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9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65) 환도와 재건 1953~1958 - 환도

환도

 

195252휴전 회담에서, 포로 교환 이외의 항목은 모두 합의되었다.

우리는 회담이 시작될 때부터 환도준비를 서둘고 있었다.

김세열, 이남규, 함태영 등 한신 켠 원로 목사들도 환도에 동의했다.

스캍 박사도 동의했다. 스캍 박사는 한신 이사회에서 한신 정교수로 선임하여 이사회가 주최로 취임식까지 지낸 동역자다. 말하자면 선교사가 아니라, 동역 목사요 교수였다.

 

우리도 하루 속히 환도하기로 했다. 나는 식구들과 함께 허주레한 보따리 몇 개를 꾸려 들고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역시 입성 금지였으나 얼마 문답한 다음에 허락되었다. 동자동에 왔다. 사람의 키를 훨씬 넘는 쑥밭으로 변했다던 교정도 원상으로 복구돼 있었다.

 

쓰레기통으로 변했던 기숙사 우물을 쳐냈다. 며칠 후에는 맑고 시원한 샘물이 고였다. 인민군들이 거기다가 시체를 쳐 넣었다는 소문도 돌았었지만 그런 흔적은 없었다.

 

이승만 박사는 지금도 휴전 반대 데모를 열심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삼청동과 효자동 막치기와 계동과 재동은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나머지 서울 판은 문자 그대로 초토였다. 불에 타서 부실부실한 흙이 아니면 기왓장, 벽돌 등속의 파편 덮인 벌판이었다. 아내와 나는 진고개 가본다고 떠났다. 진고개는 없었다. 명동성당이 전에 모습으로 언덕 위에 세운 성같이 돋보였기에 그 옆을 더듬어 진고개 5정목께로 갔다. 역시 기왓장과 벽돌 벌판이었다. 나는 힘만 있다면 저 부러진 벽돌들을 실어다가 625기념관을 짓고 싶다고 생각했다.

 

동자동 한신 캠퍼스는 난리 겪은 건물로서는 그래도 괜찮은 축이었다. 우리 집도 다 없어지지는 않았다. 부서진 창문에 널판지라도 붙여야 밤중의 냉기를 막을 수 있겠기에 버려진 널판지 조각들을 여기저기 붙이기 시작했다. 당장 순경이 찾아와서 가옥 수리 허가를 받았느냐?”고 묻는다. 못 맡았다니까, “안되오. 법대로 안하면 고발하겠소!” 하고 덜렁댄다. 큰 법은 꿀꺽하고 새새한 말단 규정에는 까다롭게 군다.

 

기분이 나빴다. “깔따귀[1]는 걸러 먹고 약대는 통째로 삼킨다[2]는 예수의 말씀이 연상됐다.

 

책은 다 없어지고 기구도 불쑤시개[3]로 날아났고 그야말로 빈집이었다.

 

나는 본격적인 재건을 꿈꾸고 있었다.

동자동 캠퍼스는 싫어졌다. 우선 판국[4]이 좁고, 바로 정거장 옆이라, 기차 소리, 자동차 소리, 밤새도록 소음의 회오리 바람이다.


[각주]

  1. 깔따귀 - ‘하루살이의 방언
  2.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 도다”(23:23, 개역개정).
  3. 불쑤시개 - ‘부손’(화로에 꽂아 두고 쓰는 작은 부삽)의 방언
  4. 판국 일이 벌어져 있는 형편이나 국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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