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9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72) 재건의 행진곡 - 휴전과 재건

휴전과 재건

 

195368일 판문점에서 포로 교환 협정이 조인되고 1953727일에 판문점에서 국련군 최고 사령관[1]과 조선인민군 최고 사령관[2]과 중국 인민의용군 사령관[3] 사이에 휴전 협정이 조인되었다. 이제는 이북의 재침(再侵)이 있을 수 없게 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협정을 부인하고 여전히 북진 통일을 고집한다. 휴전 반대 데모가 거리에 급류(急流)[4]한다.

 

인민군에게 쫓겨서 유랑(流浪) 정부를 끌고 이리저리 옮겨다닌 이승만으로서는 멘즈’(体面)를 세우기 위해서라도 격서봐야 할 것이었다.

 

어쨌든, 휴전은 됐다. 이제부터는 건설이다.

 

교회도 재건해야 한다. ‘한신도 재건해야 한다.

 

1954년엔가, 캐나다연합교회 외지선교부 총무 갈리하가 내방했다.[6] 동자동 찌그러진 방에서 우리는 한신재건에 대하여 의논했다. 그는 현장에서 교사 건축비로 만 달러를 내놓는다.

 

우리는 캠퍼스 후보지를 찾아 돌아다녔다. 스캍 박사도 같이 다닌다. 이사장 김종대가 제일 열심이었다.

함태영 부통령도 열심이었다. ‘옹은 금호동 골짜기 마진편 산, 시유지 약 3만평을 시청에서 대부할 작정이었다. 나와 스캍 박사도 같이 갔다.

거기는 피난민들이 마구 들어와 밤새에 하꼬방’(바락크)[7] 대여섯씩 짓고 주저앉은 고장이었다. 아무도 그들을 철거시킬 재주는 없다. 교회 기관이면 더 얕보고 덤벼든다. 산도 가파라와서 캠퍼스 만들 고장이 못 될 성 싶었다. 스캍 박사는 더 거들떠보지도 않고 돌아갈 차비를 차린다.

 

다음으로는 왕세자의 첫 애기 무덤 있는 데를 봤다. 이 왕실 재산이어서 더 까다로웠다.

혜화동 카톨릭 신학교 뒷 언덕을 봤다. 카톨릭 재단에서 대부한다면 몰라도 우리에게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성균관대학교 뒷 언덕을 봤다. 땅은 넓다. 그러나 역시 성균관대학교 연고지여서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간 데마다 내가 머리를 가로흔들게 돼서 죄송스러웠다.

 

그러는 동안에 김종대는 수유리 화계사 입구 언덕과 화계사 주봉(主峰)[8]인 뒷산과 산 넘어 저쪽 평지까지 약 10만평짜리 기지를 발견했다. 일인들이 고급주택 후보지로 입수했다가 버리고 간 귀속재산[9]이다.

한 평에 그때 돈 78전씩인가 주고 불하까지 했다. 공간감도 있고 전망도 좋았다. 다 자란 솔숲이 우거져 있었다. 일본 비파호 오오미(近江) 형제 단원으로, 양심적인 건축기사인 강윤[10] 씨에게 설계를 부탁했다. 언덕이 길게 뻗쳤으니 집도 이층으로 언덕 길이에 맞춰 길게 지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하얀 빛깔이면 좋겠다고 한다.

사철 푸른 송림 속에 하얀 집이 선다.

폐허 속 재건의 첫 심볼이 될 것이었다.

강윤 씨도 설계비도 받지 않았다.

공사감독은 건축가 김중업[11] 씨가 맡았다.

학교측 총감독이 선정돼야 한다.

 

동자동에서 이사회가 모였다.

부통령인 함태영 옹이 학장이고, 김재준은 부학장이라는 임직이 공고됐다.

이사장은 김종대 대신에 박용희 옹이 선임됐다.

김종대는 뼈빠지게 일하고 일이 되자 물러가는 셈이었다. 말하자면 공성신퇴’(攻城身退)[12]. 몹시 섭섭했던 모양이다.

잘덜 해 보시오하고 어디론가 나갔다. 그러나 실행이사원의 하나로는 남아 있었다.

 

함태영은 연로하여 실무를 총괄하기 어려웠다.

그는 학교 재정과 재단 관리는 내가 한다”, “나를 대신할 실무자로서는 조선출을 쓴다”, “김재준은 부학장으로 교육 책임만 진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조선출이 학감교감으로 임명됐다.

나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교육이 내 본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감으로서의 조선출인 경우에는 그가 돌리는 결재서류에 내 도장이 찍혀야 한다.

 

학교 측 공사 총감독을 뽑기 위해 실행이사회가 모였다. 당시의 이사장은 박용희 목사였다. 조선출은 자기가 교감이니 딴 감독이 필요없다고 한다. 그러나 일인양역(一人兩役)[13]은 어렵다는 것이 이사회의 의견이었다. 나는 장희진을 추천했다. 옥신각신 논란이 많았다. 그러나 결국 장희진으로 낙착[14]됐다.

 

장희진은 재빨리 소용 될 목재들을 계산하여 인천의 대성목재소에서 증기 간조[15]를 마치고 실어다가 교정에 가로세로 쌓아놓았다.

덕분에, 거의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문틀이나 문설주 하나 찌그러지는 일이 없다.

 

유리도 최태섭[16] 사장의 호의로 인천 판유리 공장에서 싸게 사들였다.

다음해 12, 학교 교사만은 언덕 위에 선 산성같이 덩그렇게[17] 돋보인다. 그러나 허울뿐이오 속에는 아무 것도 없다. 가구도, 책상도, 의자도 없다. 도서실에 책도 몇 천 권을 간직할 수 있는데 거의 빈 서가다.

 

캐나다 선교사로 종교교육을 전공한 미스 로오즈란 할머니가 우리 학교에서 종교교육 과목을 담당했다. 그가 안식년에 귀국하여 친구들을 찾아, 예배실 의자를 마련했다. 한 사람이 의자 한 개씩 기부하라 했단다. 그리하면 그 의자에는 기부한 분의 이름판을 박아, 영구 기념한다고 권했다.

그래서 어렵잖게 의자가 장치됐다.

 

동자동 기지와 건물은 감리교 배재학당 재단에 팔았다. 우리는 그것으로 기숙사와 교직원 사택을 짓기로 했다.

 

수유리에서의 한신 재건 작업도 그럭저럭 3년의 휴식 없는 강행군이었다. 아직 사택 시설은 없었지만, 캠퍼스는 지켜야 한다.

학교 대문 안 개천가에 옛날 빈농이 살던 오막살이 초가집 한 채가 있었다. 나와 내 식구는 그 집에 옮겨 들었다.

 

단칸방에 장판은 있으나 불은 안 든다. 천정에는 쇠줄을 늘이고 신문지를 쇠줄에 감아 붙였다. 군데군데 찢어져 신문지가 너덜너덜 내리 달렸다. 천정 속은 쥐의 왕국이었다. 수 없는 쥐들이 밤이면 운동회를 연다. 뛴다 쫓긴다. 짹짹거리며 소란을 피운다.

나뭇가지 네 개를 네모꼴로 땅에 박고, 거적대기를 반쯤 허리에 둘른 것이 변소다. 멀찌감치 저쪽 구석쟁이에 있다.

나는 숙환인 대장염 이질[18]에 걸렸다. 백리(白痢)[19]로 시작하여 적리(赤痢)[20]로 번진다. 배를 꼬지꼬지[21] 비틀어 짜내는 내 기름이다. 점점 도수가 잦아진다. 죽을 지경이었다.

 

서대문 밖 적십자병원 내과 과정으로 있는 내 조카 하용 박사가 앰뷸런스를 갖고 와서 당장 싣고 병원에 간다. 특별실 독방에 입원시킨다. ‘데라마이싱인가를 흠뻑 먹인다. 위도 결정적으로 파업(Strike)한다. 영양주사로 연명한다.

달 반 지냈다. 그 동안에 꽃다발 갖고 위문 오는 친구가 수 없이 많았다. 이질은 없어졌다.

 

그런데 하루는 위가 빳빳해지고 아파서 기절할 지경이 된다. 나는 침대 머리를 거머쥐고 몸을 비틀며 신음했다. 엉엉 고함치며 딩군다. 휠체어에 담겨 X-Ray실에 갔다. 여러 가지 포오즈로 일곱 장인가 찍었다. 다 괜찮은데 한 장만이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유문[22]어귀[23]에 돌출물이 있다는 것이다.

의사들의 종합 진단이 있었다. 다시 찍어도 마찬가지다. ‘으로 밖에 볼 수 없는데 다른 사진들이 암 환자의 그것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 소문이 들리자 자녀들이 달려왔다. 그때 상철도 서울에 있었다. 상철, 혜원, 신 의사, 정자 등등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갖고 왔다

강형룡 의사가 주동이 되어 시내 각 병원 외과 의사들을 불러 재확인하고 수술하기로 했단다.

나에게 통고하는 책임은 강 의사가 담당했다.

 

강 의사는 내 옆에 와서 솔직하게 말한다.

암인 것 같은데, 그래도 초기니까 지금 수술하면 별문제 없을 겁니다. 집도는 각 병원 유명한 전문의들이 공동으로 하게 됐습니다…….”

 

웬일인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남의 일 같이 대답한다.

그래, 좋을 대로 하게나!”

 

후일에 들은 얘기지만, 강 의사는 나의 너무 담담한 태도에 놀랐노라고 하더란다. 천성이 그렇게 돼 먹었으니까 그러했던 것뿐이다.

 

이 일이 있는 다음날엔가, 나는 멀쩡하게 됐다. 위가 아픈 증세도 없어졌다. 미음, 잣죽 따위를 조금씩 먹어도 별일 없었다.

 

이우정의 집이 거기서 가까운 적선동이었기에 어머니가 끓여주는 잣죽을 식을세라 싸들고 끼니 때 마다 온다.

 

아이들은 엄마에게는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하용의사의 숙부라는 관계 때문에 입원비와 약값 그 밖의 모든 비용은 전액 면제라 했다. ‘동업자 윤리에서의 호의였다.

나는 하용에게 금일봉을 주며 하루 의사들을 술좌석에 초대하여 감사의 뜻을 표하라 했다.

 

입원 중에 밤낮 나를 간호하고 병실 안살림을 총괄하고 방문객들을 대해준 분은 김해순 여사였다. 수석 간호원이었다. 지금은 안희국[24] 교수의 부인으로 농촌 사업에 협조하고 있다.

 

두 달 만에 퇴원했다. ‘하용은 서울대학병원 X-Ray 전문의인 박사님의 사설개업 진찰실에 들러 다시 검사해 달라고 했다.

그는 관장[25]하고 흰 횃가루[26] 물을 먹이고 일곱 장의 사진을 찍었다. 투시할 때부터 하용의사가 같이 참여했다.

결과는 아무 이상 없다로 끝났다. 문제의 한 장도 이제는 아주 사그러져서 흔적이 없다고 했다. 의사는 생사람 배를 가를 뻔 했구먼!” 하고 웃는다.

나는 집에 왔다. 다리가 휘청거려서 몸이 균형을 잃는다. 집에는 애기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식구가 하나 는 셈이다.

 

고양이가 들어오자 쥐들은 총퇴진 했다. 고양이 냄새만으로도 쥐는 못 견디는 것 같았다.


[각주]

  1. 마크 웨인 클라크(Mark Wayne Clark, 1896-1984)
  2. 김일성(金日成, 1912~1994)
  3. 펑더화이(彭德怀, 1898~1974)
  4. 급류(急流) - 물살이 급한 강물이나 냇물, 빠르고 거세게 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5. 멘쯔(面子) - 중국과 중국인을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말로는 체면으로 번역할 수 있다.
  6. 윌리엄 스코트에 의하면 1955324일부터 29일까지 캐나다 연합교회 총회장 어니스트 롱(Ernest E. Long) 박사는 해외선교국장인 데이비드 겔러 박사(Dr. David Gallagher)와 동행하여 대표단을 이끌고 한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윌리엄 스코트, 연규홍 옮김,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 한국기독교장로회 출판사, 2009, 396.
  7. 하꼬방 판잣집(판자로 허술하게 지은 집)
  8. 주봉(主峰) - 이어진 산줄기 가운데 가장 높은 봉우리
  9. 귀속재산(歸屬財産) - 법률이나 계약에 의하여 어떤 사람이나 어느 주체에 귀속된 재산
  10. 강윤(姜沇, 1899~1975) - 대한민국 건축가.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공주 영명학교(지금의 공주영명고등학교)를 다녔다. 31운동으로 6개월 옥살이를 하였다. 영명학교 교장인 프랭크 윌리엄의 소개로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건축가 윌리엄 메렐 보리스의 건축사무소에서 일을 했다. 간사이 공학 전수학교(関西工学専修学校, 지금의 오사카 공업대학) 건축과에서 수학했다. 이후 보리스 건축사무소 경성출장소의 주임을 맡아 한국 내에서 건축 활동을 하였다. 설계 작품으로는 남산교회당, 태화기독교사회관, 대천 외국인선교사 수양관 등이 있다. 독립운동 공훈으로 200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고 2006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11. 김중업(金重業, 1922~1988) - 평양 진향리 태생. 1928년 경림보통학교 입학, 19393월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 1939년 일본 요코하마 고공(橫浜高工) 건축과에 입학 나카무라 준페이(中村順平)를 사사, 194112월 졸업했고, 학교 선배인 사카모토 토시오의 소개로 19421월부터 1944년까지 마츠타히라타설계(松田平田設計)에서 근무했다. 1942512일 평양에서 김병례(평양서문여고 졸)와 결혼 후 다시 일본에서 생활하다가 19444월 귀국하였다. 해방 후 1949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조교수가 되었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린 국제예술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가 프랑스에서 르코르뷔지에 아틀리에를 방문, 견습생으로 시작해서 정직원이 되어 1956년까지 일했다. 귀국과 함께 김중업 건축연구소를 설립, 후진양성에 힘쓰는 한편 개인전을 가졌다. 홍익대학교에서 교수로 있었고 건축 도시계획연구소의 초대소장이 된다. 주한프랑스대사관, 올림픽공원 상징조형물 등을 신축했으며, 성북구 장위동에 김중업건축문화의집이 있다.
  12. 공성신퇴(攻城身退) - 공을 이루고 난 뒤 물러나다
  13. 일인양역(一人兩役) - ‘일인이역의 북한어
  14. 낙착(落着) - 일이 어떻게 하기로 최종적으로 결말이 남
  15. 간조 - ‘건조의 원말
  16. 최태섭(崔泰涉, 1910~1998) - 1910년 평북정주에서 태어나 오산고보를 수료하고 월남한 뒤 57'유리가 전후 복구를 위한 경제재건에 꼭 필요한 물품' 이라는 생각에 동향출신인 이봉수 (李奉守) 한국유리 현회장 등과 공동으로 유엔한국부흥기구(UNKRA) 로부터 유리공장을 불하받아 한국유리공업을 설립했다. 회장은 이후 유리 한 업종만 파면서 이 회사를 세계 10대 유리전문회사로 성장시키고 국내 유리산업을 기간산업으로 발전시켰으며 96년에는 6개 관련 계열사를 거느린 한글라스 그룹을 출범시켰다.
  17. 덩그렇다 높이 솟아서 우뚝하다
  18. 이질(痢疾) - 법정 전염병의 하나로, 배가 아프고 변에 곱과 피가 섞여 나오며 뒤가 잦은 병
  19. 백리(白痢) - 이질의 하나. 흰 곱똥이나 고름 섞인 대변이 나온다.
  20. 적리(赤痢) - 법정 전염병의 하나. 발열, 복통, 혈액이 섞인 설사를 일으키는 병으로 여름철에 특히 많다. 세균이 입을 통하여 전염된다.
  21. 꼬지꼬지 빈틈이 없이 매우 빽빽한 모양을 나타내는 말
  22. 유문(幽門) - 위와 십이지장까지 연결 부분을 둘러싸고 있는 점막과 근조직
  23. 어귀 드나드는 목의 첫머리
  24. 안희국(安熙國) 교수는 함북 경흥에서 출생하였다. 17세에 서울로 올라와 피어선 성경학교에서 공부를 하였다. 이때 김재준 목사가 미국을 갈 준비차 서울에 체류하던 중 피어선에서 창세기를 가르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성경비평학에 눈을 뜨게 되었고, 김재준 목사에게 영어를 배웠다. 우여곡절 끝에 일본 청산학원에 조건부 입학을 하게 되었는데 졸업할 때에는 최우수 논문상을 받았다. 귀국하여 송창근 목사의 권유로 평양 장대현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1940년 조선신학교로 부름을 받게 된 김재준 목사의 후임으로 간도 용정의 은진중학교 교사로 부임하게 된다(이 시기 안희국 교수에게 배운 학생으로 안병무, 이상철, 이종명 등이 있다). 이후 폐결핵으로 주을(朱乙) 온천에서 요양하였다(폐결핵 덕분에 일본 경찰의 체포에서 벗어나기도 하였다). 1948년 청진서 개교를 한 함북신학원 원장인 문준희 목사(조선신학교 제1회 졸업, 625 때 피살)이 함북신학원에서 신학교육을 하자는 제안을 해서 청진으로 가서 역전교회를 맡아 목회를 하면서 신학원의 일을 625 때까지 볼 수 있었다. 북한군의 눈을 피해 숨어있던 안희국 교수는 문준희 목사와 만나서 UN군사령부로 가려고 약속하였으나, 문준희 목사는 청진에 두고 온 딸을 보러 간다는 전갈을 남기고 떠났다. 주을에 있는 UN군 사단본부에서 최혁주 목사를 만나게 되고, 피난민 대열에 끼어 성진을 거쳐 흥남을 거쳐 19501213일 부산에 도착했다. 이후 19513월 개학기부터 부산으로 옮긴 한국신학대학에서 강의하며 부산에서 만난 함북신학원생들인 김익선, 박용산, 신창윤, 김풍전 등을 한신대에 편입시켜 공부하게 하였다. 19535, 한신대가 서울로 복귀했을 때 서울에서 함북, 만주지방 출신 교우들을 중심으로 산성교회를 시작했다가 최문환 목사가 서울로 왔을 때 교회를 최문환 목사에게 맡기고 신학교에서 교육에 전념하게 된다(산성교회는 유락교회와 합해서 오늘의 한일교회를 이루게 되었다).
  25. 관장(灌腸) - 약물을 항문에 넣어서 장에 들어가게 하는 일. 대변을 보게 하거나 병의 치료, 영양 공급 등이 목적이다.
  26. 횃가루 - ‘횟가루’(석회석을 고온으로 가열하여 얻는 흰색의가루)의 방언
  27. 중춤 민속 무용의 하나, 승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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