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8일 월요일

[범용기 제2권] (30) 통일에의 갈망 – 6ㆍ25와 9ㆍ28 - “만우”의 인격과 “에피소드”

만우의 인격과 에피소드

 

만우는 함경북도 웅기항에서 서북쪽 언덕 너머의 웅상이란 마을에서 났다.

뒤에는 송진산맥[1]이 드높게 태평양과 나란히 하늘가를 가로질러 달렸다.

앞면은 아득한 수평선으로 그어진 태평양이 활짝 열렸다.

바닷가에는 대암반도까지 백사장이 완곡선을 그리고 있다. 이 해수욕장은 일본인들이 침흘리며 욕심내던 고장이다.

남만철도회사[2]에서 만주를 삼키고 일본해[3]호수로 만든다고 장담할 때, 그들은 웅상을 전 만주국[4]의 피서지로 설계했었다.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북관[5]의 선진이었다.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망명하는 애국지사들이 굽도리[6]로 웅기항[7]에 상륙하여 웅상을 거쳐 서수라[8]까지 걸어, 거기서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 또는 만주로 가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기독교와 개화운동이 거의 동의어 같이 되어 있었고, 민족주의와 교회공동체와도 일체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유랑하는 애국지사들이 뿌린 복음의 씨가 일찌감치 웅상에도 뿌리를 내렸다. 따라서 만우도 소년시대부터 기독교신자로 자랐던 것이다.

 

만우는 꿈이 많았다. 그는 열세 살 때 집을 나와 간도에 달아났다.

 

간도에서는 성재 이동휘[9] 선생에게 사사(師事)[10]했다. 귀여운 13세 소년이 큰 뜻을 품고 간도에 모험했다는 것이 기특하대서 성재선생은 만우를 어린 제자로 항상 곁에 두어 듣고 보고 증언하게 했다.

하루는 성재 선생을 따라, 강가 섬에 갔다. 성재 선생은 저쪽 큰 섬에 앉고 만우는 그 옆에 작은 바위 우에 있었다. 성재 선생은 섬에서 우뢰 같이 우렁찬 소리로 통곡했다. 주먹 같은 눈물이 펑펑 소꾸친다.[11]

 

이 나라, 이 민족을 어찌 하려는고!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종으로 팔려도 제 욕심만 부리는구나!”

 

그는 사자가 고함치듯, 지렁지렁 산울림을 떨게 하며 한참 통곡했다 한다.

이것은 그가 북간도에서 경영하던, 독립군 장교양성소인, 군관학교가 경영난으로 폐문하게 된 때에 그 학교 경영비 조달을 위한 최후수단으로서의 고육책[12]이었다 한다.

“‘성재가 마적에게 납치됐다. 보상금 ○○○원을 ○○날까지 ○○에 가져오라. 그러지 않으면 성재는 죽는다.”

이 소문을 항간[13]에 돌아가게 하고서 돈 들어오기를 숨어 기다리는 것이었다 한다. 그 일을 위한 사동[14]으로 소년 만우를 데리고 간 것이라 했다.

 

그의 이런 고육책도 소용이 없었다. 간도와 그 근방 만주에는 2백만 교포가 망명 또는 이주해 있었다 한다. 그러나 그들은 지쳤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성재는 시베리아로 떠난다. ‘만우는 자기도 따라간다고 졸랐다. 그러나 성재는 허락하지 않았다.

너는 본국에 돌아가서 신학공부하고 목사가 되라!”

 

그래서 만우는 집에 돌아왔다. 소년이지만, 농사일에 참여해야 한다. 김매고, 소 먹이고, 콩씨 뿌리고그는 고단했다. 몸보다도 맘이 가만있지 않는다. 그럭저럭 몇 해 지났다.

그는 도망쳐서 서울에 왔다. 피어선 성경학교에 입학했다. 한 달에 16원씩 도와주는 분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달, 돈이 안 온다. 알아봤다. 벌써 보냈다는 것이었다. ‘만우는 어느 놈이 가로챘구나 싶어서 몰래 조사했다. 같은 반 학생 하나가 봉투 속 소액수표를 훔쳐 쓴 것이었다.

만우는 학우회 모임에서 벽에 걸린 지도축[15]으로 그놈을 두들겨 팼다. 지도축이 부서지고 동강났다.

선생이 들어와서 지도축이 동강난 이유를 묻는다. ‘만우는 설명했다. 그 학생은 도둑놈으로 퇴학됐다.

만우는 정답고 세련된 미남자였다. 그러니만큼 따르는 처녀들도 많았다. 일본 유학 초기에는 만우를 사모하는 일본 처녀도 한두 사람 있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만우는 여전히 정답게 친교를 계속한다. 그러나 선을 넘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

만우는 일본말을 배운 일도 없고 영어를 배운 것도 아니었다. 일본말을 못하면서도 일본 유학에서 좌절된 일이 없었고, 영어를 모르면서도 미국 유학에서 최고 학위까지 획득했다. 그리고 간 데마다 존경을 받았다.

그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이라도 이라 믿고 밀어닥치면 이 된다.”

 

만우의 미국 유학에서 첫 신학교는 싼안셀모 산꼭대기에 자리잡은 샌프란시스코신학교였다.

영어는 듣지도 보지도 읽지도 못하니 크레딧이 나올 까닭이 없다.

그러나 인격적으로는 교수들도 같은 교수인양 존대했고 학생들은 선배로 경의를 표했다.

 

학비가 대중없이 부족해서 하기 방학에는 노동이라도 해야 했다. ‘레더스솎아내는 농장 일을 얻었다.

멕시코 인부들 틈에 끼어 그들과 같이 일한다. 한 사람이 한 이랑씩 맡는다. 멕시코 인부들은 숙련공일뿐 아니라, 체력이 몇 갑절 세다. 뒤에는 말탄 감독이 뒤떨어지는 자를 기다란 채찍으로 후려갈긴다. ‘이랑[16]이 어찌나 긴지, 끝이 안 보인다. 이랑 끝까지 단번에 가야 한다. ‘만우는 죽어라고 애써도 노상 뒤떨어진다. 솎아내는 기술이 없으니 시간도 많이 든다. 감독의 가죽 채찍이 등을 후려갈긴다.

 

밤 잠자리가 더 큰 문제다.

밭 모새기에 큼직한 바라크[17]가 있다. 거기는 멕시코 인부들 합숙소다. 조금 떨어져서 한 두 사람 잘만한 작은 바라크가 있다. 그것이 만우의 숙소다.

 

만우는 고단해서 일찍 잔다. 멕시코 인부들은 술 먹고 떠들다가 만우숙소에 침입하여 남색을 강요한다. ‘만우는 도망친다.

 

어느 포도원 속에 들어갔다. 포도원 주인은 일본인이었다. 언어가 통하니 친교도 통한다. 주인은 과수원에서 포도 따는 일, 사과나 배에 종이봉지 입히는 일 등등을 하라 한다. 감독이 따라다니는 것도 아니니 자유로 기분 내키는 대로 쉬며 일하라고도 한다.

만우에게는 그 주인이 천사같이 고마웠다. 주인은 만우에게 동부로 갈 여비를 마련해 준다. 그래서 프린스톤 신학교에 다니게 됐다.

 

오랜 후일에 만우한신학장이 됐다. ‘장공의 신학을 이단으로 규정지으려는 미국 선교사들과 이북 피난 목사들의 공동전선이 형성되는 중이었다.

총회장 이자익[18]은 이쪽에 가서도 그래, 그래!” 저쪽에 가서도 그래, 그래!” 도무지 대중을 잡을 수 없는 인물이란 평을 받고 있었다.

그는 걸핏하면 한신에 찾아온다.

한신 입장에 동조한다는 자기의 의사표시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를 싫어했다. 때로는 미워했다. 그러나 만우는 그를 모셔들어 푸짐하게 식사 대접하고 선물도 주고 친절과 공손으로 그의 기분을 돋운다.

나는 불평했다. “어쨌다고 그 영감을 그렇게 치켜 올리는 거요! ‘한신의 위신도 생각해야 하잖겠소?”

그럴 때 만우의 대답은 언제나 같은 것이었다.

미운 놈 떡 한 개 더 줘도 손해보다 이익이 많을 거요!”

 

해방 직후 적산 접수에 미쳐 돌아가던 때 얘기다. 우리가 합법적으로 접수한 천리교 재단 목록에는 용산 근처에 있는 광대한 집회실과 기숙사를 겸한 대하(大廈)[19]도 들어 있었다. 그 집을 상명여고 교장(女子) 남궁 처장에게 말하여 이중으로 계약했다. 그래서 계쟁중의 적산에 들었다. 그러나 실상으로는 이미 상명여고에 넘겨준 것이었다. ‘만우는 여자 의복을 한 벌 갖고 가서 양복 위에 치마저고리를 입고 남궁 처장 앞에 나타났다.

당신은 치마저고리 앞에서는 법도 의리도 없이 , 하는 것 같으니 나도 치마저고리를 입었소!”

 

만우에게는 영웅주의(Heroism)가 남아 있었다. Hero가 되려면 전술과 전략이 필요하다. 싸움에서는 이겨야 한다. 그는 때를 못 만난 Hero였다. 그는 이 넘치는 Hero였다. 이것은 내 망평일 수도 있겠기에 독자의 동조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게는 둘도 없는 친구요, 동지요, 형제다.


[각주]

  1. 송진산맥(松眞山脈) -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 회령시, 경흥군의 경계에 있는 조두령의 북쪽에서 시작하여 대체로 동서방향으로 뻗어 나선시 화대산에 이르는 산맥, 함경산맥의 지맥이다. 길이는 60km, 평균 해발은 650m, 너비는 8~12km이다.
  2. 남만철도회사 1906-1945년까지 만주에 존재했던 반관반민(半官半民)의 특수 일본회사.
  3. 일본해(日本海) - ‘동해를 일본측에서 이르는 말
  4. 만주국(滿洲國) - 일본이 1932년에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에 세운 국가. 1945년에 일본에 세계대전에서 패전하여 죽구에 반환될 때까지 존재하였다.
  5. 북관(北關) - ‘함경도를 달리 이르는 말
  6. 굽도리 장판과 접해 있는 벽의 아랫부분
  7.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에 위치한 이 항구는 1921년에 개항장이었다가 이후 무역항으로 정식 개항한 항구로 북한에서는 웅기 일대의 지명을 개칭하여 선봉군으로 취급하였고, 이 이름을 붙여서 선봉항으로 부르고 있다.
  8. 서수라(西水羅) - 함경북도 경흥군 노서면, 두만강 하구 남서쪽에 있는 항구
  9. 이동휘(李東輝, 1973~1935) - 일제강점기 신민회 간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호는 성재(誠齋).
  10. 사사(師事)하다 스승으로 섬겨 가르침을 받다
  11. 솟구친다
  12. 고육책(苦肉策) - 자신의 피해를 무릅쓰고서 어쩔 수 없이 택한 방책
  13. 항간(巷間) - 일반 사람들 사이
  14. 사동(使童) - 관청이나 회사, 학교, 영업처 등의 사무실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아이
  15. () - 둘둘 말도록 되어있는 물건의 가운데에 끼는 막대
  16. 이랑 갈아놓은 밭의 한 두둑과 한 고랑을 아울러 이르는 말
  17. baraque : 주둔군을 위해 만든 막사
  18. 이자익(李自益, 1882~1961) - 해방 이후 대전성경학교 초대 교장, 장로회 총회장 등을 역임한 목사. 경남 남해에서 출생하여 선교사 테이트(L.B. Tate, 최의덕)를 만나 예수를 믿고 조사로 일하게 되었다. 1910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에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1919년 전북노회장, 1924년 제13회 총회장, 1927, 1928년 경남노회장을 역임하고, 해방 후 1947년과 1948년에 연속으로 총회장에 추대되었다.
  19. 대하(大廈) - 덩실하게 큰 집, 규모가 큰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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