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9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58) 교권에 민감한 서울의 중견 목사들과 한국신학대학 - 각 지교회 분쟁의 거친 물결

각 지교회 분쟁의 거친 물결

 

각 지방노회에서는 총회 결의대로 한신 졸업생이 위임 맡은 지교회를 들쑤셔 불집을 일으킨다. 말없이 목회에 성실한 한신출신 목사들을 재심사한다. 말이 재심사지 사실은 위임취소였다.

예배모임에는 자기편 목사를 보내어 사회하고 설교하게 한다. 청년들은 분개하여 내려오라!’고 고함친다. 안 내려오면 단에 올라가 멱살을 쥐고 끌어내린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저켠에 동조하는 장로와 교인들도 있다. 그래서 예배를 서로 방해한다. 한켠이 기도하면 다른 한켠은 찬송한다.

예배회가 아니라 난장판이다. 이런 것이 한 두 교회만의 실태가 아니었다. 전반적으로 그런 분위기가 퍼진다.

어느 교회에도 두 갈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동노회에는 한신 출신 전도사가 많았다. “강 모”(?)라는 이름의 인간이 노회장이었다.[1] 그는 김재준과 절교한다는 절교장을 공개하는 한신 출신 전도사에게만 목사 위임을 허락한다고 했다.

대부분의 한신 출신은 그대로 했다. 그리고 목사가 됐다. 그러나 정용철[2] 목사는 노회로서의 재심사도 절교장운운하는 처사도 단연 거부했다. 그래서 그는 설교권 정지 처분을 받았다. 2년간 근신이란 징계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의 신임은 두터웠기 때문에 목사 사택에 그대로 있고 생활비도 교회에서 담당해 주는 것이었다.

같은 한신 출신으로 강점순 전도사가 설교와 목회를 담당했다.

그는 한신에서 졸업할 때, 설교상을 탄 사람이다.[3] 교회로서는 강 전도사의 강단 메시지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용철이 징계에서 풀렸을 때, 그는 교회를 그만두고 결혼해서 지금 가정부인으로 강원도 어디서 교회를 도우며 행복하게 지낸다고 들었다. 최근 소식은 모른다.


[각주]

  1. 1953년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동노회의 노회장은 강인구 목사(1908~1996)이다. 경북 영주시에서 강석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의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50년부터 3년간 계성학교의 법인이사를 지냈으며 그후 1954년 계명대학교 설립자로서 오랜 기간 재직하며 학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625 전쟁 후 1955년 대구서남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다가 1960년 은퇴했다.
  2. 정용철(1918~2018) - 경북 영양군에서 정주부 목사의 아들로 출생했다. 일본 동경신학대학과 청산학원을 거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목회학을 공부했다. 포항 흥해제일교회, 서울 신암교회와 워싱턴 한인연합장로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한 후 1983년에 은퇴했다. 찬송가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218),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597)을 작사하였다.
  3. 강점순 전도사는 1949년 제8회 졸업생 명단에 올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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