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8일 월요일

[범용기 제2권] (50) 교권에 민감한 서울의 중견 목사들과 한국신학대학 - 서울의 중견 목사들 작전

서울의 중견 목사들 작전

 

전필순, 유재한[1] 등 서울의 교권주의자들은 이 기회에 한신을 손에 넣어야 한다고 책략을 꾸몄다. 우선 함태영을 명예 학장에서 실권 학장으로 취임시키고 재산과 경리를 맡을 살림살이 주부는 최거덕[2] 목사에게 맡기기로 했다. 말하자면 박한진대신에 최거덕을 앉히자는 것이다.

그러나 김재준이 도사리고 앉아 있는 한, 일은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김재준을 파면하고 함태영을 앉힌다는 꾀였다.

그래서 이사회가 소집됐다. 당시의 이사장은 김종대[3]였다.

김종대는 피난 중에 줄곧 우리와 고락을 같이했다. 그래서 직원 사택 중의 한 천막집에 살고 있었다.

이사회를 열었다. 주로 내 얘기래서 나는 자리에서 나왔다. 이사회는 둘로 갈라졌다. 거의 반반이어서 3분지 2는 암만해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이사회에서는 교수들 의견을 들어보자고 했다. 정대위가 교수회 대표로 나와 보고한다. “아직 시국도 안정되지 않았고 장로교 총회관계도 극히 유동적이어서 예측할 수 없으니 당분간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바른 처사라고 만장일치로 합의했습니다한다.

후에 들은 얘기지만 신학교는 양로원이 아니다!” 하고 극언하는 교수도 있었다 한다.

서울 책사들은 다시 모여 박용희[4]부학장으로 밀었다.

박용희 목사는 경기 출신의 항일투사로서 상해 임정에도 깊은 관계를 가졌던 분이다. 일제시대에는 몇 해 동안 자택감금을 당했었고 장대한 체구의 잘난인물이었다. 젊어서는 장사(壯士)라는 타이틀이 붙은 힘세고 날쌘 분이었다 한다. 평양신학도 나오지 않았고, 자습과 이력으로 목사직을 얻은 분이다. 그러므로 신학의 줄거리는 없다고 하겠다. 목포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그는 서울 분들에게 말했다.

나는 신학에 생소하고 정통이니 이단이니 하는 분간도 모르는 사람인데 왜 나를 부학장으로 미느냐? 그리고 부학장이 된다면 내가 할 일은 무어냐?”

 

그들은 터놓고 말한다.

“‘한신에서 김재준을 파면시키고 한국신학대학을 서울 사람들 손에 넣는 일입니다.”

 

박용희는 즉석에서 거부했다.

김재준에게 파면당할 죄과도 없고 내게 파면시킬 능력도 없소. 그리고 한국신학대학은 이미 장로교 총회의 교직자 양성기관으로 인준된 공기인데 서울 사람만의 독무대가 될 수는 없소.”

 

나는 가오하며 퇴장했다는 것이다.

그는, 아직도 동란 중에 있는 목포를 향해 혼자서 훨훨 떠나는 것이었다.

 

떠나기 전에 나를 만났다. 나는 만류했다. 기어코 떠난다. 나는 여비로 금일봉을 드렸다. 멀리까지 전송했다. 길을 가면서 하신 얘기가 위에 적은 내용의 것이다.

 

서울 분들은 함태영을 물고 늘어졌다. 함태영 학장이 실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권에 민감한 서울 토백이 중견 목사들로서는 그럴만도 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원래 내가 용정에서 서울에 오기 전에 그들은 서울신학원이라는 무허가 강습소를 시작했었다. 최거덕이 원장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에게도 강의를 청하기에 몇 과목 가르쳤다. 김대현 장로에게 신학교 설립과 재단 조성을 처음으로 권한 것도 그들이었다. 내가 김대현 장로의 공식 초빙서를 받고 서울에 도착했을 때, 나를 자기 동지들에게 소개하고 자택에서 환영 디너를 채려준[5] 것도 그이였다. 그러나 나는 서울보다도 전 조선 교회를 상대했기 때문에 그들의 내게 대한 기대는 여의치 않았다. 교수진 짤 때에도 그들은 제외되었다. 신호신학교 졸업만으로는 세계 교회적인 신학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마치 잔치상을 차려놓고 밀려난 주인같이 됐다고 느꼈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당당하게 도전할 지식과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교회 정치의 무대에서 대결하기로 한 것이다. 함태영은 전라도 전주 출신이지만 함북 무산에서 자랐고 13세 때에 서울에 옮겨, 서울 사람으로 인테그레잇했다. 그가 부통령까지 됐다.

이용가치가 있다. 그이를 실권 학장으로 추대하고, 무슨 이유를 붙여, 김재준을 몰아내고 신학교를 자기들 교권 안에 회수하자는 것은 그럴사한[6] 얘기다.

 

신학교는 고장이 서울이고, 기금도 서울서 나왔고, 첫 개강도 서울신학원이라는 자기들 기관이었으니 의례 서울 교권 안에 있어야 한다는 그들의 집념이 노상 경우 없는 발악이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큰 테두리에 작은 것이 들어갈 수는 있어도 작은 테두리에 큰 것이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전필순을 소외하지 않았다. 그를 교수직에 모시지 못한 것은 학력(學力) 때문이오 나의 사감[7]은 아니었다.


[각주]

  1. 유재한(劉載漢, 1901~1963) -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곽안련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용인교회에 출석했다. 그후 무어(S.F. Moor, 모사열) 목사가 설립한 동막교회에 출석하고 장로로 선임되었다. 연동교회에서도 시무장로로 선출된 그는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여 (신사참배로 신학교가 폐교되자) 통신으로 1939년에 졸업했다. 경성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양평동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1960년 제45회 총회에서 총회장이 되었다.
  2. 최거덕(崔巨德, 1907~1990) - 서울 용산 출신으로 이태원에 있는 보광동교회에서 기독교를 접했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대학 종교학과에 진학했다. 귀국하여 평양장로회신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그후, 마포교회에서 설교만 담당하다가 묘동교회(1934~1938)와 안동교회(1938~1946)에서 목회하다가, 1946년 광화문교회의 김종대 목사와 목회지를 바꾸었으며, 광화문교회를 덕수교회로 바꾸어 예배를 드렸다. 피어선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하기도 하였다. 1968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53회 총회에서 총회장이 되었다.
  3. 김종대(金鍾大, 1909~1989) - 전북 무주 출생. 전주신흥학교, 전주성경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후 진안군에 있는 갈현교회를 개척 설립하고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1939년 남원읍교회 청빙으로 전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위임목사가 되었다. 1942년 제31회 총회에서 젊은 나이로 서기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1943년에는 총회 총무로 발탁이 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일제 말기에 창씨개명이나 신사참배 등의 황민화 정책에 부응하여 활동하였으며, 한국전쟁 때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을 환영하는 행사에 참가해 설교를 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경성일본기독교회를 인수하여 광화문교회로 간판을 걸고 목회를 하였다. 후에 안동교회에 시무하고 있던 최거덕 목사와 서로 교환하여 안동교회에서 시무를 하였다. 그후 김종대 목사는 조선신학교 이사장직을 맡으면서 기장 측에서 얼마동안 활동을 하다가 1962년 서울노회 소속인 은광교회로 부임하면서 예장으로 복귀하였다. 1972년 제57회 총회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유신체재를 만나 총회 연합사업 및 사회대책위원장직을 맡으면서 유신반대를 외치던 장청 회원들이 감옥에 갔을 때 석방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강신명 목사와 친분이 두터워 강신명 목사가 서울장로회신학교 교장으로 재직 시 김종대 목사는 이사장으로 함께 일을 하면서 오늘의 서울장신대학교를 만드는 데 초석이 되기도 하였다.
  4. 박용희(朴容羲, 1884~1959) - 광복이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한국신학대학 이사장 등을 역임한 목사. 1908년 이명헌(李明憲) 등과 함께 동양선교회에 가담, 1911년 경기도 용인의 장평리교회에서 원세성(元世性) 등과 함께 농촌선교에 힘썼다. 31운동 때 이승훈, 함태영 등과 만세운동을 모의하기도 하였고, 이후 이상재 등과 제2의 만세운동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상해로 망명하였다. 만주 용정을 거쳐 1921년에 귀국하여 이상재, 윤치호, 박승봉 등이 일으킨 기독교창문사 창립운동에 가담하였다. 1925년 신학교를 졸업하지 않았음에도 특별가결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2년 신흥우의 적극신앙단에도 참여하였으며, 신사참배반대로 옥고를 치렀다(1939-1942). 광복 후에 과도입법정부 입법위원, 기독신민회 초대회장으로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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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그럴사하다 - ‘그럴싸하다의 북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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