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6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106) 민주당 집권시대 – 장면 정권 9개월 - “장면”이라는 인간

장면이라는 인간

 

나는 장면을 개인적으로 만난 일도 없고 물론 방문한 일도 없다. 그러나 공석에서는 그를 보기도 했고 그의 연설을 듣기도 했다.

미국의 타임지던가 뉴스위크지던가 난 것을 보면, ‘장면은 일국의 정치 최고 책임자라기보다는 어느 신학교 띤’(Dean)[1] 같다고 했다.

학생들은 자기네 덕분에 국무총리까지 됐으니 우리말을 들어야 한다고 오만하다.

하루는 총학장 회의가 소집됐다. 시민회관 대강당이었던 것 같다. 나도 소위 학장이래서 맨 뒷자리에 앉았다. 공사립 대학교 총장, 학장, 교무처장, 학생처장이 한 방에 가득 찼다. 꽤 오래 기다린 끝에 장면이 배우처럼, 은막 옆 연단 좁은 보도를 걸어 나타났다.

학생들이 면회 허락도 없이 마구 들어와 비서실도 거치지 않고 내 사무실에 들어닥친다. 들어와서는 내 책상 모새기에 덜렁 올라앉아 다리를 건들대면서 이래주소’, ‘저래주소하고 머슴에게 명령하듯 반말을 한다. 그러니 내 위신이 무엇 되겠소! 이제부터 총ㆍ학장은 자기 학생을 감독해서 그런 일은 없도록 훈련시켜 주시오!” 한다.

총ㆍ학장들은 학생들은 학교 당국에서 이르는 말 같은 것은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으니 감독관청인 문교당국에서 관권으로 억제해 주기를 바라오한다.

이렇게 서로 발뺌을 하다가 서로 협력하여 선도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우리 국무총리는 아닌 게 아니라, 무던히 얌전하시구나!’ 하고 나는 생각하며 일찌감치 나왔다.

그렇다고 장면이 모든 면에 무능하기만 했달 수는 없다.

그는 경제 5개년 계획을 세워 근대화 작업을 조속하게 진행시켰다. ‘장준하[2]국토기획원 원장이 됐다. 엄요섭[3]은 주일대사가 됐다. 일본과의 교류도 합리적으로 실시하려 했다. 동남아 지방 상대로 무역도 활발하게 티우려 했다. 민주체제도 확립시키려 했다. 그 심정은 갸륵할 정도로 진실했달까? 사실, 그는 신학교 학장만큼이나 종교적이었다.

그런데 그는 배짱이 약했달까? 단행력이 너무 느렸달까, 지나치게 신중했달까, 어쨌든, 419 혁명기질에는 안성맞춤이랄 수가 없었다. 자유당의 부정부패와 그 연루자에게 쾌도난마(快刀亂麻)[4]의 시원스러움을 보여주지 못한 채 아홉 달을 지냈다. 그는 가장 중요한 군부를 제대로 걸머쥐지[5] 못했다. 장도영[6]을 반쯤 쥐었다가 놓친 셈이랄까![7]

박정희는 자기들의 혁명정부가 한국 역사에서 정통을 계승한 것이요, ‘역적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장면에게서 정식으로 정권이양을 받으려 했다.

그런데 장면은 어느 수녀들 수도원엔가 숨어서 나오지 않았다.


[각주]

  1. Dean : 대성당 주임 사제, 지역 주임 사제, (대학의) 학과장
  2. 장준하(張俊河, 1918~1975) - 평북 삭주 출생. 아버지는 장로교 목사인 장석인이다. 일본 도요(東洋)대학 예과를 고쳐 도쿄의 니혼신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1944년 일본군 학도병에 강제 징집되었다. 중국 쓰저우 지구에 배속되었으나 6개월만에 탈출에 성공하여 김준엽의 도움으로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에 입대하였다. 이곳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잡지 등불을 발간했다. 1945년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이범석 휘하에 배속되었고, 미국 전략정보국이 주관하는 한미합작특별군사훈련을 받았다. 광복이 되자 김구의 비서로 조국에 돌아왔다. 이후 학업을 마치기 위해 한국신학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한국전쟁 말기인 1953사상계를 창간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 들어선 박정희 정부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하였으며, 1975년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본부의 이름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1975817일 경기도 포천군에 있는 약사봉에서 등산하다가 의문의 사고로 사망하였다. 2012년 묘지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두개골 함몰 흔적이 발견되어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1962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막사이사이상(언론부문상)을 수상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1999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3. 엄요섭(嚴堯燮, 1916~1999) - 함경남도 문천군에서 태어났다. 연희전문학교 문과 2년을 수료하였고, 신사참배 문제로 자퇴하였다. 이후 일본 관서학원대학 신학부를 졸업하고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58년 한길교회 목사, 1960년 주일 대표부 공사, 1963년 에디오피아 초대 대사를 역임하였고, 1970년 대한일보 논설위원을 지냈다.
  4. 쾌도난마(快刀亂麻) - 잘 드는 칼로 헝클러진 삼 가닥을 자른다는 뜻으로, 어지럽게 뒤섞인 일을 명쾌하게 처리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5. 걸머쥐다 등이나 어깨 따위에 걸치어 움켜잡다
  6. 장도영(張都暎, 1923~2012) - 평북 용천 출생.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요대학교를 1944년에 졸업했다. 194511월 신의주 반공 학생 의거가 발생하여 반공인사 탄압이 강행되자 월남하였다. 해방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여 육군 참위로 임관했다. 1948년 여순 사건이 일어나 박정희가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을 때 백선엽 등에 의해 박정희 구명운동이 있자 호응하였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에 용문산 전투에서 중공군을 막아냈다. 516 군사정변 이전에 장면 국무총리에 의해 발탁되어 육군참모총장으로 재직했다. 군사정변이 성공하자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계엄사령관 등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박정희의 중앙정보부에 의해 반혁명혐의로 기소되었다(이때 장도영을 체포 연행한 대위가 노태우였다). 19633월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5월 형집행면제로 풀려났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1969년부터 1993년까지 위스콘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7. 장면의 회고록을 보면, 196159일에 장면이 장도영을 불러 박정희 소장을 주동으로 한 일부 군인들의 쿠데타 모의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물었으나 장도영은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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