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5일 금요일

[범용기 제2권] (17)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희비쌍곡선을 팠다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희비쌍곡선을 팠다

 

해방은 희ㆍ비의 쌍곡선을 우리 민족 전체의 심장에 그려 넣었다.

단군, 기자, 위만 등의 조선은 당분간 제쳐놓고, 신라통일시대부터 치더라도 통일조선의 역사가 1300여년이 된다.

‘3국 시대라 해도 같은 부여족이 지방을 나놔[1] 나라를 호칭한 것뿐이었고 엄격한 의미에서 현대식 독립국가들이라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말하자면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와 비슷하달까. 516[2]이 분립돼 있었으나 제후’(諸侯)의 명분을 탈피하지 못한 것이라든지, 일본의 성주(大名 - 다이묘오)들이 자기 지방에서 분봉왕 같이 지냈으나 막부[3]의 산하에 있었고 막부는 황실의 그늘 아래서 통일일본의 권좌를 지켜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겠다.

그러다가 신라가 통일조선을 세웠고 고려이조가 이를 이어 받았다. 이제는 온전히 인테그레잇되어서 어느 누구도 한반도 단일 민족 국가라는 나라격’(Nationship)위이감을 품는 사람이 없다.

사회, 문화, 교육, 종교, 생활양식, 일용품, 관습, 습성 등등에서도 이국적인 아무 인상도 남기지 않는다.

이것이 한두 해 얘기가 아니라, 1300여년을 그렇게 지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새 단어나 발굴한 것처럼 통일한국또는 통일조선신발명 전매특허품인양 가두판매점을 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쑥스러워진다.

 

1945815일 해방이 방송된 때, 우리는 열광했다.

해방이 됐다면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과 이천만 우리 민족 전체가 같은 조건 아래서 꼭 같이 해방된 것으로 알았다. 그건 너무나 당연하니만큼 그 밖에 다른 무엇을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그건 지상명령이고 숨어 흐르던 민족생명의 분출(噴出)이고, 천륜(天倫)과 인륜(人倫)의 당연지사(当然之事)[4]라고 생각했다.

시내는 환호의 인간 해일(海溢)이 인간 격랑(激浪)으로 뒤집혀 만세의 산울림이 인간들 귀에 폭풍을 몰아넣는다. 일인들은 토굴 속의 두더쥐가 되어 떨고 있었다. 우리의 환희 속에, 갈라진 고국이란, 상상의 변두리 어느 한구석에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로서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38선이, 미국과 소련이란 두 강대국에 의하여 그어졌다. 그리고 동족이 서로 미워하고 총부리를 맞대고 투계(鬪鷄)처럼 눈총을 겨누게 했다.

 

다시 통일돼야 한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아무렇게나 통일되어서는 안 되겠고, 아무렇게나 통일될 수도 없다. 세계적인 역사의 태풍속에서 찢어졌으니 통일도 세계적인 태풍을 겪어야 실현될 것이다. 그런 경우에 정치에 소질 없는 범용자(凡庸子)로서도 그 역사의 태풍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알든 모르든, 좋든 궂든[9], 같이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당한 얘기를 적는 것뿐이다.

 

해방 직후 이북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몇 만 명 단위로 남하했다. “이남에는 자유가 있다하는 것이 남하한 이유였다.

목사들은 각지에 흩어진 이북 피난 교인들을 핵맴버로 교회를 시작한다. 모두 선교사들 주체로 한 평양신학교 출신이었고, 따라서 신학적으로는 전투적 근본주의자(Ultra-Fundamentalist)들이었다. 예외가 아주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선교사 숭배자, 또는 추종자가 거의 전부였다. 거기에는 비신학적인 세속적 지방감정, 권력욕, 생활방편 등등의 요소도 섞여 있다. 그들은 그들 중심의 세력권을 형성했고 박형룡[10]의 남하를 계기로 남산신궁[11] 터에 평양신학교모형을 이식했다.

그리고 조선신학교에 도전한다.

노골적인 교권쟁탈전이 벌어진다.

해방 직후에 돌아온 미국선교사들을 자기들 편에 넣었다.

조선신학교 교수진에서 한경직[12]을 분리시켜 자기들 편에 서게 한다.

평양신학교 동문인 이남 목사들을 흡수한다.

조선신학교에서 김재준을 몰아내고 그 신학교를 점거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남의 장로교 총회에 정회원으로 가입돼야 한다. 그리고 총회원의 절대다수를 차지해야 한다 등등.

 

일제시대에는 황ㆍ평양도가 3분지 2의 교인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총회 총대 수도 그런 비례였기 때문에 교권은 언제나 그들 손에 쥐여 있었다. 지금은 그들이 위임맡아 목회하던 이북 교회를 버리고 이남이 피난했다. 그러나 전에 이북에서 갖고 있던 총회원 수는 이남 총회에서 그대로 인정하게 해야 한다. 그리하면 정회원석의 절대다수를 점거할 수가 있다.

 

조선신학교 측에서도 그런 음모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총회 총대 명단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남 노회들 안에도 노회원의 성분이 두 종류로 갈라져 있었다. 우리는 성분별로 노회 대표 수를 집계해 본다. 비슷비슷하지만 우리 켠이 5, 6명 더 했다. 총회 장소는 대구였다.

 

총회 직전에 대구의 원로 목사들은 노회 주최의 신학강좌를 마련하고 김재준을 강사로 초청했다.

나는 대구로 갔다. 청강자는 10여 명의 원로 목사들뿐이었다. 밤 시간에는 시국강연, 세계교회의 신학 사조와 신학의 방향 등을 주제로 강연했다.

고장은 대구제일교회[13]였다.

나는 신학강좌에서 신학의 Fundamental[14]한 것만을 강의했기 때문에 걸릴 것이 없었다. 원로 목사들은 안심했고 인간적으로 가까워졌다. 밤 집회에는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천 명이 앉는다는 교회당이 배꾹 찬다.

이렇게 사흘을 지냈다. 장로들은 집회 후에 법주사[15]나 어디 가서 한 주일쯤 쉬고 가라고 진심으로 권한다. 그럴 생각도 노상 없지 않았다.

 

모두들 헤어질 때 나는 현관에서 인사를 교환하는 중이었다.

 

학교에 비상사가 생겼으니 곧 오라는 전보가 수교[16]된다. ‘만우가 보낸 것이다. 나는 그날 밤차로 학교에 돌아왔다.

 

그 동안에 학생들이 소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해방 직후 신학교라고는 조선신학밖에 없었다. 남산의 박형룡 신학교도 아직 없을 때였다.

평양신학교, 봉천신학교, 일본신학교, 북경이나 남경신학교 등등에 재학 중이던 신학생들이 모두 우리 신학교에 등록했다. 학생이 3백여 명으로 불었다.

나는 구약개론과 조직신학을 강의했다. 모세5경도 역사비판적으로 해석했고, 창세기도 문서설을 그대로 소개했다. 학생들은 열심으로 필기한다. 나는 학생들의 청강하는 태도에 감심[17]했다.

 

그런데 총회날짜가 가까워오자, 학생들은 자기들이 신임하는 피난목사에게 그 강의 노트를 제시하며, 이것이 소위 신신학이란 것이 아니냐고 문의했다. ‘성경문자무오설을 비판 없이 받아들인 목사들은 큰일 났다고 설레었다 한다.

 

이 학생들의 연서[18]로 한신학우회 소집을, 그 당시 회장인 문익환[19]에게 제청[20]했다. 학우회가 모였다. 그들은 김재준 교수 배척결의문을 통과시키려 했다. 그러나 여지없이 부결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대구 총회에 직접 호소하기로 하고 노트를 인용하면서 고소문을 작성하여 총회원들에게 배부할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이에 당황한 송창근[21] 학장은 그래서 지급 전보[22]로 나를 불러 올린 것이었다.

나는 대수롭잖게 느껴졌다. ‘신학인데 비판 없이 성립되는 이 어디 있느냐? 하고 일소에 붙였다.

 

총회에는 신학교장이 ex-officio[23]로 출석해야 한다. 교회를 위한 교직자 양성의 책임을 맡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총회에 학교의 상황과 사업을 보고해야 한다. 그래서 학장은 대구에 갔다.

학생들은 학장을 빼놓고 직접 총회원에게 접촉했다.

총회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총회로서의 김재준 심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일종의 종교재판소, 다시 말해서 인큐지션[24]이다.

 

그런 경우에 교장인 만우로부터 한마디 항의도 없었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들이 우리 신학교 학생이니만큼 심사하든 처벌하든 내가 책임지고 재량껏 할 것이고 총회에서 직접 개입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고 항변해야 할 것이었다는 말이다.

 

나는 동자동에 그대로 있었다. 각 지방에서 나를 옹호하고 총회 처사에 항의하는 운동이 벌어졌다. 총회로서의 내게 대한 심사도 지연됐다.


[한국신학대학 부학장 시절]


[각주]

  1. 나놔다 - ‘나누다의 방언. 제주 지역에서는 ᄂᆞ놔다로도 적는다
  2. AD 304~439년 중국 북부에서 진나라 말엽부터 남북조시대까지 흥망했던 5호 및 한족이 세운 왕조의 총칭 또는 그 시대.
  3. 막부(幕府) - 1192~1868년에 실질적으로 일본을 통치한 세습적 군사 독재자인 쇼군의 정부
  4. () - ()의 간제자, 속자
  5. 해일(海溢) - 바닷물이 갑자기 크게 일어나 육지로 넘쳐 들어옴
  6. 격랑(激浪) - 매우 높고 거센 파도
  7. 두더쥐 - ‘두더지의 방언
  8. 투계(鬪鷄) - 닭끼리 싸우게 하여 승부를 겨룸
  9. 궂다 좋지 않고 험하다
  10. 박형룡(朴亨龍, 1897~1978) - 해방 이후 고려신학교 교장, 총회신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목사. 평안북도 벽동 출신으로 대표적인 보수주의 신학자이다. 선천의 신성중학교를 마치고 평양 숭실대학을 졸업한 뒤 1923년 중국의 금릉대학교 1926년 미국 뉴저지의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뒤에 켄터키주 루이스빌에 있는 남침례교신학교에서 기독교 변증학을 전공하여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1927년 귀국하였다. 평양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시작하여 목사 안수를 받았고, 1931년 평양신학교 교수로 취임하였고, 1933년 루이스빌 신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386월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평양신학교가 폐쇄되자 일본 동경으로 피신하였고, 1942년 만주 봉천으로 옮겨가 동북신학교의 교수와 교장직을 역임하였다. 1947년 송상석 목사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48년 서울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웠고, 1953년에는 총회직영의 총회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72년 은퇴 후 저술활동에 전념하였으며, 자유주의적ㆍ합리주의적 신학사상을 반박하여 성경의 무오성과 문자적 영감을 확고히 하려고 노력하였다.
  11. 일제가 한국 식민지배의 상징으로 서울의 남산 중턱에 세운, 신궁(神宮)이라는 가장 높은 사격(社格)을 가진 신사(神社)
  12. 한경직(韓景職, 1902-2000) - 장로교 목사, 교육가, 육영사업가. 19021229() 평남 평원군 공덕면 간리에서 한도풍의 장남으로 출생. 1912년 향리의 자작교회에서 설립한 진광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과 기독교 신앙에 접하게 되었는데, 어린시절 그에게 영향을 준 인물로는 6촌간이며 초기 평양장로회신학교 졸업생이었던 한병직 목사, 진광학교 교사인 홍기두 선생(평양 대성학교 출신), 교회 전도사 우용진 등이 있었다. 1914년 진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김찬빈(1899-1974)과 결혼하였다. 1917년 정주 오산학교에 입학하면서 이승훈, 조만식 등에게서 민족주의적 교육을 받았으며 1922년 숭실대학에 진학하여 자연과학을 수학하였다. 그는 숭실대학 재학중 블레어(W. Blair, 邦偉良) 선교사의 비서로 일하면서 공부하였는데 1924년 여름 블레어와 함께 황해도 구미포 해변가에 갔다가 목회자로 헌신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듬해 숭실대학을 졸업한 후 블레어와 윤치호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캔자스주에 있는 엠포리아대학에서 1년간 인문과학을 수학하였다. 1926년 뉴저지주의 프린스턴신학교로 진학하여 신학 수업을 받았는데 그가 프린스턴에 갔을 때 박형룡, 최윤관, 백낙준이 졸업하였고 그는 최윤관, 김성락, 보켈(H. Voelkel), 윤하영, 이규옹, 김재준, 송창근 등과 함께 공부하였다. 그는 프린스턴 재학중 신학노선의 차이로 신학교가 분열되는 과정을 목격하기도 했다. 1929년 신학교를 졸업한 후 예일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계속하려 했으나 폐결핵이 발병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뉴멕시코주의 알버커크 요양소에서 2년간 투병생활을 해야 했다. 그후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다시 6개월간 요양한 후 1932년 귀국했다. 귀국직후 평양 숭인상업학교의 성경 교사로 부임했으며 숭실대학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1933년 신의주 제2교회의 청빙을 받아 부임하였고 이듬해 의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35년 건평 3602층 벽돌건물로 교회당을 건축하였으며 1939년에는 백지엽, 김응락 등의 도움을 얻어 보린원을 개설하여 고아들을 수용하였고 후에는 양로원까지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 말기인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그는 미국에 유학하였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교회에서 추방당하였으며 이후 해방되기가지 보린원 원장으로 고아와 무의탁 노인들을 돌보았다.
    해방이 되자 그는 윤하영, 이유필 등과 함께 평북지역 치안책임자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19459월에는 윤하영과 함께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하였다.
    월남직후 미군정청 통역으로 있으면서 김재준, 송창근 등이 하는 조선신학교에 나가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그는 당시 서울 영락동에 있던 천리교 경성분소 건물을 접수하여 1945122일 베다니전도교회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오늘의 서울 영락교회가 되었다(194611월에 교회명칭을 바꾸었다).
    1954년 숭실대학장에 취임하여 3년간 봉직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0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1956년에는 한국기독교연합회(KNCC) 회장에 선임되어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지하였다.
    197312일 그는 박조준 목사를 후임자로 세우고 은퇴하면서 영락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1976년에는 고당 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를 조직, 회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82년에는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사업을 지휘하고 있다. 1948년 미국 엠포리아 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를, 1958년 연세대학교에서 역시 명예신학박사를, 1977년 숭전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각각 받았으며 1970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1948년 조선신학교의 김재준에 대한 신학논쟁이 전개되었을 때 그는 총회석상에서 개혁자의 부르짖은 자유가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 3대 자유인데 나와 해석이 다르다 하여 그를 처단하는 것은 삼가야 할 줄 안다고 하여 김재준에 대한 총회의 처단을 반대하면서도 결국 행동으로는 그와 함께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한경직 목사의 신앙노선은 김재준은 그것보다 온건하고 중도적이었기 때문이다.
  13. 대구제일교회 경상북도 및 대구 지역 최초의 개신교 교회이다. 조선 말기인 1893년에 남성정교회(南城町敎會)라는 이름으로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배위량이 개척하였다. 1897년 선교사 안의와가 정착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 예장 통합측 교회이다.
  14. Fundamental : 근본적인, 핵심적인, 기본적인
  15. 법주사(法住寺) -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속리산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의신이 창건한 사찰. 2018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16. 수교(手交) - 손으로 직접 전해 줌
  17. 감심(感心) - 마음속으록 깊이 느낌
  18. 연서(連署) - 한 문서에 두 사람 이상이 서명함
  19. 문익환(文益煥, 1918~1994) - 목사, 신학자, 시인, 사회운동가. 호는 늦봄. 만주 북간도 출생. 목사인 아버지 문재린과 어머니 김신묵의 32녀 중 장남이다. 31운동을 전후하여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던 북간도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만주의 한인들이 세운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실중학교, 북간동의 용정광명학교를 다녔다. 일본의 동경신학교로 유학을 갔으나 학병 거부로 퇴교되어 만주의 봉천신학교로 전학하였고 그 뒤 한인교회 전도사로 일하였다. 1947년에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미국 프린스톤신학교에 유학, 신학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여 한국신학대학과 연세대학교에서 구약을 강의하기 시작하였다. 개신교와 천주교가 공동으로 번역한 성서의 구약 번역 책임자로 8년 동안 일하였다. 1976년 명동 ‘31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면서 민주화투쟁에 나섰으며, 1980년 내란예비음모죄로 다시 복역하였다. 출옥후 민주ㆍ통일국민회의 의장(1984)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1985), 전국 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1989), 범민련 남측본부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1991), 4차 범민족대회 대회장(1993)을 역임하면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매진하였다. 1989년 방북하여 김일성을 면담하고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1992년에는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으며, 같은 해 3‘4월혁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 제청(提請) - 어떤 안건을 해결해 줄 것을 윗사람이나 공식 기구에 정식으로 요청함
  21. 송창근(宋昌根, 1898~1950) - 장로교 목사, 신학자, 교육가, 수난자. 호는 만우(晩雨). 1898105일 함북 경흥군 웅기면 웅상동에서 송시택(宋始澤)의 장남으로 출생. 그는 일찍 개화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종숙 송시명(宋始明)은 그의 고장에서 최초로 기독교인이 되었고 향리에 북일(北一)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송창근은 이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그는 다시 종숙의 권고로 15세의 나이에 간도로 건너가 이동휘가 독립군 양성을 위해 세운 명동중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계속했다. 이 시절 그는 이동휘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귀국하여 목사가 되라는 이동휘의 권고에 따라 귀국하여 1915년 서울의 피어선선경학교에 입학하여 19203월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그는 남대문교회 조사로 발탁되어 31 운동으로 투옥된 그 교회 장로 겸 조사인 함태영의 후임자가 되었다. 이때 그는 남대문교회가 뚝섬에 세운 전도서에 나가 전도하고 있었는데 교인들에게 독립운동 노래를 유포시켰다는 혐의로 일경에 체포되어 고역을 치렀다. 19208월 휴양할겸 고향에 들른 그는 함북지역 교회들을 돌면서 강연회를 열어 많은 청년들에게 감명을 주었는데 이 무렵 김재준과의 교분이 싹트기 시작했다. 서울로 돌아왔을 땐 강우규 의사가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사건이 일어나 이 사건의 혐의자로 또 다시 체포되어 6개월의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그는 이때 받은 고문으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출옥 후 계속 남대문교회 조사일을 보다가 일본 유학을 계획하여 1922년 도일, 처음엔 토오요오(東洋)대학 문화학과에 입학하였다가 이듬해 아오야마(靑山)학원 신학부 2학년에 편입하여 1926년 졸업하였다. 졸업후 미국으로 건너 가(이때 여비가 없어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이용도 목사가 외투를 팔아 도와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샌프란시스코 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였고 그해 9월엔 프린스턴신학교로 옮겼다. 이미 그곳엔 1년 전에 온 한경직이 있었고 1년 후엔 김재준도 건너와 3명의 한국인 학생이 함께 생활하였다. 송창근은 19289월 펜실베니아의 웨스턴신학교로 옮겨 1930년 졸업하였고 1931년 덴버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31년 그는 귀국하여 평양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취임하고 그 이듬해 평양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목회하였다. 이 교회는 조만식, 김동원 등 장로와 교인들 가운데 유력한 민족주의자들이 많았다. 그는 원리원칙을 살려 담대하게 목회하였으며 특히 교인들의 신앙과 기강을 엄하게 훈련하였다. 그후 교회 건축문제를 놓고 교회 당회와의 갈등이 생겨, 그는 1936년 봄 산정현교회를 사면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성빈학사를 세웠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시작하여 가난한 학생을 도왔다. 특히 일본으로 유학길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신앙적인 지도를 하였다. 그는 <성빈>이라는 잡지를 김정준(당시 숭실전문 학생)에게 편집을 맡겨 발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교회에서 그가 가르친 성서공부는 부산의 교계에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193710월 그는 흥사단회원들의 수양동우회사건에 연루되어서 4년간의 선고를 받고 또 다시 투옥되었다가 1939년 봄에 가석방으로 출옥하였다. 19393, 서울에서 조선 예수교장로회 대표자들로 구성된 조선신학교 설립위원회가 조직되도록 추진시킨 사람이 바로 그였다. 평양신학교가 무기 휴교하여 교역자의 양성과 공급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그는 장로회 안에 이전부터 있던 신학교육에 관한 새로운 이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노력한 것이다. 조선교회가 본토민교회 교역자를 자기 손과 힘으로 양성하자는 신학교육 이상은 외래선교사로부터 신학교육 권리를 이양받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 관헌의 방해로 그는 그 일을 김재준ㆍ윤인구들에게 맡기고 김천으로 내려가 815 해방때까지 김천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45년 해방직후 그는 조선신학교 교장으로 초청되었고, 서울 동자동에 있는 군정으로부터 적산재단(천리교)를 얻어내어서 학교 발전의 터전을 만들었으며 신학교 구내에 바울교회(오늘의 성남교회)를 설립, 목회하였다. 1948년에는 신학교를 한국의 최초 정규대학으로 승격시켰으나 이 신학교 교과내용을 중심으로 한국교계는 보수ㆍ자유 양 진영의 신학논쟁이 와중에 휩싸이게 되었다. 게다가 송창근의 일제말기 행위에 대한 구설수가 끊임없이 나돌아 그는 결국 주위의 권유로 19492월 미국 여행길에 올라 1년만에 돌아왔다. 그러나 19504월 대구에서 개최된 장로교 총회에서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신학교가 신신학파로 정죄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교계인사들을 만나고 신학교 살림을 꾸려나가는 힘든 업무를 계속하여야만 했다. 이러한 와중에 625사변이 발발하였고 그는 주위의 피난 권유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신학교를 지키기 위해 서울에 남아있다가 결국 8월경 공산군에 의해 납치되어 이북으로 끌려 갔다. 이후의 생사에 대해선 분명한 자료가 없으나 다만 1962년 내외문제연구소가 밝힌 남북 종교인사들의 북한 생활기인 죽음의 세월(동아일보 1962.3.29.-6.14 연재)에서 그가 19517월경 대동군 문성리에서 쓸쓸하게 별세하였다고 증언할 따름이다.
  22. 지급전보(至急電報) - 특별 전보의 하나. 야간에 취급하는 전보로, 전보의 배당 시간이 아닌 시간에도 배달된다.
  23. ex-officio : 직권에 의한, 직무상의, ‘당연직 출석을 의미함
  24. Inquis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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