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8일 월요일

[범용기 제2권] (55) 교권에 민감한 서울의 중견 목사들과 한국신학대학 - 포탄껍지 줍기(彈皮回收)

포탄껍지 줍기(彈皮回收)

 

터뜨린 포탄 껍지[1], 탄피를 한군데 모아 놓으면 그것을 배에 실어갈텐데 모으는 임금은 톡톡히 지불한다고 8군에서 광고한다.

신학교에서 그거나 해 보라고 무역상하는 동지 김창준씨가 권한다. 김종대와 정대위가 동조하고 나섰다.

정대위는 신학교 측 대표로 외교에 책임을 진다. 일선 현장에는 김창준과 김종대가 나가게 됐다. 현장에서의 인부 임금이 꽤 많이 들텐데 어디서 그 돈을 선대[2]하나 하고 궁리를 한다.

그때 한양대 김연준[3] 총장이 남부민동에 피난해 살고 있었다. 그는 자그마한 일본식 주택을 사 갖고 산다.

그는 자기가 물주노릇 한다고 자원했다.

나는 정대위, 김창준, 김종대 등과 의논했다. ‘안한다고 설레설레 머리를 흔든다. 이해 관계에서 그 사람을 당해 낼 사람은 없다는 것이었다.

윤보선[4] 씨가 해수욕장 해변가에 피난해 있었다. 우리는 그에게 출자[5]를 교섭하기로 했다. 거기에는 일본 부인이 한 사람 맨드름이[6] 남아서 일본요리점을 열고 도미회’(사시미) 따위를 팔고 있었다. 새빨간 도미를 산대로 바닷물 수조(물통)에 넣어 두고 주문받는대로 산 놈을 잡아 주내여 토막토막 살을 어여서[7] 손님들이 제 손으로 그 살점을 하나하나 떼 내 먹게 한다.

 

우리는 거기서 윤보선 씨를 초청하여 대접하면서 우리 요구를 진술했다.

돈은 탄피를 실을 때 청산할 테니 몇 달 동안만 무이자로 빌려달라고 했다.

그는 승낙했다. 우리는 아까메시’(赤飯)[8]아까다이’(赤鲤)[9]라는 행운의 요리를 즐겼다. 도미 고기도 한 면은 거의 다 뜯어 먹었다. 갑자기 그놈의 도미가 한자나 높게 뛰어 솟는다. 죽은 줄만 알고 맘 놓고 뜯어먹던 우리는 깜짝 놀랐다. 사망에 대한 생명의 항거였다.

나는 일시 숙연해졌다.

 

여러 격전장을 더듬어 거의 두어 달 김창준과 김종대는 수고했다.

넘겨줄 때 받은 돈은 수고한데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헐값이었다.

그래도 그것으로 윤보선 씨 빚을 물고도 몇 달 경상비가 보충됐다.

학교 당국에서는 김창준 씨에게 정중한 감사패를 드렸다.


[각주]

  1. 껍지 - ‘껍질의 방언
  2. 선대 돈을 빌려줄 기일 이전에 미리 꾸어 줌
  3. 김연준(金連俊, 1914~2008) - 해방 이후 한양대학교 총장과 이사장을 역임한 교육자, 작곡가. 함경북도 명천 출신으로 1939년 연희전문을 졸업한 뒤 한양대의 전신인 동아공과학원을 설립했다. 대한일보와 기독교신문을 창간하였다. 1959년부터 1973년까지 15년간 한양대학교 총장을 지냈으며 이후 2007년까지 한양학원 이사장으로 재직하였다. 그는 평생동안 장공 김재준의 인격과 지조와 문필능력을 존경하고 어려운 난세에 김재준이라는 선비를 보호하고 돕는데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4. 윤보선(尹潽善, 1897~1990) - 호는 해위((海葦). 충남 아산에서 윤치소(안동교회 장로)와 이범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촌형으로는 윤치호가 있다. 191518세 때 민영환의 6촌이었던 민영철의 달과 결혼하였고, 1917년 상해로 건너가 신규식을 만난다(신규식이 윤보선에게 바다갈대라는 의미의 해위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미래 지도자의 양성 차원에서 신규식, 신익희 등의 권유로 1921년 영국으로 건너가 우드부룩 칼리지, 옥스퍼드대학, 에든버러 대학 등에서 공부하였다. 해방 이후 한민당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민중일보를 인수해 사장이 되었고, 이승만을 적극 도왔다. 정부 수립 이후에 제2대 서울시장에 발탁되었을 때, 여성신학자 공덕귀와 재혼하였다. 1952부산정치파동때 이승만과 결별하여 야당으로 활동하게 된다. 1960419 혁명 이후에 민주당의 구파의 대표적인 위치에 있던 윤보선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신파인 장면을 총리로 지명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와 대결한 1963년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15만여표 차이로 패배하였고, 그 이후 본격적인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1967, 6대 재통령 선거에서 다시 박정희와 맞붙었지만 115만여표 차이로 패배하였다. 1980서울의 봄때 윤보선은 김영삼, 김대중 두 후보의 단일화를 주선하였으나 실패하고 사실상 정계를 은퇴하였다. 이후 1980년 이후 제5공화국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고, 1987년에 노태우 후보를 지지해 민주화 세력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5. 출자(出資) - 어떤 일에 쓸 자금을 냄
  6. 맨드름하다 - ‘반드레하다의 방언
  7. 어이다 에다(칼 따위로 도려내듯 베다)의 비표준어
  8. 적반(赤飯) - 팥을 넣어 지은 밥
  9. あかだい [だい·赤鯛] - 빨간 도미(참돔ㆍ황돔ㆍ붉돔 등의 총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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