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6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107) 민주당 집권시대 – 장면 정권 9개월 - 장면 정권의 終焉(종언)

장면 정권의 終焉(종언)

 

결국에는 장면의 소재가 알려져서 군정청에 출두, 정식으로 정권 이양에 도장 찍었다.

815 해방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진짜 공정선거를 거쳐 민의를 대표한 정부는 장면정권이 처음이었으니만큼, 그것은 국민의 정부요, 장면 자신의 정부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반란 군인들이 아무리 협박한다 하더라도 장면으로서는 자기 맘대로 그 정권을 송두리째 반란자에게 내 줄 권한이 없는 것이었다.

역적 반도야 물러가라! 나는 3천만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나라의 주권을 역적에게 내어 줄 수 없다!” 한번 호통하고 죽었어야 할 것이 아니었겠느냐!

인간으로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숭고한 절개임에 틀림없겠지만, 우리 역사에서도 그런 분이 아주 없는 것이 아니었다.

고려말의 정몽주와 두문동 72[1]은 더 거론하지 않더라도, 세조 때의 사육신[2], ‘생육신[3]과 합방 때의 민충정공[4]을 비롯한 순국지사들, 31 운동 때의 백만으로 헤아리는 숱한 지사들, 그리고 당장 눈앞에서 자유 한국 제단에 관제물(灌祭物)처럼 부어 쏟은 청년 학생들의 피를 보더라도 장면은 책임을 다했다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때 무슨 일로던가 워싱턴에 들렀었다.

박정희 반란정권이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한 무렵이었다. 주한 미8군에서도 박정희 반란을 정당화하지 못하고 당황하던 때였다.

그 당시 워싱턴 교포사회는 산만하고 무조직한, 좋게 말해서 백가쟁명’(百家爭鳴)[5]의 시대였다. 일정한 여론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개인들 모인 데서 개인 자격으로 내 소견을 말할 밖에 없었다.

강연회 얘기도 있기는 했었지만 실현은 안됐다.

그때 내가 들은 대로는 미8군에서 토벌령을 내리도록 하명(下命)해 달라고 특사를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내왔었다 한다. 케네디를 만나 일체 서류를 내놓으면서 8군 사령관의 뜻을 전달했다.

케네디는 말했다. 이것은 8군 사령관이 할 일이 아니다. 한국 정부가 해야 한다.

행정부 최고 책임자인 장면은 숨어서 그 행방을 모릅니다.”

케네디는 이런 나라의 위기에 정부 책임자가 정부를 버리고 도망친 그런 정부를 내가 어떻게 도우란 말이냐?” 하고 서류를 동댕이치면서 노발대발했다 한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까십은 워싱턴 항간에 널리 퍼져 있었다.

8군에서는 윤보선 대통령에게 가서 토벌에 동의를 얻으려 했단다.

윤보선은 거부했다고 들었다.

내가 장면이 좋은 노릇을 해 줄 줄 아나?”

이런 까십도 워싱턴에까지 바람처럼 불어오고 있었다.

나는 민주당 정권 때에 주미대사로 있다가 군사정권에게 쫓겨난 장리욱[6] 전 주미대사를 찾아갔다. 한신졸업생 박원봉[7]이 나를 에스코트 했다.

그는 시외 멀고 치벽한 해변가 따님 집에 우거하고 있었다. 박원봉 군도 초행이라 반나절을 헤매다가 겨우 찾았다.

국군은 피로 나라를 지킨 애국자들인데 그들도 한번 정권을 잡아봐야 할 것 아니겠소?”

국군 고급 장교들은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지성인에 속할거요. 한번 나라를 잘해보겠다는데 구태여 막을 건 없잖겠소?……

나는 이어 없었다. 장리욱이 흥사단 국내책임자로 있었다는 것은 구태여 거론하지 않는다 치더라도 민주당 정권의 중직에 있던 분으로서는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후에사 들은 얘기지만 내가 찾아갔던 바로 그날 오전에 군부에서 일부러 특사를 보내 감언이설로 설득했다고들 했다.

나는 워싱턴에 다시 돌아왔다.

어디 코리아 데스크에나 들어가 볼까?” 하고 동지들과 의논했다.

최경록[8] 장군도 박 정권에 협력하기로 했고, 케네디도 쿠데타 정부를 상대하기로 했으니 가 봤자 행차 후 나팔일 것이오!”


[각주]

  1. 두문동 칠십이인 조선초에 조선 왕조를 거부하고 경기도 개풍군의 두문동에 들어가 나오지 아니한 고려의 충신 일흔 두 사람. 조선 왕조는 두문동을 포위하고 고려 충신 72인을 불살라 죽였다고 전해지고 있다(두문동실기).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그 말은 문을 닫아걸고 나오지 않는다는 고사성어로 중국의 <國語><史記>에도 등장하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특별한 역사와 연결되어 집단적인 거부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2. 사육신(死六臣) - 조선 세조 때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잡혀 죽은 여섯 명의 충신으로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3. 생육신(生六臣) - 조선시대,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버림으로 절개를 지킨 여섯 신하를 말함. 이맹전, 조여, 원호, 김시습, 성담수, 남효온을 이른다. (후세 사람들 중에는 남효온 대신 권절을 생육신에 포함하기도 한다).
  4. 민영환(閔泳煥, 1861~1905) -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자결. 시호는 충정(忠正).
  5. 백가쟁명(百家爭鳴) - 많은 학자들이 각기 자기의 주장을 펴고 논쟁하는 일
  6. 장리욱(張利郁, 1895~1983) - 장로교 장로, 교육가, 독립운동가. 1896629일 평남 안주에서 출생. 1912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하였고 미국에 유학, 1925년 아이오와주 듀북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27년 뉴욕 콜롬비아대학 대학원에서 듀이에게 교육학을 사사하였다. 1928년 귀국하여 선천 신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부임 즉시 지정학교 인가 신청을 총독부에 내 1931년 지정학교 인가를 획득하였다. 그리고 존 듀이의 교육철학인 인본주의 민주식 교육을 실시하여 많은 민족주의자들을 배출하였다. 1934년에는 선천북교회 장로로 장립되었다. 한편 그는 1917년 안창호의 흥사단단원이 되어 활동해 왔는데 귀국후에도 안창호와 가까이 지내면서 흥사단을 통한 민족운동에 전개하였다. 1936년에는 안창호의 권고로 일본에 건너가 모범농촌과 농공(農工)교육시설을 시찰하고 돌아와 한국에서의 이상촌 건설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6월 소위 수양동우회사건이 일어나 흥사단 지도급 인물들이 검거되었는데 이때 그도 학교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특히 신성학교강당 태극기사건 때문에 남보다 혹독한 고문을 받아야 했다. 그는 옥중에서 신성학교 교장직 사퇴서를 써야만 했고 1938년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2, 집행유예 3년 형을 선고받아 석방되었다. 이듬해(1939) 타의에 의해 평양으로 이주해 평양자동차공업주식회사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815 해방후 월남하여 그해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장에 취임하였고 1948년에는 서울대학 총장에 취임하였다. 한편 지하로 잠적했던 흥사단 재건운동을 벌여 1947년 국내위원부 위원장, 1948년 의사부장으로 흥사단을 재건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625사변 중인 1951년 일본 토오쿄오에 있는 유엔군 총사령관 고문으로 취임하였으며 1957년 흥사단 기관지인 <새벽>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1960년 주미 대한민국대사를 역임했고 이회에 조선전기공업학교설립자 겸 교장, 서울특별시교육위원회 회장, 국립서울대학교 이사장, 조선교육연합회 회장, 국회선거위원, 법전편찬위원, 흥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60년대 미국으로 이민하여 그곳에 거주하다가 1983년 별세하였다.
  7. 박원봉은 한신대학 1958년 제17회 졸업생이다.
  8. 최경록(崔慶祿, 1920~2002) - 충북 음성 출생. 1960419 혁명 당시 계엄사령관 송요찬의 발포 명령에 대하여 최경록은 발포를 중단하도록 만류하였다. 516 군사 쿠데타에 반대하다 사실상 강제 예편되어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으로 망명하여 반()박정희 활동을 펼쳤다. 1963321일에 미국 대통령 관저 앞에서 박정희 군정 연장 제안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서 군사정권에 협조하였다(1967년 주멕시코대사, 1974년 교통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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