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8일 월요일

[범용기 제2권] (57) 교권에 민감한 서울의 중견 목사들과 한국신학대학 - 속개된 대구 총회에서

속개된 대구 총회에서

 

1951년 총회는 대구에서 속개됐다.

김재준 사건을 위임맡은 임원회에서는 부산총회 때의 처리안 그대로를 통과시켰다. (144~147쪽 참조)

 

38선이 생기기 전, 이북 노회 총대 수 그대로의 이북 총대원이 정회원으로 자리를 차지했다. 전 총회원 수의 3분의 2가 갑작스레 늘었다. 그들은 은혜갚음으로라도 미국 선교사들과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총회원의 절대 다수가 저켠이었으니 김재준 처단은 일사천리로 가결됐다. 대구의 젊은 목사 박병훈[1]이 장장 2시간에 걸친 고소 이유를 낭독했다 한.

일제말기, 전영택[2] 목사가 서울에서 새사람이란 월간지를 간행할 때, 나는 간도 용정에 있었다. 전영택 목사로부터 원고청탁이 왔다. 나는 정통이라는 이단이라는 제목의 엣세이를 발표했다.[3]

 

박병훈은 주로 그 논문을 들고 나와 나를 고발하더라는 것이었다.

경기노회 부총대였던 강원용은 수석총대 전필순의 양해하에 역시 2시간 이상 김재준 변호연설을 했다. 세계 교회와 세계 신학 사조의 방향을 곁들여 한국 장로 교회의 맹점[4]을 통박했다. 그러나 총회로서는 기정방침[5]이어서 이론을 초월한 독재로 일관됐다.

총회로서의 거듭하는 불법에 항거하는 총대원들은 절대 소수로 몰려 설자리가 없어졌다. 그들은 퇴장했다. 김세열, 이남규, 박재석, 김종대 등 백전노장들도 퇴장했다. 전라도 장로 교회들은 거의 전부가 혁신[6] 측이었다. 경상도는 보수 일색이랄 수 있겠고 경기 충청은 반 정도였다.


[각주]

  1. 박병훈 목사는 1938년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59년 예장 통합과 합동이 분열할 때 에큐메니칼을 반대하는 박형룡, 황은균, 정규오 등과 함께하였다. 1962년 예장 합동에서 국제기독교연합회(ICCC)와의 우호관계를 끊으려고 하자 ICCC를 지지하는 박병훈 목사를 중심으로 1962년 독립하여 예장 호헌교단을 세웠다. 이 호헌 교단은 교리적으로 보수적이었으며 사회적으로는 극우 운동을 전개하였다. 1966, 박병훈 목사의 교단 대표직 연임 문제로 분열되어 신임 총회장 송재묵이 총회를 탈퇴하여 예장환원되었는데 ICCC가 송재묵 총회장을 지지하여 예장 호헌교단은 ICCC의 지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979년 소장파 목사들과 박병훈 등 원로목사의 갈등으로 또 한차례 분열을 겪었다. 이러한 분열 과정 속에서 타교단으로 흡수되는 과정을 겪었고, 일부 파벌은 2010년대 초 합동측과 재결합 논의가 성사되어 합동교단으로 복귀하였다.
  2. 전영택(田榮澤, 1894~1963) - 목사, 소설가, 호는 늘봄(그가 창조 창간호에 장춘(長春)이란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한 바 있는데 이것이 후에 늘봄이란 호로 쓰였다), 추호(秋湖), 불수레. 평양 사창골(社倉谷)에서 전석영의 3남으로 출생. 1910년 평양 대성중학교를 3년 수료한 뒤 진남포 삼숭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2년 도일하여 토오쿄오 아오야마(靑山)학원 고등부 문과를 거쳐 동대한 문학부에 입학, 1918년 동교를 졸업했다. 이어 그해 동대학 신학부에 편입하면서 김동인, 주요한, 김환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순문예지 <창조>의 동인으로 참가했다. 이듬해 2월에 창간된 창간호에 처녀작 <혜선(惠善)의 사()>를 발표하였다. 그해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토오쿄오에서 먼저 진행된 유학생 독립선언에 참여하였고 곧 귀국하여 채혜수(蔡惠秀)와 결혼하였다. 1921년 아오야마학원 신학부에 복교하여 이듬해 졸업하였고, 곧 서울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1927년 아현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1930년에는 미국에 유학을 하여 퍼시픽신학교에 입학했다. 미국에서 흥사단에 가입, 독립운동에도 헌신했으며 1932년 퍼시픽신학교를 수료, 귀국하였다. 곧 기독교 문서사업에 뜻을 두어 교계 잡지 <새사람>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이용도ㆍ이호빈 목사 등의 예수교회 운동에도 크게 관여했고 그 기관지 <예수>의 편집, 발행을 돕기도 했다. 일제말기에는 평양근교에 은거하면서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1945년 조선민주자 문교부장, 1946년 미군정 문교부 편수관, 1947년 국립맹아학교장, 1948년 중앙신학교 교수, 1952년 토오쿄오 <한국복음신보> 주간, 1954년 대한기독교서회 편집국장 등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정계ㆍ관계ㆍ교육계ㆍ언론계ㆍ출판계 등에서 다양한 활동을 폈다.
    1961년에 한국 문인협회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고 단편 금붕어로 서울시 문화상(문학부문)을 수상했으며 1963년 대한민국 문화포상 대통령장을 수상했고 이후 기독교 계명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1968116일 교통사고로 별세했다.
  3. 장공전집에서 장공이 새사람에 발표한 글은 총 세 편인데, 그 중에서 정통과 이단에 관한 내용을 다룬 글은 교리와 신앙 전통의 陶醉”(새사람, 194612)이다. 아마도 박병훈 목사는 이 글을 근거로 김재준 목사를 공격했을 것이다.
  4. 맹점(盲點) - 어떠한 일에 주의가 미치지 못하여 모르고 지나친 잘못된 점
  5. 기정방침(旣定方針) - 일을 처리하는 데 이미 결정되어 있는 방향이나 계획
  6. 혁신(革新) - 낡은 것을 바꾸거나 고쳐서 아주 새롭게 함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