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6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135) 잠시 “런던” 가 바람쐬고 다시 투위에 - 잠시 영국 런던 YMCA 세계대회에

잠시 영국 런던 YMCA 세계대회에

 

청와대에서는 대한일보 김연준 사장에게 내 문제로 압력이 오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동안 신문사에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는 김연준 사장이 자기 차를 보내왔다. 사장실에 들리니 여전히 반가워한다.

김연준 사장은 그동안에 청와대의 압력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당신 신문사 논설위원이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장이라는데 사장으로서 무슨 조처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논설위원회를 수삼차 열어 대책을 의논해 봤노라고 한다.

논설위원들은 말했단다.

그분이 이제부터는 신문사와 관계없게 됐습니다하면 간단하지 않느냐고.

김 사장은 그런 것쯤 몰라서 내가 논설위원회를 두세 번 열었겠소? 그이를 논설위원으로 모시면서 청와대의 압력을 피할 도리가 없겠나 해서 의논하는 것이 아니겠소?” 했단다.

그때 마침 런던에서 열리는 YMCA세계대회에서 김은우 논설위원이 한국 Y대표로 가게 됐는데 여비는 자담이라고 말했다. 자기가 얼마동안 신문사를 결석한다는 신고쪼로 불쑥 그 말을 낸 것이다.

김 사장은 무릎을 치면서 됐소!” 했다.

김 박사님도 Y대표로 해서 당신이 모시고 가시오. 김 목사님이 Y세계대회에 가신다는 것이 명분에 어긋날 일도 아니니 얼마나 좋소!” 했단다.

사흘 후에 떠나야 하는데 여권 수속도 안 했고 여비도 없지 않습니까?”하고 김은우는 반문했다.

김 목사님을 가시라면서 내가 여비도 안 드리겠소? 여권은 신문사 특파원이라면 즉석에서 얻을 수 있소하고 사장은 끊어 말한다.

우선 잠시라도 김 목사님이 여기 안계시다면 나는 샌드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겠으니 됐단 말이오.”

 

그래서 나의 런던행은 급전직하[1]로 진행됐다.

 

나는 김 사장에게 말했다.

내가 명색이 위원장이니까 중앙집행위원회에 양해를 얻은 다음에 확답하겠소.” 나는 곧 3선개헌반대위원회 사무실에 가서 중앙집행위원들을 불렀다. 거의 전원이 참석했다.

나는 런던서 열리는 YMCA 세계 대회에 한국 대표로 가게 됐는데 약 2주일간 떠나 있어도 무방하겠소?”

그들은 즉석에서 대답했다.

염려 말고 다녀오십시오. 저희가 다 알아서 일하겠습니다.”

장준하는 내 제자니만큼 조용히 만나서 물어봤다.

그 동안에 선생님 이름으로 나가야 할 문서는 제가 초안하고 제가 발송하겠습니다. 안심하십시오한다.

 

그래서 김 사장에게, “간다고 통고했다.

아닌 게 아니라 수속은 일사천리로 됐고 여비는 내 것만이 아니라, 김은우 것도 김 사장이 댄다고 했다. 그래서 런던에를 간 것이다.

 

런던에서 현시학[2] 영사와 강원용 목사를 만났다. 강원용은 옥스포든가에서 열리는 W.C.C. 실행위원회 때문에 와 있었고 현시학은 런던주재 한국영사관 영사로 재임 중이었다.

 

런던에서 꼬마기차를 타고 시골 어느 대학 캠퍼스에로 갔다. 거기가 Y대회장이란다. 방학 중이라, 학생 기숙사에서 유숙할 수 있었다.

며칠 동안 회의에 참석했다.

세계대회 치고서 그렇게 김빠진 모임은 처음이었다. 정치 관계는 일체 말하지 말라. 정부 비판도 허락치 않는다. YMCA ‘안살림만을 의논한다는 것이었다.

원래 YMCA 자체가 과거의 유물인데다가 참신한 시대요청을 Shut out 했으니 비전이 생길 게 무어냐? 하는 인상이었다.

성서연구 시간에는 어드맨식 성서주해를 쓴 William Berkeley가 인도했다. 꽤 노인이었는데 내게는 아무 인상도 남지 않았다. 홍현설[3] 박사는 퍽 감격스럽다고 했지만.

 

회의가 끝나고서 부근의 명승 고적을 탐방한다. 나는 콘벤토리 사원행에 끼었다. 국보적인 사원이지만, 2차 전쟁 때 히틀러의 폭탄에 무너지다가 조금 남아 있었다. 독일 청년들이 봉사대로 와서 한 부분을 복구했다고 한다. 간 데마다 중세기적인 유산이 묘비처럼 남아 있다.

그 교회 목사관에 한국 가 있던 성공회 데일리주교가 거주한다기에 문을 두들겨 봤지만 멀리 외출중이라 했다.


[각주]

  1. 급전직하(急轉直下) - 사태나 형세가 갑자기 바뀌어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진행됨
  2. 현시학(玄時學, 1924~1989) - 함경탐도 함흥 출생. 어머니는 독립운동가 겸 교육자 대한애국부인회 등에 참여한 신애균(申愛均)이다. 민중신학자 현영학이 그의 형이다. 함남 영생중학교를 졸업하고 광복이 되어 대한민국 해군 창설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1966년 해군소장으로 예편한 후, 모로코, 이란, 맥시코 대사직을 수행하였다.
  3. 홍현설(洪顯卨, 1911~1990) - 호는 청암(靑岩). 평양 출생. 장로교 계통의 숭덕학교를 거처 1929년 감리교계 학교인 광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33년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1935년 칸사이학원 신학부를 졸업하였다. 1년간 도시샤 대학 신학부에서 연구한 후 1936년 귀국, 1939년 서부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42년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부임했으나, 혁신교단의 노선과 갈등을 일으켜 교수직과 목사직을 박탈당했고, 광복과 더불어 목사직이 회복되면서 평양중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월남한 뒤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였으나, 1948년 미국에 유학하여 드류대학,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53년 감리교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57기독교사상창간에 위원장으로 참여하였으며, 1965년 한국기독교연합회(NCCK의 전신) 회장, 크리스찬아카데미 이사장(1966-1970), 한국 YMCA전국연맹 이사장(1967-1970)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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