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98) 조선신학원 발족 - 신학교 설립사무부터

 신학교 설립사무부터

 

원래 신학교 설립기성회를 대표하여 그 실무를 맡은 분은 채필근 목사였다. 그는 그 업무를 완수하는 대로 교장 자리에 앉을 것을 약속받고 있었다.

총독부로부터 신청만 하면 인가한다는 언질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발기 위원회로서는 총회 인가 맡은 다음에 총독부에 신청하는 것이 바른 순서라 하여 보류하기로 했다. 그 기간이 약 반년이었다.

결국 총회에서는 선교사들이 문 닫고 간 평양신학교를 직영 신학교로 하여 정식 인가신청을 내기로 했다. 그래서 서울의 조선신학교 설립청원은 제풀에 묵살될 운명에 직면했다.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기보다도 더 싱거워졌다.

그런데 폐회 직전에 평양의 윤원삼[1] 장로가 긴급 발언을 요청하여 조선신학을 대변하는 일장 연설을 했다 한다. 이 교회의 수난기에 총회 산하의 현직 장로가 교회를 지키려는 충성으로 오십만 원의 사재를 주의 제단에 바쳤는데 총회로서 감사와 격려의 표지는커녕 냉대와 질시로 대한다는 것은 인지상정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처사다라고 전제하고 제단의 성금까지 교권다툼에 희생된다면 금후 어느 신도가 충성을 보이겠느냐 하고 통매(痛罵)[2]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옆 찔러 절 받기로 김대현 장로님에게는 총회 결의로 감사의 뜻이 전달되었고 조선신학교는 사설기관으로 인가수속을 계속 진행시켜도 좋다는 묵허[3]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도 때늦게나마 전문학교령에 의한 조선신학 설립인가 신청을 총독부에 제출했다. 평양신학교에서도 거의 동시에 같은 절차를 밟았다.

그런데 평양신학교를 위해서는 평남도지사(일본인)가 직접 선두에 나섰다.

기독교의 일본화 또는 일본적 기독교를 강력히 추진시키려면 그 대적인 선교자들 발뿌리에 폭탄을 던져야한다.이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한다. 사실 한국의 장로회 현직 목사가 거의 전부 평양신학교 출신이라는 현실에서 일본화정책에서도 평신을 이용하려는 것이 당연한 상식일 것이다. 그러나 총독부에서는 양손에 떡을 쥔 셈이어서 한때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교파에 신학교 둘을 허락해도 되느냐? 하나만 허락한다면 어느 것을 택하느냐?

위치로 본다면 수도인 서울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교회의 일본화 정책을 위해서는 평양이 그럴 듯하다.

결국 우유부단한 수개월을 지냈다. 그 공백기간에 교회 내 정치 브로커들만이 아니라 직업적 정치 낭인들까지도 끼어들어 막후[4] 암약[5]이 볼만했었다. 총독부에서는 일본교단 통리 도미다 미쯔루(富田満)에게도 의논했다고 들었다. 그는 한 교파 한 신학교 정책을 진언했다 한다. 결국 평양켠이 우세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관제 신학교맡을 친일교장으로서 채필근 목사가 뽑혔다는 것이다. 그는 옛날 평양신학교 출신으로 친일 목사로, 동경제대 졸업생이니 안성마춤이었다.

그런데 채 목사는 서울에 있으면서 지금까지 그 일에 분주했다. 그런데 하루 아침 그는 간다온다 말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어쩐 영문인지 몰랐다. 설립자와 기성회 간부들도 모르고 있었다. 몰랐다는 것은 그의 행방을 몰랐다는 말이다.

수일 후에 평양신학교가 인가되고 채필근 목사가 교장으로 취임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큰 소가 없어지면 송아지가 대신한다는 식으로 남은 일은 내가 맡을 수밖에 없었다.

할 일을 세 항목으로 나누어 보았다.

 

평양신학교와 동등의 신학교를 서울에도 인가해 달라는 기정방침을 관철해 보자는 것, 안될 줄 알면서도 해 보자는 것이다.

그것이 안되면 총독부 인가문제에 너무 개의할 것 없이 신학교육의 실속만을 채워 보자는 것.

전국 교회 특히 경기 이남의 교회 안에 통일된 지지 세력을 육성하자는 것. 이것은 졸업생의 목사임직에도 관계되는 실제문제이기 때문이다.

 

첫째 과제에 대해서는 당분간 관망하기로 했다.

둘째 과제에 있어서는 도청 권한에 속한 단기 강습소로 출발해 놓고 보자는 방침을 세웠다.

나는 도청에 들러 문의했다. 경기 도청에서는 신학교를 평양에 뺏긴 분노도 있었기에 내게 대해서는 호의와 후원이 대단했다. 담당관은 일본인이었지만 친절했다. 그는 격려의 말까지 한다.

학교 인가 없으면 신학교육 못하나요? 강습소 인가로서도 얼마든지 신학을 가르칠 수 있을 겁니다. 곧 인가해 드릴테니 걱정마시오. 오히려 까다롭지 않아서 좋을지 모릅니다.

셋째 과제인 교회관계는 상당히 복잡했다.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경기 이남 교회에서의 첫째 난제는 교권과 관련된 지방색의 흐름이었다.

황ㆍ평 양도 교회가 전체 교인의 3분지 2를 차지하고 있으니만큼 다수였고 따라서 남도 교회는 거듭하는 소수자서러움앙심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에 신학교가 하나 생겼다. 그것이 또 다수의 횡포에 희생되고 있다. 이것은 묵과할 수 없다. 이번에는 총회를 나누는 한이 있더라도 신학교는 지켜야 한다.

그래서 총회 분립운동이 암암리에 진행되어 분립총회 대의원수와 그 명단까지 작성되고 소집날자까지 통고되었다 한다. 그러나 대의원들이 출발 직전에 연행되기도 하고 서울역 도착 즉시 경찰에 의해 송환되기도 하여 회집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총독부 지령에 의한 경찰의 방해공작이었다.

이 총회분립의 주목적은 교권획득이었고 신학교 문제는 구실 또는 명분으로 이용된 것이었을지 모른다.

이 총회분립운동 진행에 있어서 그들은 내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눈치는 챌 수 있었다.

나는 이 작업의 주동자 중 한 분이신 승동교회 오건영[6] 목사님에게 내 태도를 표명했다. 이 총회분립 문제는 신학사상이나 신앙고백적 진리파지(把持)[7] 문제가 표면화 한 것이 아니고 남과 북의 교권 싸움이 노골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솔직히 말한다. 신학교는 이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며 이용되지도 않는다. 총회분립 문제는 내 알바 아니지만 내 의견을 묻는다면 나는 반대다.

어쨌든 이 작업은 흐지부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기회만 있으면 재연할 불씨는 남아 있었다.

둘째 난제는 신학문제다. 남도 장로교회의 중심은 대구였다. 대구는 서울 이남의 평양이라고 한다. 평양신학교 출신 원로급 목사님들이 대부분의 교회를 맡았고 신학적으로는 정통주의 일색이다. 그들은 서울에 새로 된 다른 조선신학교에 대하여 지지보다도 감시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것이 신신학파의 책동이나 아닐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경기노회는 어떠한가? 교권쟁탈의 첨단적인 책사들이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신학문제에 있어서는 유동적이어서 대구의 기류와는 같지 않았다.

경기에서의 두목은 전필순이었고, 최석주유재한[8] 등 목사가 에이드로 일하는 것이었다. 교권쟁탈이란 서북교권을 기호교권에로 교체하자는 것이다.

전필순은 벌써부터 똘똘뭉친 자기 그룹을 만들어 갖고 있었다. 서울 안에 서북세력을 체제화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정인과(당시 총회 종교교육부 총무) 뿔럭[9]에 대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도 생각된다. 사실 그들은 이전에 신흥우 씨 중심으로 적극신앙단을 조직하여 한번 도전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정인과를 지지하는 절대적인 서북세력 앞에서 참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의 전필순 그룹은 그 그루터기라 하겠다.

이 전필순 그룹에는 서울 근방의 감리교 목사들도 얼마 가담해 있었다. 감리교 안에도 같은 남ㆍ북 세력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전필순은 나를 찾아왔다. 자기 집에서 저녁을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그의 부인 차사백[10] 여사도 지면있는 분이었기에 인사도 할겸 잘되었다고 동행했다. 댁에 들어가니 전씨 그룹이 다 모여 있었다. 나는 그게 그룹멤버인줄은 몰랐었지만 몇 마디 대화에서 곧 알게 되었다. 감리교 목사들도 섞여 있었다. 다 아는 친구들이다. 얼마 이야기 하다가 선약이 있다고 나와 버렸다. 전필순은 나를 배웅하면서 나도 그 그룹에 들라고 권한다.

모두 내 아는 친구니 얼마든지 가까이 지낼 수는 있지만 그룹에들 생각은 없다고 나는 대답했다.

그 후에도 자주 모이는 모양이었으나 내게 알리는 일은 없었다.

멀리하면 방해할 것이고 가까이하면 서울화할 것 같아서 나는 신중을 기했다. 서울은 일종의 소용돌이였다고 할까. 그래서 나는 서울에서는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관계를 갖기도 했다.

전필순은 이런 말도 했다. 교회에도 정치가 있는 것이고 정치는 권력을 노리는 것이 사실인만큼 교권쟁취 운동이 교회 총회나 기관에 없을 수는 없다. 그런데 평안도 교권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충동적인 요소가 다분히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경도가 교권을 잡으면 큰일이다. 그들은 한 번 잡으면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의지적이기 때문에 걸머쥐면 뺏기 어렵다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나는 듣고만 있었다. 나도 함경도내긴데 무슨 정치적 포석으로 그런 말을 내게 했는지 지금도 판단이 분명해지지 않는다. 일종의 예방전쟁통고였는지 기상측정 발룬이었는지 알숭달숭[11]하다.

서울에 대해서는 그때그때 형편을 보아 대처하기로 하겠지만 대구의 굳어진 정통아성에는 어떻게 접근하며 어떻게 극복하고 그들을 조선신학교 지지 세력에 가산할 수 있을까? 어려운 숙제가 아닐 수 없었다.

통틀어 서울 세력을 라 하고 대구 세력을 라 한다면 좌()가 지배적인 경우 총회분열의 우려가 짙어진다.

()가 극성부릴 경우 평양신학의 홍수 때문에 조선신학이 익사(溺死)할 우려가 있다.

그래서 나는 당분간 발톱을 감추고 날개 펴 하늘에 떠 있는 그러나 그 눈은 숲속의 토끼까지도 놓치지 않는 독수리가 되려고 마음먹었다.


[각주]

  1. 윤원삼(尹愿三, 1885~?) - 장로교 장로. 독립운동가. 188533일 평남 평양부 상수리에서 출생. 1911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8)하였다. 이후 상업에 종사하면서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로 시무하던 중, 이른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고 이후에는 더욱 독립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31운동 당시 평양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그해 4월 석방되어 상해로 망명, 상해 임시정부의 교통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0년대 귀국하여 장대현교회 장로로 계속 시무하였다.
  2. 통매(痛罵) - 몹시 꾸짖음
  3. 묵허(默許) - 잠자코 내버려두고 슬그머니 허락함
  4. 막후(幕後) 겉으로 들어나지 않은 이면의 장소
  5. 암약(暗約) 떳떳하지 못한 약속을 남몰래 함
  6. 오건영(吳建永, 1882~1961) - 장로교 목사, 교육가. 호는 청구(靑丘). 188284일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문촌리(文村里)에서 오필선의 장남으로 출생.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1904년 대한제국 전보국양성소를 졸업하였다. 졸업후 우정국 전보주사로 근무하게 되었는데 1908년 승동교회의 박승봉 장로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전보주사직을 내놓고 평양 대성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에 3학년을 수료하였으며,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봉직하였다. 1913년 경충노회의 추천을 얻어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재학중 중국에 다년간 머문 적이 있어 졸업은 1923년에야 할 수 있었다(17). 졸업한 그해 경충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경충노회 순회목사가 되었으며 동시에 안성읍, 김양, 방축리, 아옥교회 당회장으로 시무하였다. 1924년 장로회 총회에서 경충노회가 경기, 충청 2개 노회로 분립할 것을 결의함에 따라 그해 1229일 안동교회에서 경기노회가 조직되었는데 이때 그가 초대 노회장에 선출되었다. 1926년경 경신학교 교목으로 부임하여 2년간 학생들의 신앙을 지도하였으며 1929년 다시 목회 일선으로 돌아와 서울의 용산교회의 담임목사로 봉직하면서 동시에 왕십리교회, 잠실교회, 동막교회(마포)도 담임하였다. 193812월 김익두 목사 후임으로 승동교회 제9대 목사로 전임하였다. 그는 이곳에 시무하는 동안 태화유치원을 설립하였으며 김대현 장로를 권면하여 조선신학교 설립자금을 기부하게 하였다. 그러나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일본 유학생 독립운동이 일경에 발각되어 주모자들이 체포될 때 이 사건에 연루되어 그도 체포되었고 1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징역 1, 집행유예 2년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사상범으로 감시를 받게 되자 194211월 승동교회를 사임하고 향리인 원삼면 문촌리로 내려 갔다. 그곳에서 815 해방을 맞아 용인군 자치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해방후의 혼란된 사회를 정돈하였으며 계속 용인군 원삼면장으로 선임되어 2년간 봉직하였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서울 YMCA 종교부 총무가 되었으며 미군정하의 경제대책위원회 위원으로도 활약하였다. 1950625사변이 나자 부산으로 피난하였으며 수복후 원삼으로 돌아와 원삼고등공민학교(현 원삼중학교)를 설립하여 불우한 청소년들을 모아 교육시켰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이 학교를 국가에 헌납, 공립중학교로 발전시켰다. 말년에는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1961129일에 문촌리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유족으로 양자 오진근이 있다.
  7. 파지(把持) - 물건을 꽉 움켜쥠
  8. 유재한(劉載漢, 1901~1963) - 장로교 목사. 경기도 출신. 1939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34)하였다. 경기도 김포군 양평교회 조사 및 장로를 거쳐 동막교회 장로로 시무했으며 19338월에 연동교회 흥신회의 초청으로 청년교역자로 부임하였다. 19341월부터 이 교회에서 장로이임식을 가졌다. 그리고 그해 가을부터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닦이 시작했으며 신학교 졸업후 목사안수를 받고 양평교회 등지에서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1961년 총회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1963425일 별세하였다. 그의 장녀 유정순은 연동교회 권사이고 그의 사위 진영득은 연동교회 장로로 시무하였다.
  9. 블록(bloc) - 정치나 경제상의 목적으로 형성된 국가나 단체의 집합
  10. 차사백(車士百, 1897~1990) -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 전필순 목사의 부인. 해주보통학교와 의정여학교, 이화학당 중등과를 졸업하였다. 31운동 당시 해주 의정여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만세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31운동 후 차사백은 일본에 유학(1921)하여 오사카에 있는 램버드여자학원 사범과를 졸업(1923)했으며 귀국 후 중앙교회 안에 설립된 중앙유치원 교사 및 중앙보육학원(중앙대학 전신) 교수로 봉직하였다. 그리고 서울 여자기독교청년회(YWCA) 2대 회장에 선출(1925)되기도 했으며, 근우회 창립부터 깊이 관여하였다. 근우회 해산(1929) 이후 여자기독교청년회 4대 회장,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 등으로 활약했고, 장로교 목사였던 전필순과 결혼한 후 남편의 목회를 도왔다. 해방 후 무학여고 교장,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 이사로 활약했으며 연동교회(예장 통합) 명예권사로 추대(1969)되었다.
  11. 알숭달숭 작고 분명한 점이나 무늬 따위가 촘촘하게 있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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