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ㆍ4 후퇴
1950년 6월 27일에 미국 대통령 트루먼[1]이 ‘국련’ 결의를 거치지 않고 대만 해협에 미국 제7함대를 파견한데 대하여 많은 ‘국련’ 가맹국과 국제여론이 악화됐다.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사이에 어떤 예측 못한 중대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1950년 9월 30일에 ‘주은래’[2]는 “미 제국주의 침략군이 북위 38도선을 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침범하는 경우에는 중국의 안전이 위협되는 사태가 되기 때문에 중국은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경고했다.
1950년 9월 30일에 인도 정부는 북경주재 인도 대사의 보고를 받고, 국련군이 38도선을 돌파 북상하는 경우에는 중국과의 전쟁을 유발할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그런데 1950년 10월 1일에 국련 산하의 한국군이 38선을 돌파하고 북진했다.
1950년 10월 30일에 ‘주은래’는 북경주재 인도 대사에게 “한국군 이외의 외국 군대가 38선을 넘어오는 경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키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한다”고 통고했다.
1950년 10월 8일에 국련군은 38선을 돌파하고 북상하여 같은 달 하순에 ‘초산’, ‘혜산’[3] 등 국경지대에 진출했다.
1950년 11월 11일 중화인민공화국은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은 중국 침략의 죄를 범했다. 조선에서의 미국의 조치는 중국의 안전보장을 위협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은 침략자인 미국과 그 추종자가 그들의 침략 행위를 중지하고 그들의 침략군대를 철수하기를 단호히 요구한다. 침략이 중지되지 않는 한, 침략에 대한 반대 투쟁은 결코 중지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1950년 10월 25일에 중국 인민의용군은 조선전선에 출동했다.
1950년 11월 25일 공산군 총반격이 개시됐다.
1951년 1월 5일에 공산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남하했다.
1951년 1월 4일 서울 시민은 거의 전부가 ‘남’으로 후퇴했다.
이것이 이른바 1ㆍ4 후퇴다. 나는 그보다 앞질러 부산에 내려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서울 시민을 몽땅 대구, 부산 등지에 옮기고 서울을 맘대로 폭격하는 것이 미군의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각주]
-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 - 전임자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4선으로 취임한 지 한 달 만에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제34대 부통령(1945년)이 된지 82일 만에 제33대 대통령(1945~1953년)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항복을 받았고,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았으며,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전쟁에서 사용하라고 명령한 국가원수이다.
- 주은래(周恩來, 저우언라이, 1898~1976) - 마오쩌뚱의 뒤를 이어 중화인민공화국 제2대 주석(1954~1976)이 됨.
- 혜산(惠山) - 함경남도 북쪽 끝에 있는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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