이태준 목사는 원래가 뱃장 센 분이었고 몸집이 크고 힘도 장사였기에 학생들이 그 위신에 눌려 흐지부지 항복해 버렸다. 그 사건을 계기로 좌익 학생들은 남김없이 퇴학 또는 자퇴되고 교풍이 기독교로 통일되었단다. 나는 깨끗하게 소제된 빈집에 입주한 셈이었다.

용정에는 은진학교 이외에 일본 두산만(頭山滿)의 부하 낭인(浪人)인 히다까(日高丙次郞)가 경영하는 영신중학교[9]가 있고 좌익 사람들이 주장하는 동흥중학교[10]가 있었다. 동흥중학교는 결국 존속할 수 없게 되었고 영신중학교는 공립학교 같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만큼 은진은 기독교적인 사립학교로서의 엄숙한 역사적 사명을 자각해야 할 판이었다. 교인을 얻으려는 전도기관으로서의 학교가 아니라 다가오는 역사의 격랑에 대결하여 새 세계 새 인류의 지도자 될 창조적 소수를 길러내는 학원으로 조형되어야 한다고 나는 다짐했다.


[각주]

  1. 영국덕이, 영국데기 영국 사람들이 살던 언덕을 줄인 것으로 영국 국적을 지녔던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들이 살던 동네라는 뜻이다. 1913년 박걸(A. H. Parker) 선교사가 용정에 일명 영국덕이(데기, 英國德 )’ 선교부를 설이하고 영국기를 게양하여 치외법권 지역임을 명시하고, 가도지역 한인 기독교 사회를 관할하게 된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함해노회사편찬위원회, 함해노회80년사, 대한예수교장로회함해노회, 1992, 107-109.
  2. 부루스(George F. Fruce, 富禮壽) - 캐나다장로교 선교사. 한국명 부례수(富禮壽). 1897224일 캐나다 온타리오주 타라에서 출생했다. 1920년부터 킹스턴에 있는 퀸즈대학교 통신교육과정에 등록하여 매 여름학기마다 1925년까지 수학하였고 이후 2년 동안 더 수학하고 동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277월 결혼한 부인(Ellen T. Bruce, 1896-)과 함께 해외선교를 지망하였고 마침내 캐나다 연합장로회 소속의 교육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되었다. 그해 9월 같은 캐나다 장로회 한국 선교사인 그리어슨(R. G. Grierson ; 具禮善) 부부가 일시 귀국했다가 재차 내한하는 길에 함께 캐나다를 출발하였고 한국에 도착한 후에는 2년 동안 서울과 함흥에 머물면서 어학공부 등 선교활동을 준비하는 한편 선교회 사업을 도왔다. 그후 1929년에는 캐나다 장로회선교회의 선교지역인 간도 용정에 설립된 은진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본격적인 교육선교활동을 개시하였다. 1934년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였고 1935년까지 토론토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수학하였다. 한편 중ㆍ일전쟁 이후부터 일본의 만주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선교사업에도 많은 제약을 가하였고 특히 한국독립운동의 근거지인 간도에서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은밀히 지원하고 있던 캐나다장로회에 대한 배척이 심화되었다. 이에 부인과 자녀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단신으로 교육사업을 계속하였다. 1936년에는 서울에서 연희전문학교 교육학 교수인 언더우드(H. H. Underwood; 元漢慶)로부터 교수법에 관한 사사를 받기도 하였다. 혹심한 탄압 가운데에서도 193910월까지 은진중학교 교장으로 봉직하였고 태평양전쟁 발발후 모든 선교사들이 일제에 의해 강제 송환되었을 때도 끝까지 남았다가 19413월 가장 늦게 간도를 떠나 본국으로 귀한하였다. 귀국한 해에 앨버타 대학교에서 교육학사 학위를 취득한바 있고 그후 줄곧 캐나다 에드몬톤학교의 사범학교 통신교육과정의 관리자로 봉직하고 1962년에 정년 퇴임하였으며 캐나다 온타리오주 돈 밀즈에서 여생을 보냈다. 부인과의 사이에 34녀를 두었다.
  3. 동산교회 : 1922년 만주 간도성 연길현 용정가 동산(東山)에 설립된 장로교회. 1940년 당시 이권찬(李權瓚) 목사와 장로 이보국(李保國; 1927년 장립), 김영선(金永善; 1937년 장립), 전근석(全瑾錫; 1933년 장립), 김오성(金五成; 1937년 장립), 허상훈(許相勳; 1925년 장립) 등이 시무하였다. 동산교회는 만주 용정중앙교회에서 분립된 교회. 안병무가 출석했던 교회로 장하구, 최봉삼, 장덕순, 도기순 등 훗날 평신도 교회운동의 향린교회 주축 멤버들이 신앙생활을 공유하였다.
  4. 이성국(李成國, 1885~1966) 1913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은진중학 교목을 지내고 동산교회를 담임하였으며, 1929년에서 1932년까지 동만노회 노회장을 역임하였다. 해방 후 월남하여 서울 초동교회(1946-1949)를 담임하였다. 그의 아들 이선용 목사는 조선신학교 1회 졸업생인데 전남 구례에서 목회하다가 625 당시 빨치산에게 순교를 당했다. 이선용 목사의 아들(이성국 목사의 손자) 이영찬 목사는 서울 성암교회를 섬겼으며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69)하였다.
  5. 문재린(文在麟, 1896~1985) - 장로교 목사. 호는 승아(勝啞). 함북 종성 출생. 그가 4살 되던 해인 18992월 그의 선친 문치정(文治政)을 따라 만주로 이주하였으며 간도 화룡현 장재촌 남쪽 명동에서 자랐다. 본시 한학의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8-12살에 규암재(奎岩齋)에서 한학을 배웠고 그의 선친을 비롯한 한인 이주민이 설립한 명동서숙(明東書塾 : 당시 초등학교 과정), 명동중학교 시절에 기독교교육을 겸하여 받았다. 즉 명동서숙 교사 정재면으로부터 성서를 배웠으며 명동중학 재학시절(1911) 목사 김영제(金永濟)의 집례로 세례를 받아 정식 입교인이 되었다. 1922년 장로로 장립되었고 1926년에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20)하였다. 그때까지는 7도 구역 8개 교회를 돌보는 순회 전도사였다. 19271월 간도노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은 그의 첫 부임지는 명동에 소재한 토성포교회였다. 그러나 부임한 지 얼마되지 않아 캐나다 선교부로부터 유학 초청을 받게 되어 192810월 캐나다 터론토 대학 임마누엘 신학과에 입학하여 19314월 신학사 학위를 받았다. 19324월 귀국하여 동만의 어머니교회로 불리는 용정중앙교회에 부임하였다. 1945720, 미국 스파이라는 허위 죄목으로 그를 체포되어 811일에 석방될 때까지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해방 후에 조선공산당과 소련군대에 의해 미국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붙잡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는 월남하여 1946618일 서울에 도착했고 그 길로 송창근 목사 후임으로 경북 김천에 소재한 황금동교회에 부임했다. 1948년 돈암동 신암교회로 전임했다가 625사변을 만나 제주도 피난 생활을 하였다. 1955년부터 강원도 순회목사가 되어 순례길에 올랐으며 55630일까지 강원도 화천중앙ㆍ사포리ㆍ수력전기ㆍ홍성ㆍ춘천ㆍ구평동ㆍ교동 등지에 7개 교회를 설립하였다. 19557월 대구 한남신학교(기장) 교장으로 취임하여 597월까지 근속하였으며 이후 서울 중부교회를 설립하여 시무하던 중 19617월 정년은퇴하였다. 618월부터 그는 남은 여력을 평신도 운동에 주력하였으며 캐나다에 이민생활(71-81)을 하였으며, 1981년 귀국 후 간도한인교회 운동사 집필 중 별세했다.
  6. 1907년경 만주 용정에 설립한 교회로 일제 강점기 박예헌, 김내범, 이태준, 문재린 목사 등 민족의식이 강했던 목사들이 목회하였고, 윤동주가 중학생 시절 출석한 교회이다. 1946년 공산주의자들의 교회를 접수하면서 폐쇄되었다.
  7. 은진중학교는 선교사 푸트(W. R. Foote, 한국명 富斗一)에 의해 용정촌 예수교서회 2층에서 28명의 아이들과 성경학교를 시작으로 개교했다. 1921년 바커(A. H. Parker : 朴傑) 목사가 제2대 교장으로, 1922년에는 스코트(W. Scott, 徐高道) 목사가 3대 교장으로 취임했고, 1924년 스코트 목사가 함흥영생고등학교로 전임한 후 프레이저(E. J. Fraser, 한국명 裵禮任) 목사가 4대 교장으로, 1928년에는 브루스(G. Bruce, 富禮壽)5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8. 이태준(李泰俊, 1893~1972) - 장로교 목사, 교육가. 호는 일송(一松). 평남 평원군 공덕면 양수리에서 이승각의 아들로 출생. 7세 때부터 한문을 배웠고 13세때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소학교에 입학하여 2년만에 졸업하였다. 1909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졸업하였으며 계속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1917년 졸업하였다. 그해 5월 간도 용정에 있던 캐나다 선교사 푸트(Foote; 富斗一)의 초청을 받아 간도 용정으로 가서 2년 동안 시골 교회를 순회하며 전도하는 한편 용정청년회 회장, 동아일보 지국장을 역임하였다. 191931운동 때에 교회 청년들과 용정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202월 그는 푸트 선교사의 도움으로 은진중학교를 설립하였고 자신은 교무주임이 되어 민족교육에 매진하였다. 그러던 중 19203월 은진중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31운동 1주년 기념 만세운동을 준비하다가 발각될 때에 그도 연행되어 수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해 용정중앙교회 장로로 장립되었으며 1921년에는 동산교회를 개척, 설립하였다. 은진중학교에서 교육에 종사한 지 10년째 되던 19294월 휴가를 얻어 일본에 건너가 칸사이학원 신학부에 입학하여 2년간 신학을 수학하였다. 1931년 귀국하여 그해 5월 동만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용정중앙교회 목사로 시무하면서 은진중학교 교무일을 계속 맡게 되었다. 1935년 일제의 탄압이 극심하여 모든 것을 사임하고 인쇄업에 종사한 일도 있었다. 1940년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외국인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철수하게 되자 당시 캐나다선교회 회장 스코트(Scott)는 그에게 은진중학교 인수를 요청하고 본국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만주국의 설립과 함께 학교를 만주국 정부에 몰수당하였다.
    815해방이 되자 학교를 되찾아 잠시 운영하였으나 19464월 또다시 중공군에게 몰수당하고 말았다. 공산당의 압력이 점차 가중되자 결국 1946년 귀국, 월남하였다. 월남후 서울에 상도동교회를 설립하였고 1948년 돈암동에 미암(美岩)교회를 개척, 별세하기까지 이곳에서 무보수로 봉직하였다. 교회 목회와 함께 기독교연합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대한성서공회 위원장(1963),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위원, 기독교교육협회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이외에 경기노회장(1959), 총회협동사업책임위원(1959),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위원장(1968), 숭의여자중ㆍ고등학교 이사(1950), 숭실고등학교 이사장(1961), 총회신학교 이사, 대한신학교 이사, 외지선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14월 고혈압으로 쓰러진 후 긴 투병생활을 하다가 197211일 별세하였다. 장공 김재준 목사는 이태준 목사의 설교집인 무너지는 담 1972의 서문에서 사회와 교회에서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대륙의 거탑(巨塔)”같은 분이라고 기리고 있다. 유족으로 부인 박봉영 권사와 18녀가 있는데 아들 성돈(盛暾)은 장로가 되었다.
  9. 영신중학교는 1921528일에 민족학교로 개교하였지만, 초등학교 과정인 영신학교는 1912년에 이미 민족교육자인 윤상철에 의해 설립되어 있었다. 1924년 북간도 지역에 대흉년이 일어나 운영이 어렵게 되자 교감 윤화수는 일본인 히다카의 힘을 빌어 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히다카는 당시 조선총독부의 첩보원이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애국동포들의 항의로 물러났던 히다카는 19254월 학교 운영권을 넘겨받았다.
  10. 동흥중학교는 만주에서 활동하는 천도교단에 의해서 1921101일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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