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리 집
나는 환도 후에도 신학교육의 부단한 개혁과 기장 교회 창설과 육성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러나 박정희 쿠데타가 일단 성공되자 군부의 지령에 따라 퇴직했다.
당장 거처할 데가 없었지만 다행히도 수유리 하천 부지에 어떤 건축회사에서 숱한 간이주택을 짓고 입주금 얼마를 내면 우선 들어가도록 된 데가 있었다. 그래서 그리로 이사했다. 나머지 돈은 달마다 나누어 문다.
학교는 빈손으로 나왔으니 식구 살릴 도리도 없다. 주변성이 없으니 돈이 갈다귀[1]처럼 공중을 날아다닌 대도 그걸 후리질[2] 할 용기가 없다.
집터는 82평이라지만 건평은 14평밖에 안 된다. 마당은 비교적 넓은 셈이다.
나는 건넌방 좁디좁은 서재, 잡다한 책들의 ‘밀림’ 속에 앉아 있다. 여러 신문, 잡지사에서 글 부탁이 오면 간단한 잡문을 써 보낸다. 고료는 톡톡히 보내준다. 약혼식, 결혼식 주례 부탁도 심심찮게 잦다. 의례 택시로 모셔다가 모셔오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면 신랑ㆍ신부가 선물 들고 찾아와 큰 절하고.
그것도 ‘낙’이라면 ‘낙’이겠다. 첫 애기 나면 작명(作名) 부탁이 온다. 일생 부를 이름이라, 수월찮은 ‘창작’이다.
[각주]
- 하루살이
- 후리질 – 후릿그물을 써서 물고기를 잡은 일. 갖은 방법으로 사람을 홀려 휘어잡는 짓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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