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6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134)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1969 - 투쟁위 발기인 대회와 조직체 구성

투쟁위 발기인 대회와 조직체 구성

 

한 달 후에 서울에서 발기인회가 모였다. 대성빌딩에서였다고 생각된다. 대만원이었다.[1]

장준하 사회로 내가 개회사, 함석헌 연설 - 규약통과 임원선거 등등 일사천리 한 시간 안에 모두 마쳤다.

내가 또 위원장으로 됐다. 박정희 앞에서의 적전상륙인데 사퇴운운하는 약점은 금물이라 생각되어 두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딴 고장에서 실행부가 모일 때에 사퇴하고 퇴장까지 했지만, 그러면 다 헤지고 다시 모이지도 못한다기에 그게 실상인 것 같기도 해서 다시 들어가 계속했다.

 

실행부에서는 이미 준비된 대로 부서별 인선, 중앙집행위원 명단 등등이 통과되고 그 선정된 부서에서 조직, 사업프로 등등이 의결되어 의젓한 조직체가 됐다.

 

왜 내 이름이 반드시 필요했을까?

이것은 단일 야당인 신민당을 위시하여 여러 군소정당(群小政黨)들이 자진 가담했을 뿐 아니라, 박 정권에서 제외된 몇 고급 군인, 재야 정치인, 학자 등등의 일관된 모임이니만큼 어느 정당인이나 정치인을 수반으로 한다면 다른 정당 정치인의 면목이 서지 않는다는 숨은 이유도 있었을지 모른다.

특히 단일 야당인 신민당에서 선출한다면 유진산 씨를 밀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럴 경우에는 조직 이전에 해산될 우려가 농후하다는 말들도 있었다.

위원장은 사회적으로 네임 벨류명망이 있는 사람이라야 한다.

그러면서도 자유민주주의에 관심이 깊고 그 방면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야 한다는 것.

그러나 그 자신은 정권에 대한 야심이나 정권획득을 위한 그 자신의 정치단체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야 한다.

 

그런 각도에서 내 이름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이건 나 자신의 부정적인 억측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의 사회생활이란 이용당하면서 이용하는 양면이 함께 있다는 것을 벗어날 도리가 없는 것이고,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의 인테그리티[2]를 지킬 줄만 알면 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장준하는 내 제자랄 수도 있고 김상돈은 내 오랜 친구니만큼 그들이 나를 이용하려는 의도에서 수단으로 썼다고 단정하긴 어렵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그들의 말대로 내 이름이 어떤 응결력(凝結力)이 된다면 그것도 봉사가 될 것 같아서 자신 없는 감투지만 민주질서에 따라 결정된 대로 써본 것이다.

 

나는 그동안 정치인들과의 접촉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정치인들은 그 본직이 나라를 걱정한다는 것이니만큼 선이 굵다. 화제가 주로 나라 경륜을 축으로 교환된다.

어떤 문제를 중심으로 격론이 벌어졌다가도 어느 방향으로 결정된 다음에는 담담하게 웃고 농담으로 씻어버린다.

권력 쟁취를 위해서는 당내 권력이나 국가 권력이나를 막론하고 비상하게 민감하다는 것.

그러나 자기 본심을 좀처럼 노출시키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누구에게나 엉뚱한 뱃장[3]이 숨어 있다는 것 등등이 지적될 수 있을 것 같다.

 

유진산 씨는 고문의 한 사람으로 추대돼 있었기에 실무진 모임에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발기인 명단을 최종 결정할 때에는 일찌감치 나와 회의실 저쪽 구석에 혼자 앉아 있었다.

이철승이 발기인 50여명의 이름을 발표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서울을 중심한 야당인사들이었다. 유진산 씨는 거기에 백기완[4]의 이름이 들어있다고 해서 분노했다. 그리고 범국민운동이라는데 지방 인사들은 거의 발기인에 들지 못한 이유가 무어냐고 따진다.

연설이 유창했다.

내가 사회하고 있었는데 유진산 씨 발언이 장장 30분을 넘게 되니 회원들로부터 언론을 중지시키고 속히 결정하자는 쪽지가 들어온다. 아마도 지금까지 머리 한번 내밀지 않던 사람이 막판에 와서 무슨 잔소리냐 하는 생각들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실컷 말하게 했다.’ 너무 지루했었는지 스스로 그쳤다.

우리는 이철승 씨 제안으로 지방 인사 50명을 새로 넣기로 하고 그 명단을 호선[5]했다.

유진산 씨 제언대로 된 것이다.

유진산 씨는 탁월한 정치 역량과 능한 정략의 소유자인 것으로 보였다. “정치는 현실이다하는 그의 지론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지조가 의심받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평생 야당으로 일관했다는 데는 경의를 표해 무방할 것이 아닌가?


[각주]

  1. 1969717일 동아일보 기사 - 三選改憲反對(삼선개헌반대) 汎國民鬪爭委員會(범국민투쟁위원회)十七日(십칠일) 서울대성빌딩에서 發起人大會(발기인대회)를 열고 三選改憲沮止(삼선개헌저지)를 위해 最大(최대)行動力(행동력)을 발휘할 것을 다짐했다. 大會(대회)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憲法改正(헌법개정)은 합법적인 절차로 憲法(헌법)을 고치겠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長期執權(장기집권)을 위한 方便(방편)으로 國家(국가)基本法(기본법)인 헌법을 고치겠다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고 國民(국민)의 진지한 忠告(충고)를 거부하고 三選改憲(삼선개헌)을 강행하는 경우에는 國論(국론)이 분열되고 경제는 파탄되고 社會(사회)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은 明白(명백)하다고 지적, 그것을 포기하도록 조치할 것을 촉구했다
  2. Integrity : 진실성, 도덕성, 위상, 고결함, 온전함. (영어 원서에서는 리더십 분야의 전문가들이 리더십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규정하는 단어이다)
  3. 뱃장 - ‘배짱의 오기인 듯
  4. 백기완(白基琓, 1932-) - 황해도 은률군 출생. 1946년 황해도 일도초등학교를 졸업했으며 해방 이후 월남했다. 정규교육과정은 거치지 않았지만 독학으로 공부했다. 1964년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참여했고, 1967년 백범사상연구소를 설립하고 민주화운동에도 뛰어들었다. 1973년 유신헌법 개정 청원 운동을 펼치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 1975년에는 양일동, 김동길과 장준하 장례식을 주관하고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중후보로 출마하여 김영삼, 김대중의 후보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하였다. 정치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통일운동과 진보적 노동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5. 호선(互選) - 어떤 특정한 범위 안의 사람들끼리 투표하여 그 구성원 중에서 어떤 사람을 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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