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9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74) 캐나다연합교회와의 유대와 그 조건 1954~1955 - 캐나다연합교회와의 유대와 그 조건의 成文化

캐나다연합교회와의 유대와 그 조건의 成文化

 

캐나다연합교회는 해방 전 선교 구역이 함경도와 간도였다는 점과 신학적으로 자유의 전통을 전승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스캍 박사와 김재준이 동지적인 친분을 갖고 있었다는 등등의 인연 때문에 한신과는 가까운 처지였다. 한국 장로교 총회에서 김재준을 파직시킨 것도 캐나다연합교회의 입장에서 본다면, 있을 수 없는 종교탄압이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 남ㆍ북 장로교 선교사가 절대 다수였던, 한국선교사협의회에서는 스캍 박사도 성서문자무오설을 부인한다는 이유로 징계 처분에 붙였다.

 

캐나다연합교회 총회에서는 격분했다.

스캍 박사는 캐나다연합교회 정회원이니만큼 심사하든, 징계하든 우리가 할 것이오. 선교사협의회는 일종의 친선그룹인데 어떻게 그런 행정적인 월권 행위를 할 수 있소?”

킹슬러가 고발했던 모양인데 사과비슷한 어색한 답변으로 급한 고비를 넘겼다고 들었다.

김재준에 대한 캐나다연합교회의 동정과 협력은 그 농도가 짙어갔다. ‘기장 총회와의 유대 관계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파직된 김재준이 총회와 타협하든지, 총회에 굴종하든지 하지 않는 한, 그와 장로교 총회와의 우호 관계는 모색할 여백이 없게 됐다.

캐나다연합교회는 지금까지 비공식으로 협력해 왔지만, 이제부터는 기장과의 공식적인 자매 관계를 맺으려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그래서 여러 방면으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1954년에 캐나다연합교회에서는 선교부 총무 갈리하박사와 총회 총무 스트롱박사를 한국에 파견하였다. 그들은 광범위한 여론조사와 내부적인 정확한 실상을 파악할 목적으로 재료수집에 착수했다.[1]

그들은 각 교파 지도자들, 사회 인사, 이북 특히 함경도와 간도에서 남하한 교회 인사들, 그리고 각 교파 선교사들과도 대담했다.

이 일은 우리에게 알리지 않은, 그들의 비밀 행동이었다.

 

우리도 그들이 한국에 와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모른 바 아니었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면담을 청할 때까지는 모르는 체 했다.

맨 마감에 그들은 우리를 만나자고 한다. 만났다. 우리는 다만 그들이 우리와 신앙 양심을 같이 하는 동지요 친구라는 입장에서 감사의 뜻을 표했을 뿐, 아무 요구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어떤 안건에 대하여 우리의 견해를 요청했을 때 우리 의사와 소견을 말했을 뿐이었다.

1년이 지난 1955년에사 캐나다연합교회 총회가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와 협력하기로 결정했다는 통고를 보내왔다.

 

이제는 어떤 방식으로 협동(協同)하느냐 하는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게 됐다. 말하자면 ‘workshop’이다.

 

기장총회와 캐나다연합교회 총회와의 동수의 대표를 선출하여 공동연구위원회를 구성했다. 기장 총회에서는 김재준 외 몇 사람, 캐나다연합교회 총회에서는 미스 Thomas 외 몇 사람이 위원이었다.

우리는 십여 회에 걸친 끈질긴 토의 끝에 대략 아래와 같은 원칙에 합의했다.

 

한국 안에 캐나다선교부라는 이름의 독자적인 선교사 단체를 두지 않는다.

선교사는 한국 교회 총회의 협동교직자(Co-Worker)로서 한국 총회에 등록한다.

협동교직자는 한국 총회 준회원으로 발언권은 있으나 선거권은 없다.

선교사의 임지와 임지 등은 총회 인사국에서 토의 결정한다.

선교비는 총회에서 직접 받아 총회 예산에 편입한다. , ‘선교사들의 봉급과 사생활 비용은 총회에서 관여하지 않는다.

선교사는 수요지 총회의 요청에 의하여 파송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한국 총회에서는 국내 인사로서 충당할 수 없는 어떤 중요 사업의 전문기술자를 우선적으로 초빙한다.

파송된 선교사가 그 사명에 부적당, 또는 불충실하거나 그밖에 한국 교회로서 원치 않는 경우에는 그 이유를 갖추어 총회로부터 캐나다 총회에 소환을 요청할 수 있다.

기장 총회 이외의 각 교파 연합 사업에 배당된 캐나다연합교회 선교비도 일단 기장 총회 예산에 편입시킨 다음에 기장 총회를 통하여 해당 기관에 송금한다. 이에 대한 한국 교회 총회로서의 재량권은 없다.

 

대략 이런 내용으로 합의된 것을 한국 교회 총회와 캐나다연합교회 총회에 제출하여 양 켠 총회에서 통과된 때로부터 실시한다(이상).

 

이 안이 다소의 자구 수정을 거쳐 두 편 총회에서 통과될 때까지 2년이 걸렸다.

 

1956년에 소정의 절차가 완료되고 합동위원회 안이 통과되었다. 그래서 한국기독교장로회와 캐나다연합교회와의 결연은 성취됐다.

1956년 총회 때에 우리는 서울 동부교회에서 캐나다 선교사들과 기장 총회 임원들과 많은 교우들이 모여서 이 결연의 성취를 공고하고 합동성찬식을 거행했다. 집례는 스캍과 김재준 두 사람이었다.

 

이것은 한국 교회와 선교지 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역사적인 전환점이었음과 아울러, 한국교회의 성숙(Come to age)을 기념하는 성인(成人) 예식이기도 했다.

이 시점에서부터 스캍 박사를 위시한 캐나다 선교사들은 기장 총회의 협동교직자로 등록됐다.


[각주]

  1. 윌리엄 스코트 박사에 의하면 캐나다연합교회의 한국 방문은 1955324일부터 29일까지였다. 윌리엄 스코트 지음, 연규홍 옮김,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 한국기독교장로회출판사, 2009, 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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