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86) 간도 3년 - 어머님 가시다

어머님 가시다

 

1936년 여름, 어머니는 즐거우셨다. 헤어졌던 아들, 손자, 며누리[1], 옛집에 다시 모여 오손도손 옛 이야기에 꽃을 피우고 등불 심지 돋우며 밤 새워도 끝안나는 죄 없는 까십보구[2]싶어 애타던 지나간 긴 세월도 이제는 꿈처럼 자취 없고 어린 것들 어리광 힘든 줄도 모르는 나날이었다. 더군다나 갓난 손자 품에 안고 또닥이는 할머니 막내 손녀 혜원이는 등 뒤에서 재재거리고 - 그러나 둘째 아들이 나타나 제식구라고 몽딱[3] 끌고 호지 땅 용정으로 가버린다. 등에 업히고 가슴에 안기고 밖에 나가면 손목잡고 아장아장 따라 걷던 어린 것들이 일시에 떠나버린다. 온몸이 허전하고 기()가 증발되고 형해[4]만이 남은 것 같았을 것이다. 막내손녀 혜원을 업고 멀리까지 따라 오시다가 제어미에게 내주고 언덕 위에 오래오래 서 계신다. 아마 남몰래 우셨을 것이다.

용정 가서 짐을 풀자마자 전보가 왔다. 모친 위독 속내 형이었다.

나는 새벽차로 떠났다. 아내는 같이 가지 못했다. 갓난 애기 철부지 어린 것들 거기에 짐짝들이 뒤죽박죽 떠날 수가 없었다. 종착역인 아오지에 희용조카가 나와 있었다. 전보칠 때 벌써 운명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우리 식구를 보내시고 들어오시자 졸도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숨을 거두셨다고 한다.

아오지서 이십 리를 걸어 창꼴집에는 밤중에 닿았다.

어머니는 깊이 주무시는 것 같았다.

나는 감정이 동결된 상태였다. 어머니 머리맡에 꿇어 앉아 제가 왔습니다인사를 드렸다. 도무지 세상 떠나신 것 같지 않았다. 소리 질러 한바탕 통곡이라도 해야 할텐데 무감각이다. 사르뜨르의 실존주의 소설[5]에 나오는 아들 - 어머니 세상 떠났대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아들이 그대로 였다. 죽음이 철학적 신학적 추상화되어 어머니의 죽음도 현실아닌 개념으로 파악된 것이 아니었을까?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비인간이 된 것이다.

부엌에서 바쁘게 일하던 형수님이 너무 딱해서였는지 행주치마에 손을 닦으면서 들어와 한바탕 목놓아 통곡하셨다.

다음날에사 잃었던 감정이 약간 풀려서 눈물이 조금 흘렸다. 소리 없는 혼자 울음이다.

상례 절차는 아버님이 원하시는 대로 유교 상례를 따라 5일장으로 뒷동산에 모셨다.

나는 불효자식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어머님은 지금도 내 심장에 살아 계시다.

어머니 사랑은 무조건이다. 내 생각, 내 한 일, 하려는 일, 믿는 일, 저지른 잘잘못, 그런 딱지나 조건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었고 그는 내 어머니였다. 그것은 영원히 그럴 것이다.

사랑은 영원하다(고린도전서 13:8)

 

어머님은

1862(壬戌) 121일에 나셔서

1936(丙子) 810일에 향년 75세로 별세하셨다.


[각주]

  1. 며누리 - ‘며느리의 방언
  2. 보구 - ‘보다의 방언
  3. 몽딱 - ‘몽땅
  4. 형해(形骸) - ‘사람의 몸과 뼈
  5. 장 폴 사르트르의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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