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6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132)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1969 -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1969

박정희는 집권 10년인데 다시 출마하기 위해 헌법을 고치자고 발표했다. 그가 취임식 때 손 얹고 국민 앞에 서약한 헌법은 2선 이상 못하도록 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반대는 이름 그대로 범국민적이었다.

그래서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1]란 것이 결성되었다. 이것은 대통령 자신이 헌법 위에 있어서 헌법을 그의 비위[2]에 맞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독재선언인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 사활(死活)의 기로가 바로 이 시점이라고 느꼈다.

나는 집에 앉아 지냈다. 하루는 김상돈이 자기 농장용 반트럭을 끌고 와서 나더러 타라고 한다. “왜 그러느냐?” 해도 시원한 대답도 없이 두말 말고 어서 타라고만 한다. 거대한 체구에 카이젤수염을 거슬려 뻗치구서 우격다짐이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탔다. 종로회관이었던가에 내려 안에 들어가니 그야말로 입초[3]의 여지없는 빼꾹[4]이다.[5]

신문기자 수십 명이 카메라를 들고 주위 벽에 기대 서 있다. 유진산[6] 사회로 무슨 규약이 거의 통과되는 무렵이었다. 나는 비좁은 뒤 출입구 옆에 서 있었다.

규약이 통과되고 그 규약에 의하여 의장 한 사람을 천거한다고 했다. 장준하, 윤길중, 이철승, 송원영[7] 등등 다섯 사람이 전권 공천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들은 즉석에서 내 이름을 내 놓는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나는 정치에 대해서는 짜도 모르는 사람이니 그런 소리 마시라고 두 번 세 번 거절했다.

그러나 막무가내였다.

이건 민족의 지상명령이니 두말 말고 복종하시오!” 하고 김상돈은 뒤에서 소리지르며 일장 연설을 한다.

이건 준비위원회니만큼 한 달 후에 열릴 정식 발기인회를 위한 준비 작업에 불과하다고 하며 내 승낙을 강청[8]한다.

정 그렇다면 한 달 준비 기간만이라는 조건 아래서 승낙합니다했다.

유진산 씨가 내게 사회를 양보하길래 얼마 안 남았으니 그대로 진행시키라고 그에게 맡겼다.


[각주]

  1.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三選改憲反對汎國民鬪爭委員會)19693선개헌을 반대하기 위해 신민당과 정치활동정화법 해금인사와 재야인사가 규합하여 1969717일 발기한 정치단체이다.
  2. 비위 일이나 사물에 대하여 무엇을 하고 싶은 기분이나 생각
  3. 입초 - ‘입추’(立錐)의 오기인 듯
  4. 빼꾹 - ‘빼꼭’(사람이나 물건 따위가 조금 좁은 공간에 가득가득 들어차 있어서 빈틈이 없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의 오기인 듯
  5. 동아일보 196965일자 기사 - 新民黨(신민당)政淨法解禁人士(정정법해금인사) 在野各界人士(재야각개인사)들은 五日(오일) 서울YMCA 소강당에서 三選改憲反對汎國民鬪爭委員會(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준비위원회를 열고 이달 下旬(하순) 三選改憲反對汎國民鬪爭委員會(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 전국적인 改憲反對(개헌반대) 투쟁태세를 갖추기로 했다. 同準備爲(동준비위)委員長(위원장)金在俊(김재준) 씨를 선출했으며 總務(총무) 宣傳(선전) 組織(조직) ()分科委員會(분과위원회)를 두기로 했다.
  6. 유진산(柳珍山, 1905~1974) - 본명은 영필(永弼), 필명은 진산. 호는 옥계(玉溪).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 때 교내 항일벽보사건으로 자퇴하고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옮겨 123년에 졸업하였다. 1926년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영어를 수학한 뒤 정경학부에 입학하였다가 독서회사건으로 이치타니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32년 귀국하여 농민운동을 펴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임시정부 연락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4년 서대문형무소에서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35년부터 필명을 진산이라고 하고 농민운동을 펼쳤다. 광복 이후 우익청년단체인 흥국사를 조직하여 우익활동을 하였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화에 항거하였으며, 야당활동을 하였다. 419혁명 이후 구파 중심의 신민당을 창당하였다. 민정당(1963) 민중당(1965)을 거쳐, 1967년 야당통합을 이룬 신민당 부총재가 되었고, 1970년 신민당 총재가 되었다. 1971년 자신이 전국구 1번을 결정한 진산파동으로 총재직을 사임하였다가 다시 당권에 도전하여 1972년에는 불법전당대회 당선으로 당권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1973년 전당대회에서 다시 당수로 당선되었다. 1974년 유신헌법개헌투쟁을 선언하고 나섰으나 결장암으로 사망하였다.
  7. 송원영(宋元英, 1928~1995) - 평남 용강 출신. 서울의 양정고등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광복을 맞아 신탁통치 반대 및 반공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 1952년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1954년 경향신문사 기자로 활동하였다. 2공화국의 장면 정권이 출범하면서 장면 국무총리의 공보 비서관이 되었다. 1963년 정치활동이 허용되면서 창당된 국민의당 대변인, 1967년 통합야당 신민당의 대변인이 되었다. 1980년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가 1985년 해금되어 신한민주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12). 1987년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대통령 후보 선정 문제로 김영삼계의 잔류파와 김대중계의 탈당파로 분당될 때 잔류파로 남았다. 1988년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박정희가 재조명되자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5.16 군사정변 세력은) 민주당 정부의 밥상에 숟가락을 들고 가로채 앉은 세력이라며 비판하였다.
  8. 강청(强請) - 무리하게 억지로 요청함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