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8일 월요일

[범용기 제2권] (25) 통일에의 갈망 – 6ㆍ25와 9ㆍ28 - “사라” 얘기

사라얘기

 

625 동란 바로 전이었다. 맞사위[1] 신영희[2] 의사와 정자는 도동에서 적산 집을 접수하여 개업하고 산림도 그 집 위층에서 했다. 하루는 정자가 첫딸 혜림을 업고 동대문 시장에 갔다가 길에서 노랑색 진돗개 새끼를 사 왔다. 혜림애가 하두[3] 떼써서 샀다는 것이다. 그런데 2층 아파트에서 개를 기를 수는 없었다며 우리 집에 갖다 놓았다.

나는 이름을 사라라 지었다. ‘사라는 몸집이 작고 귀가 뾰족하게 치솟고 뒷배는 홀족하고[4] 다리는 몸 비례로는 긴 셈이었다.

그는 일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침 일찍부터 내 방 문을 긁는다. 열면 곤두박질하며 매달려 낯이고 손이고 마구 핥는다. 말귀도 제법 알아듣는다.

 

서울역 광장이 폭격된 다음날 우리는 좀더 안정한데를 찾는다고 아현동 재종제[5] 재한(在翰)이네게 가서 하룻밤을 지냈다. ‘사라건사[6]는 옆방 박봉랑[7] 목사 사모님에게 부탁했다.

아현동에서 우리는 하룻밤을 지냈다. 안전도는 예나 제나 마찬가지였다. 그 이튿날 우리는 동자동으로 돌아왔다. 사라는 그 동안 한 입도 먹잖고 있었다. 옆집에서 정성껏 차려준건데도 먹지 않더라는 것이다. 배가 홀쪽했다. 나를 보고서 미친 듯 반가워했다. 딴 그릇에 밥을 줬더니 정신없이 먹는다. 방공호에 들어갈 때면 으레 딸아[8] 들어와 내 무릎위에 눕는다.


[각주]

  1. 맏사위’(맏딸의 남편)
  2. 신영희 장로 금호동 성호교회에서 장로로 임직받아(1963) 섬겼으며, 의사로 강원도 화천군 유촌리에 교회를 세워 전도하고 병원을 세워 치료해 주고, 야간 학교를 세워 마을 청소년들을 가르치며 헌신하였고, 후에 마을 유지들이 뜻을 모아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그의 아들(신민섭) 역시 성호교회에서 장로로 임직받아(2001) 교회를 섬겼으며 다른 아들은 목사가 되었다(신요섭 목사).
  3. 하두 - ‘하도의 방언
  4. 홀쭉하다’(길이에 비하여 통이 가늘다)
  5. 재종제(再從弟) - 육촌뻘이 되는 아우
  6. 건사 자기에게 딸린 것을 돌보거나 가꿈. 물건을 잘 거두어 보관하거나 지킴
  7. 박봉랑(1918~2001) - 평양 출생. 1938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신학교에서 공부를 하였다(당시 장준하, 김관석 등이 동기였다고 한다). 해방 이후 1947년 경신고등학교에서 독일어 교사를 하면서 조선신학교에 편입하여 신학공부를 계속하였다. 전주중앙교회의 청빙을 받았지만 송창근 학장의 권유를 받아들여 1949년에 조선신학교 교수가 되었다. 1952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서 1958년에 하버드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 1984년까지 한신대학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건대에서 1964~1969년에 가르치기도 하였는데,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장신대학교의 청빙을 거절하고 한신에서 35년 동안 교수 생활을 하였다.
  8. 따라의 오기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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