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6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101)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와 그의 “하야” - 계엄사령부와 민주당의 태도

계엄사령부와 민주당의 태도

 

송요찬 사령관은 이 사건에 공산당이 개입한 사실은 없다고 공표했다.

장면 부통령은 부통령직을 사임하면서 정, 부통령 재선거를 요망했다.

 

1960424

송요찬 사령관은 통금시간을 해제했다.

서울, 대구, 광주 등에서 정부 후원으로 419 희생자 합동위령제[1]를 거행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관제위령제 집어치워라 학생의 정기를 모독하지 말라!”고 일축해버렸다.

 

야당인 민주당에서는 1960325일에 315 선거의 부정성을 지적하고 무효를 선언했다. 국회 내 민주당 소속의원들도 315 선거의 무효를 선언하고 국련한국부흥위원단에 제소했다. 반독재민주수호연맹에서는 42일에 315선거의 부정불법성을 대법원에 제소했다. 동당에서는 대통령 후보로 장택상[2], 부통령 후보로 박기출[3]을 입후보자로 선정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입후보등록신청서를 제출했으나 이유 없이 접수가 거부됐다.

그래서 대법원에 제소한 것이었다.


[각주]

  1. 위령제(慰靈祭) - 죽은 사람의 혼령을 위로하는 뜻으로 지내는 제사
  2. 장택상(張澤相, 1893~1969) - 호는 창랑(滄浪). 경북 구미 출신으로 경상도 관찰사 장승원의 아들이다. 1913년 영국 에든버러에 입학했다가 중퇴하고 1921년에 귀국하였다. 광복을 맞아 수도경찰청장 등을 지내면서 좌익을 제압했다. 1946년경, 미군정이 좌우합작을 위해서 김규식을 지지하려고 했을 때 거절하였다. 1947년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김구를 체포하려고 했으나 하지 중장이 저지했다고 한다.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초대 외무부장관에 취임하였고, 1950년 고향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국회 부의장이 되었다. 1952년 국무총리가 되었고, 발췌개헌을 제안해 이승만 대통령의 직선제 개헌을 도왔다. 1958년 진보당 당수 조봉암이 간첩 혐의로 피소되었을 때 그의 탄원과 변호에 발벗고 나서기도 하였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박정희에 반대하는 진영에 합류하게 되었으며, 한일협정반대투쟁위원회에 참여하고 신민당 고문을 지냈다.
  3. 박기출(朴己出, 1909~1977) - 부산 출신. 동래고등보통학교를 나와 일본 히로시마의 고등공업학교를 마친 뒤 동경의학전문학교를 거쳐 1942년 구주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광복 후에 정치활동을 하면서 1956년 조봉암과 진보당을 결성하였다. 3대 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야당 후보 단일화를 위해 사퇴했다. 진보당사건에 연루되기도 하였고, 2공화국 때 입후보자 난동사건에 연루되어 1년간 실형을 받았다. 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신민당 공천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1년 국민당을 창당하고 출마하기로 했던 윤보선이 승산이 없음을 자각하고 불출마를 선언하자 국민당 관계자들로부터 출마 제의를 받고 대통령 후보로 나서기도 하였다. 이후 박정희 정권을 피해서 일본으로 망명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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