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5일 금요일

[범용기 제2권] (12) 해방 직전 “일제”의 발악상 - “법망을 뚫고”

법망을 뚫고

 

나는 학생도 선생도 없는 빈 방에 혼자 앉아 있다. 학생모집도 안했다.

그런데 입학지원자가 연방[1] 찾아온다.

나는 그들을 받아들였다. 교회당 작은 창고방을 치우고 거기서 강의했다.

청강생이 거의 20명 되었다. 그즈음 울릉도에서 선교 겸 의료사업에 헌신한 이일선[2]도 그때 들어온 청년 중 하나다. 유호준[3] 목사가 강사로 성의껏 협력했다.

 

하루는 총독부에서 형사 둘이 직접 나왔다. 서대문서 형사도 나왔다.

당신이 법망을 뚫고 당신 고집대로 말성[4]을 부릴 작정이오?”

신학 전공한 목사가 신학을 강의하고 기독교인이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당연한 의무가 아니겠소? 대 일본제국 헌법에도 종교와 신앙의 자유는 보장돼 있지 않소? 그걸 못하게 하는 당국이 도리어 법망을 뚫는 것이 아닐까 싶어지오!”

신학을 논평한다든지, 예수 믿는 것을 하지 말란 말이 아니라, 무허가로 학원을 계속 경영하고 허가 없는 학원이 제멋대로 신입생을 모집하고 하는 것이 법망을 뚫는 행동이란 말이오.”

허긴 그런 말 듣게도 된 것이었다.

학원인가는 매해 다시 얻어야 하는 법인데 인가신청은 냈지만 아직 인가는 받지 못한 때였다. 구약 교본이란 것도 무시하고 구약 강의를 강화한 것도 법대로 된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법망을 뚫고 음흉스레[5] 범법행위를 했다면 감독당국에서 학생을 내쫓고 신학원 문을 인봉하고 잡아가면 될 것 아니오? 나는 내 손으로 내게 배우려는 학생을 내쫓고 학원 문을 닫을 생각은 없소!”

 

다시 봅시다하고 그들은 갔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무지하게 굴지는 않았다.

 

오랜 후일에사 학원인가가 나왔다. 그러나 조건부였다. 다시는 인가 안할 방침이니 이것으로 마감인줄 알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해방 일 년 전 일이다.


[각주]

  1. 연방(連方) - 잇따라 자꾸
  2. 이일선(李一善, 1922~1995) - 1945년 약수동 신일교회를 개척하였다(신일교회는 1954년 교단 분열 당시에 어느 쪽으로도 가담을 거부해 무소속교회로 이어지다가 1981년 예수교장로회 통합교단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신학교를 졸업(1949)하고 의료선교를 위해 서울대 의대에 진학해 피부과 전문의가 되었으며(이 당시에 아프리카의 슈바이처를 직접 방문하기도 하였다), 1961년 교인 천여명에 달하는 신일교회를 사임하고 울릉도로 건너가 의료선교를 하였다. 이일선 목사가 신학교 졸업반 시절 이상촌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했는데, 거기에 김재준 목사가 추천사를 써 주었고, 이것을 문제삼으면서 이노수(李魯秀) 장로 등이 신앙동지회를 결성하여 조선신학교 문제를 총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3. 유호준(兪虎濬, 1915~2003) - 경기도 양평 출생. 휘문고등보통학교(현 휘문고교)를 졸업하고 도일하여 미국 남장로교 훌톤 선교사가 설립한 고베(神戶) 중앙신학교에서 예과 2년 본과 3년 과정을 이수하고 1941년에 졸업을 하였다. 용산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다가 경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용산교회 위임목사가 되어 평생 한 교회에서 목회하였다. 1952년 총회가 경기노회에 김재준 목사의 면직을 결의하자 경기노회는 513일 전필순, 유호준 목사를 중심으로 총회의 결의에 불복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예장 통합 제58회 총회장(1973), 기독교방송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4. 말썽’(어떤 일이나 행동으로부터 불거지는 달갑지 않은 시비)의 오기인 듯
  5. 음흉스레 마음이 엉큼하고 흉학한 데가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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