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8일 월요일

[범용기 제2권] (28) 통일에의 갈망 – 6ㆍ25와 9ㆍ28 - “만우”의 자택 감금

만우의 자택 감금

 

그후부터 자택 감금 상태여서 아무도 얼씬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도농에 피난해 있었다. 하루는 신양섭이 도농에 찾아왔다. 그는 우리 졸업생으로서 기독교연맹맹원[1]으로 가장하고 있었다. 그 덕택에 저쪽 소식을 적어도 한주일쯤은 앞당겨 알아낸다. 그리고서는 송창근 학장과 도농에 있는 나에게 전한다. 그는 자전거 타고 40리길을 한주일 두세 번 다녀간다. 겁 없는 친구다. 그는 이렇게 전한다.

전쟁은 말기 현상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저애들은 초조하게 발악합니다. 오늘은 송 목사님 말씀 전하러 왔습니다.

송 목사님이 김천교회를 목회할 때 집사로 있던 박철이란 사람이 김일성이 지명한 이남 국회의원격인 인민대표자의 하나로 월북한 일이 있었는데 그자가 이번에 서울 와서 송 목사님을 찾아뵙고 사연을 말하더랍니다.

제가 송 목사님 신분과 안전을 절대 보장합니다. 안심하고 댁에 계십시오. 그리고 다른 교수들의 안전도 절대 보장합니다. 다들 돌아와서 다시 신학교를 맡으라고 하십시오!’” 했다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이튿날, 신학교 건물을 접수하여 지키고 있던 민청아이들을 당장 몰아내고 모든 재산과 관리권을 송 목사에게 도루[2] 마끼더라고[3] 했다.

송 목사는 혼자서 그 건물을 맡아 돌아보노라니 외로워 견딜 수 없었다면서 “‘장공을 데려오라고 해서 일부러 왔습니다한다.

나는 갈 생각도 있었지만, 그때 역시 악성 마라리아[4]에 걸려 매일 떨고 있는 판이었고 못 먹고 쇠약해서 일어서다가 까무러치기도 하는 형편이어서 40리를 걸을 자신이 없었다. “몸이 좀 나으면 간다고 송 목사에게 알려라하고 돌려보냈다.

성결교회 신학교도 접수되고 박현명 목사 등도 숨어 있었는데 송 목사는 일부러 박현명 교수를 찾아가서 한신재단 반환된 얘기를 하고 박철을 만나라 했단다.

그대로 해서 성결신학교도 되찾고 박현명[5] 교수와 다른 선생들도 학교에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한주일 지나서였다. 신양섭은 다시 도농에 왔다.

목사님, 그때 서울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서울 안 목사 40여명이 몽땅 잡혔습니다.”

인민군 정부에서는 종로 YMCA회관에서 목사들 주최로 대대적인 미영격멸대회를 열라고 지령해 왔었는데 유호준ㆍ김종대 등을 주최자로 강제 등장시켰고 송창근 목사도 단위에 앉히려고 강권하더라는 것이다. 송 목사는 청중들 틈에 끼어 앉았었지만, 안고 밀고하면서 단상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시종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시민이래야 모두 소개하고 몇 사람 없는데 늙은 할머니들이 수십 명 나와 앉았더라고 한다.

그 모임은 완전 실패였다. 그 후부터 목사 잡기 운동을 벌여서 우선 김재준부터 잡으려고 동자동을 비롯하여 있음직한 곳은 모조리 찾아다녔단다. 사람들은 김재준의 행방을 물어도 모른다고만 대답한다. 나는 도농에로 떠날 때 동사무소에 소개지 주소를 정직하게 써 놓고 왔으니까, 그것만 들춰봐도 알법한 일이었지만 그건 건드리지도 않더라는 것이다. 모두가 엉터리 주소를 써 놓았기 때문에 나도 예외가 아니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단다.


[각주]

  1. 맹원(盟員) - 특정한 동맹에 속해 있는 개인이나 집단
  2. 도루 - ‘도로의 방언
  3. 맡기더라고
  4. 말라리아(malaria) - 열대, 아열대에 많이 서식하는 학질모기를 통해 옮기는 전염병
  5. 박현명(朴炫明, 1900~납북) - 성결교 목사. 함경남도 북청군 출신. 처가는 이준을 배출한 명문가였는데 과거 공부를 위해 처가에서 공부하다가 근처의 교회에서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게 되었다. 성결교 계열의 경성성서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가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이 조선인민군에게 점령되어 있던 823일 서울 종로구에서 열린 기독교도 연맹회의에 송창근 등과 함께 참석했다가 납북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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