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8일 월요일

[범용기 제2권] (33) 통일에의 갈망 – 6ㆍ25와 9ㆍ28 - 도농에서 서울에, 다시 부산에로

도농에서 서울에, 다시 부산에로

 

강원룡[1]과 그 식구도 도농에 피난해 있었는데 처음에 정거장 건너편 마을에 방을 얻고 살았다. 그러다가 마감판에 우리 동리에 왔다. 방공호 속에서 찬송하고 예배하며 몹시 초조해 했다.

도농이 해방되던 이튿날 나는 서울로 간다. 강원룡은 아직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면서 만류한다.

나는 떠났다. 길가에는 국군 헌병의 검문소가 5리에 하나쯤은 있는 것 같았다.

목사라니까 신임하고 보낸다. 신양섭도 같이 간다. 머리를 박박 깎았기 때문에 인민군으로 의심받아 까다롭게 묻는다. 나는 우리와 고난을 같이하던 우리 집안 식구니 내가 책임진다고 다짐한다. 그는 해방을 위한 숨은 일꾼이었다고 했다. 무사하게 동대문 밖까지 왔다. “서울이 다 탄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구먼!” 하고 혼자 중얼거리며 걸었다.

 

동대문에 들어서자 서울은 없다. 오장동에 갔다. 재와 흙과 기와조각 벽돌부스러기로 된 벌판이었다. 맏딸애 집이 어느 쯤이었던지 짐작이 안 간다. 나와 아내는 여기쯤일 것이라고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서 왔는지 맏딸 정자가 나타나 우리 다 살아 있어요!” 한다.

얘기는 이러했다.

 

병원은 이층집이었는데 동리 사람들과 함께 병원 지하실에 모여 있었다. 불 혀가 지하실 천정을 훑는다. 정자는 만삭이 지난 몸으로 지하실 들창을 부수고 기어올라, 꼬마 딸 혜림을 끄집어냈단다. 그리고 동쪽 신작로로 뛰다가 길가 패인데 빠진 대로 한참 있었다. 남편 신영희 의사는 부상하고 쓰러진 동민들의 응급치료에 정신없이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자기 집이 타는 것을 보고 뛰어와서 불 속으로 마구 들어가려는 참이었다. 식구들을 건지려는 것이었다. 정자가 소리쳤다. ‘우리 다 나왔으니 이리오라.”

그래서 모두 살았다는 것이었다.

원래 오장동이란 데는 일제시대의 하나마찌’(花町)[2]이어서 가난한 농촌 조선 아가씨들을 인육장사하는 일인들이 사다가 우리속에 가둬놓고 밖에는 휘황찬란한 전등으로 오색구름 같이 꾸민다. 젊은이들의 울적[3]을 발산시킬 고장이 거의 없었던 때라, 청년들은 공창가, 사창가를 산보삼아 거닌다. ‘화정변두리에는 색주가[4]도 많다. ‘북청집이니 함흥집이니 하는, ‘광목[5] 조각에 쓴 가호(家號)가 너풀거린다. 거기서는 주로 막걸리, 소주, 돼지순대 따위를 판다.

그 옆에 있는 호화판 공창가를 지나가노라면 아가씨들이 달려나와 억지로 납치한다. 술상이 들어온다. 안주도 있다. 얼근[6]해지면 자리에 눕는다. ‘화대’(花代)는 꽤 비싸다. 못 내면 그 아가씨의 빚이 된다. 아가씨들은 오래 있을수록 빚이 는다. 그래서 계약기간이 연장된다. 어떤 넉넉한 젊은이가 정이 들어 속량해 내기 전에는 평생 풀릴 길이 없다.

오장동이란 그런 고장이었다.

 

유엔군의 주력부대 중 하나는 오장동 뒷산 넘어서 한강을 건너 곧장 오장동에 진입한다. 미군의 응원폭격이 거기에 집중됐다. 주로 소이탄[7]이었다. 삽시간에 하늘에서 내리는 유황불에 잿더미가 됐다. 한 채의 집도 없었다. 나는 다시 소돔ㆍ고모라 얘기를 연상했다.

 

어쨌든, 신 의사와 정자는 불타는 아궁이에서 끄집어낸 타다 남은 부지깽이같이 구원되었다. 만삭된 날짜보다 한달이나 늦게사 정자는 첫 아들을 낳았다. 지금 한양공대 연구실에서 일하고 있는 민섭[8]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도중에 낫대서 내가 민섭이라 이름했다.

 

아내와 나는 동자동 우리 집에 찾아왔다.

다 부서지다가 부엌과 작은 안방과 6조짜리 거실과 옆에 붙은 길쭉하고 좁은 곳간방이 남았다. 8조 다다미방도 몰골은 남아 있었다. 변소 모새기 아름드리 살구나무는 허리가 부리진대로 죽지는 않았다. 정원의 덤부사리[9] 나무는 제멋대로 자라서 담장을 넘었다.

 

나는 그 살구나무 부러진 가지를 베여 도끼로 장작을 팬다. 장작가리[10]가 뒤뜰 담장 밑에서 날마다 자란다. 그것도 취미였다. 신자가 6조 다다미 방에서, 혜원은 옆 곳간방에서 잔다. 나머지 식구들은 작은 안방에 몰아 넣었다.

도농에 피난 갈 때 마루 밑에 감췄던 책들은 한 절반씩 썩다 남았다. 쓸모가 없었다.


[각주]

  1. 강원용(姜元龍, 1917~2006) - 19177월 함경남도 이원군에서 태어났다. 1931년 개신교에 입교했고, 같은 해 차호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만주 북간도 용정의 용정중학에 진학, 윤동주 문익환 등과 친분을 가졌으며, 브나로드 운동에 참가했다. 그후 북간도 은진중학교에 수학하면서 은사 김재준을 만났다.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메이지 학원 영문과에서 수학하고 1940년 일본 메이지 대학 영문학부를 졸업한 뒤 만주에서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1943년 일본 경찰을 피해 북간도에서 은거하다 1944년 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옥중에서 단식 끝에 결핵으로 석방되었다. 1945년 해방 후 김재준 목사가 경동교회를 설립할 때 참여하였으며 한신대학교에 입학했다. 1946년 김규식과 인연으로 좌우합작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194712월에는 민족자주연맹 기획담당 책임자로 참여하였다. 단선 실시 후에는 정치에서 물러나 1948년 한신대학교를 졸업, 194911월 김재준의 후임으로 경동교회 목사로 부임한다. 기독청년연합회 정치부장을 지내다 1953년 도미하여 캐나다로 유학, 1954년 캐나다 매니토바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고 1956년 미국 유니언신학대학을 거쳐 1957년 미국 뉴스쿨대학교대학원을 졸업한 뒤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59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강의, 세미나, 학술대회 등을 주관하였다. 1961년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 실행위원 및 중앙위원이 되었다. 1972년 박정희의 유신에 반대하여 1974년 김수환, 함석헌 등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가, 대표위원에 피선되었다. 19808월 국정자문위원에 임명되었고, 1981WCC 중앙위원회에 참석하였다. 1986년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사업협의외 대표회장에 피선되었다. 1986년 경동교회 목사직을 은퇴하고, 1986년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 의장, 한국종교인평화회의 회장 등을 역임했다.
  2. 화류계, 유흥가, 유곽
  3. 울적(鬱積) - 불평불만이 발산되지 않고 겹쳐 쌓임
  4. 색주가(色酒家) - 젊은 여자를 두고 술과 몸을 파는 영업을 하는 집
  5. 광목(廣木) - 무명 올로 당목처럼 폭이 넓게 짠 베
  6. 얼근하다 술에 어지간히 취하여 어렴풋하다
  7. 소이탄(燒夷彈) - 사람이나 건조물 등을 화염이나 고열로 불살라서 살상하거나 파괴하는 폭탄이나 포탄
  8. 신민섭 - 신영희 장로의 아들, 2001년 성호교회 장로로 임직하였다.
  9. 덤부사리 여러 개의 덤불이 어수선하게 엉켜있는 수풀. 충북지방의 방언이다.
  10. 장작가리 장작을 한데 모아 수북하게 쌓아올린 큰 덩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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