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8일 월요일

[범용기 제2권] (51) 교권에 민감한 서울의 중견 목사들과 한국신학대학 - 장로교 총회 속개

장로교 총회 속개

 

625 때문에 휴회 중이던 장로교 총회가 부산서 속개[1]된다. 총대들의 성분을 따져보면 우리 켠이 훨씬 많다. 그들은 일본에 피신해 있는 미국 남ㆍ북 장로교 선교사들을 불러들였다. 미국 선교사들은 미군 군목 역할도 한다. 군복을 입고 찦차를 차고 위험한 작전기지와 민간인 여행금지 구역까지도 맘대로 출입한다.

 

그들은 자기 켠 대표들을 빠짐없이 실어왔다. 그러나 우리 켠에는 선교사가 없다. 작전구역이나 여행금지 구역에 사는 사람은 거의 못 나왔다. 선교사도 그들 인원수의 반(?)인가는 총회원이 된다.

 

어쨌든 총회를 열고 보니 저쪽 대표가 선교사까지 합하여 다섯 사람이 우리 켠보다 많았다. 임원 선거에서 다섯 표차로 저쪽 켠 분이 회장으로 당선됐다.

 

보통 편법[2]으로는 차점자가 자동적으로 부회장이 되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례였는데, 이번에는 하나하나 투표로 결정한다. 그래서 언제나 5표차로 부회장, 서기, 부서기, 회계, 부회계, 회록서기 등등이 저쪽 사람일색으로 메꿔졌다. 김세열, 이남규[3], 김종대 등 당당한 논객[4]들이 반박 논진을 폈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5표 차로 다수당이 된 그들은 다소 불안했던지, 한국신학대학의 총회인허 취소, 김재준 파면, 한신 졸업생의 교회 위임 거부, 이미 위임된 한신출신 목사들에 대한 노회로서의 재심사 등등을 제안했단다. 우리 켠 총대들은 일장연설을 남기고 퇴장했다. 격론이 벌어진데다가, 총회기간도 지났기에 그들은 임원회에 한신문제를 맡기고 산회[5]했다.

 

한신 이사장은 김종대였고 학장은 함태영이었고, 이남규, 김세열[6] 등은 실행 이사였다.

선후책을 세우기 위해 이사회 실행부가 모였다. 그때 벌써 총회 결의 사항이 한신 이사회에 공한으로 전달돼 있었다. 총회 임원회해야, 그들 일색이었기 때문에 넘기나마나 였던 것이다.

 

이사장은 학장과 의논하고 그 공한[7]을 돌려보냈다. 접수 자체를 거부한 것이다.

한신은 종전대로 계속한다. 총회 배경도, 선교사 배경도 없었지만, 사기는 드높았다.

함태영은 혼잣말 같이 뇌였다.

나는 화평을 원했는데 또 싸워야 하겠구나!” - ‘탄식이었다.

 

신문기자가 와서 소감을 말하라 한다.

강수학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8]

내게는 뜬 구름 같소.” 하고 나는 대답했다. 공자의 自敍에 나오는 말 - ‘아닌 출세는 내게 뜬구름 같다’(不義而 富且貴 於我 如浮雲)는 구절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9]내게 불의가 없으면 남이 뭐라 해도, 남이 어떻게 해도 내게는 상관없다. 내 맘에는 하늘에 뜬 구름 보듯 여유가 있다” - 이런 뜻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신문에도 그대로 났었다.


[각주]

  1. 속개(續開) - 멈추었던 모임을 다시 이어서 엶
  2. 편법(便法) - 간편하고 쉬운 방법
  3. 이남규(李南圭, 1901~1976) - 해방 이후 한국기독교연합회 회장을 역임한 목사. 정치인. 전남 무안 출신으로 1936년에 평양신학교를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하였다. 광복후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위원 민선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제헌의회 선거 때에는 독립촉성국민회 소속으로 목포에서 당선되었으나, 곧 이어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전라남도 도지사로 일하였다. 1958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제43회 총회장이 되었으며, 1959년에는 한국기독교연합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60년 민주당 추천으로 초대 참의원 선거(전라남도)에 당선되었다. 1962년부터 목포 영흥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취임, 후진을 양성하였다.
  4. 논객(論客) - 사물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 능숙한 사람
  5. 산회(散會) - 모임을 마치고 사람들이 흩어짐
  6. 김세열 목사는 전남 곡성 출신으로, 평양 신학을 마치고 우수영에서 교역생활을 시작하여, 전주서문 외 전주태평교회 등에서 시무하였다. 그는 목회자로서 보다도 교회법에 정통한 교회 정치의 지도자로서 더 유명할 것이다. 일제의 탄압이 극도에 달했던 1938년에 전북노회 제32회 노회장이 되었고, 장로교 총회가 해체된 후 일본 기독교 전북교구장(노회장 격)을 역임하였다.
    38회 호헌총회(1953.6) 총회장이 되어 오늘의 한국기독교장로회의 기초를 형성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한국기독교장로회 헌법을 비롯하여 제반 규칙ㆍ규정을 제정, 개정하는 데 법통으로서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큰 공을 세웠다. 전북노회 제53(1959), 54(통합노회), 56(1962) 노회장을 거듭 역임하면서 노회 내의 어려운 과제들을 해결하는데도 크게 기여하였다.특히 19629월에는 이리제일교회 임시당회장이 되어, 당시 이상귀 목사를 둘러싼 분쟁으로 교회가 큰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의 특유의 정치력을 발휘하여, 7개월여에 걸친 진력으로 사태를 잘 수습하였다.
    화려한 그의 경력과 명성에 비해 그의 노경(老境)은 쓸쓸하였다. 교단 탈퇴 문제 등 복잡하게 얽힌 가운데 외롭게 생을 마쳤다. [한국기독교장로회 군산노회사(1907~2005), 142-143]
  7. 공한(公翰) - 공적인 편지
  8. 1950년대 한국기독교를 대표하는 주간지는 오늘날 예장 통합교단의 기관지가 된 <기독공보>가 있었는데, 한국전쟁 시기에 강수학이라는 사람이 발행한 <한국기독시보>가 있었다. 당시로서는 <기독공보>보다 더 친정권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9. 子曰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자왈 반소사음수 곡굉이침지 낙역재기중의)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불의이부차귀 어아여부운) -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팔을 굽혀 베개 삼고 있어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다. 의롭지 않으면서 부귀해지는 것은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다.” [논어 술이편(論語 述而 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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