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를 버리고
우리가 동자동 집을 나올 때 늙은 개장수가 와서 ‘사라’를 달란다. 나는 숱한 식구 데리고 남의 집 신세지러 가면서 강아지까지 끌고 갈 염치가 없다 생각되어 ‘사라’를 개장수 영감에게 줬다. ‘사라’는 체념한 듯 맥없이 나를 쳐다보고 소리 없이 지게 위에 놓여 갔다.
한 그릇 개장국 거리로 쓰여졌을 것이다.
나는 그 후 서양 전쟁 영화에서 서독, 이태리 등 피난민 츄럭[1] 위에, 식구들과 같이 탄 개를 볼 때마다 ‘사라’ 생각에 나 자신을 경멸하곤 했다.
우리는 하찮은 살림도구와 이부자리, 입던 의복, 먹다 남은 쌀 두어 말 등등을 ‘니하까’[2]에 싣고 밀며 끌며, 그 숱한 사람들 틈에 끼어 동자동에서 동대문, 그리고 망우리 고개를 넘어 도농에까지 갔다.
학우는 큼직한 문깐방을 비우고 우리를 마지했다.[3] 우리 식구는 아내와 나, 그리고 단계(신자), 혜원, 은용, 경용, 관용, 일곱이다. 그러나 문깐방이 넓어서 모두 다리 펴고 잘 수 있었다.
[각주]
- ‘트럭’(truck) - 짐을 실어나르는 자동차
- ‘리어카’(rear car) - 자전거 따위의 뒤에 달아 끌거나 사람이 직업 끄는 작은 수레
-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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