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8일 월요일

[범용기 제2권] (54) 교권에 민감한 서울의 중견 목사들과 한국신학대학 - 3년만의 이사회

3년만의 이사회

 

신학교 경상비는 없은 지 오래다. 선생과 직원의 하루 세끼 식사비도 제공하지 못한다. 그래도 어느 한분도 언짢게 생각하는 이가 없다. 자기가 맡은 하느님 일이라고만 믿고 고생을 보람으로 느끼며 산다. 각처에 흩어졌던 서울 목사들이 부산에 모여왔다. “우리에게도 신학교 천막을 사택으로 쓰게 해주시오!” 한다. “우리도 이사인데 왜 김종대에게만 특혜냐?” 하며 걸고드는 분도 있었다. 뻔뻔스럽다고 느꼈다.

 

나는 설명했다.

내가 알기로는 이사회란 학교의 경영책임자다. 예산을 세우고 교수와 직원의 생활비를 담당하고 교사를 짓고, 그것을 보관하며 수리하는 책임을 진다.

우리가 그래도 설립자 김대현 장로님 유지를 받들어 이 난리와 피난 속에서도 학교 문을 닫지 않으려고 피어린 정성을 부어 3년을 하루같이 고생했는데 여러분이 한번 들려, ‘수고한단말 한마디 한 일이 있는가?

미국서 신학박사 학위까지 받고 여기에 온 전경연[1] 교수 같은 이는, 넉넉히 살던 미국에서 극한 선상에 있는 빈궁 속에 기쁜 마음으로 몸을 던졌다. 임신 중의 부인은 영양실조로 유산했다. 전 박사는 하루에 계란 하나씩만 먹게 해 주시면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하고 내게 말한 일이 있었다. 김종대 이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우리와 고생을 같이 했다. 직원과 교수들을 무시로[2] 돕기 위해 직원들 사택이라는 천막 하나 속에 산 것 뿐이다…….”

 

그리고 나는, 전에 이사회에서 정해 준 교수와 직원봉급 액수대로 3년치를 계산하여 지불해 줄 것을 문서로 요구했다. 무던히 큰 액수였다. “지금이라도 이사회에서 이 액수대로 추불(追払)해 주시오!” 한참 말이 없었다. 김춘배[3]가 발언한다.

그래 이걸 당장 내란 말이오?”

 

이미 지나간 일이고, 어쨌든 이렇게 살아남았으니 더 요구하지 않겠오. 그러나 이사회에서는 그런 줄이나 알고 처사해야 하겠길래 하는 말이오.”

 

면괴[4]했었는지 다시는 말이 없었다.

 

그들은 박용희 부학장 안이 여의치 못하게 되자 함태영에게 신학교 재산관리와 운영을 맡기자는 데 역점을 집중시키는 것 같았다. 90노인이 어떻게 그런 실무를 감당하느냐는 여론을 막기 위해서 함태영 직속 젊은 실무자를 선임한다는데 합의했다고 들었다.

위에 전경연 박사 얘기가 언급되었으니 말이지만, 전 박사가 미국에서 돌아오자, 연세대에서 데려가려고 했다. 나는 한신에서 같이 고생하자고 한다.

그는 선택에 고민한다. 하루는 나를 찾아 왔다.

김 박사님, 한신 학장이라는 선입개념을 떠나서, 담담한 한 친구로서, 친구의 처지를 생각하고 충고해 주십시오.”

 

나는 말했다.

연대에 가더라도 연대 신학부 교수로 갈 것인데, 연대 신학부에는 교회 배경이 없습니다. 봉급이며 대우는 났겠지요. 그러나 교회의 신학으로서는 그 수확이 빈약할 것입니다.”

 

한신에 오신다면 대우는 넉넉지 못할 것이고 한참 고생하실 겁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모두 교회로 나가기 때문에 한국 교회의 개혁과 세계적인 발전에는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나는 한신을 택하는 것이 먼 장래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는 그렇게 결단했다. 전 박사는 한번 결단하면 끝까지 지켜가는 성격이다.

지금도 원로 교수로 한신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


[각주]

  1. 전경연(全景淵, 1916~2004) - 일본 도쿄 신학대를 졸업하고 미국 보스턴대 대학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30여년간 한신대 신약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1964년부터 1990년까지 <복음주의 신학총서> 33권을 간행하여 세계 신학의 흐름을 한국에 소개하는 등 한국 신학의 연구 환경을 한층 높였다.
  2. 무시로 일정한 때가 없이 아무 때나
  3. 김춘배 목사는 1943년 장희진 목사의 뒤를 이어 신암교회를 1948년까지 이끌었으며 1948년부터 대한기독교서회 총무로 활동하였다. 1934장로교총회에 올리는 말씀”(1934822일자, 기독신보)으로 여권 문제를 언급하였다가 장로교 총회의 압박으로 1935년 총회 연구위원회에 석명서(釋明書)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4. 면괴하다 남을 마주 대하기가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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