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1권] (97) 조선신학원 발족 - 김대현 장로님

김대현 장로님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나는 청년 때 승동교회에서 예수를 믿었고 거기 나갔고 그 교회 김영구 목사님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러니까 승동이 내 모교회다. 김대현 장로님은 승동교회 시무장로로서 우리 또래 학생반 주일학교를 가르치셨다. 노인이시라 세대차 어쩔 수 없었지만 시골 어른의 중후한 풍모는 인상적이었다. 경북 영일 출신으로서 자수성가하여 거부가 된 일도 있었지만 파산도 몇 번 겪었단다.

폐광된 금광을 염가로 얻어, 엉뚱하게 새 금맥을 발견, 당장에 또 거부가 되기도 했다.

그의 둘째 자제 영환은 내 막역한 친구였기에 내가 미국 갈 때 여권 수속에 필요한 재정보증도 김 장로님이 서 주셨다. 물론 서류상 형식이었지만 그래도 일단 유사시에는 재정적으로 책임추궁이 따르는 것이어서 결단을 요하는 일이었다.

나는 미국 유학에서 돌아오는 길에 종묘 담장 옆에 있는 장로님댁부터 먼저 찾아 인사드렸다. 그후 나는 평양 3, 간도 3년을 지내고 다시 그가 경영하는 사업에 봉사하려고 서울에 온 것이다. 그는 천식증이 심했다.

그는 재산을 정리했다. 아들 두 분과 맏아들, 전실 소생인 맏손자, 그리고 사모님과 장로님 자신, 이렇게 다섯으로 나누어 자기 몫은 몽땅 신학교 기금으로 헌금하신 것이다. 그것이 그때 돈 50만원 그 당시 미화시세로 25만 불이었다. 그러나 부동산이 대부분이어서 당장 필요한 10만원을 내놓으셨다. 그것이 우리 조선신학원 경상비가 되는 것이다. 맏아드님 영철장로가 재단 회계이였다.

조선신학교 설립운동이 태동할 무렵 한국교회 여론은 둘로 갈라져 있었다. 말하자면 선교사파(필자가 편의상 붙인 이름)와 조선교회파랄까.

전자는 선교사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신학교를 폐문하고 돌아갔으니 우리도 그 뒤를 따르자는 주장이었다. 평양신학교 재개 또는 서울에서의 새 신학교 설립 등등은 모두 선교사에 대한 배신행위요 우상숭배에 굴종하는 배교행위라는 것이었다. 유명한 부흥사 김익두 목사가 그 선봉이었다고 들었다.

조선교파?(이것도 필자가 붙인 가칭)란 것은 선교사 시대는 지났고 잘되든 못되든 조선교회는 조선사람 손으로 운영 추진 건설해야 한다는 분들이다. 물론 후자가 절대다수였다.

그러나 그 지도 이념에 있어서는 반드시 일치된 것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될수 있는대로 또는 거의 전적으로 선교사 전통을 답습하자는 대다수 서북교회 지도자들과 이남의 동조자들 그리고 다른 하나로는 이 시기에 일약 세계교회의 신학적 방향과 수준에로 도약하자는 서울 이남의 신진 엘리트그룹이었다. 그런 지도 이념 차이는 조선교회파자체 안에서도 현저히 구분되는 것이었다.

내가 김대현 장로님을 산장에 예방했을 때 장로는 꽤 많은 서한을 내놓으시며 답장해 달라고 하셨다.

그것은 거의 전부가 김 장로님의 새 신학교 설립을 공격하는 편지들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선교사에 대한 배신이며 조선교회의 순수한 신앙을 파괴하는 행위라는 공박이었다.

나는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무어라고 회답하랍니까?하고 물었다. 그는 묵묵히 계시다가 전도서 3:1 이하의 구절을 펴셨다. 천하만사가 기한이 있고 때가 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

그는 내게 재미있는 암시를 주신다고 느꼈다. 선교사 때와 지금의 때가 같지 않으니 때를 따라 헐기도 하고 새로 세우기도 해야 하나님의 새 경륜이 이루어질 것이 아니냐? 평양신학교를 헐어야 하겠고 조선신학교는 세워야 한다는 의 요청에 내가 응답한 것뿐이다. 이런 의미가 그분의 의도인 것으로 짐작되었다. 나는 알겠습니다하고 편지 회답들을 대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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