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6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96) 다시 “한신” 캠퍼스에 - “한신” 캠퍼스에 정착

한신캠퍼스에 정착

 

싫든 좋든 한신캠퍼스에 돌아온 나는 신학 교육에 전념했다. 내부 시설은 미비했지만, 그런대로 새 건물에서, 새 분위기, 새 기분으로 일할 수 있었다.

교수진도 정비됐다. 신약에 전경연, 현대신학에 서남동, 조직신학에 박봉랑, 종교교육에 문동환[1], 구약에 문익환, 그리고 캐나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우정은 헬라어와 신약원전 강독을 맡았고 전남 광주 백영흠 계열의 전임강사 김경재[2]는 한국재래종교, 특히 동학연구와 강의 등을 담당했다.

종교음악은 나운영[3]ㆍ유경손[4]이 맡았다. 후에 구두회[5]로 대체되기도 했다.

그 밖에도 각 전문분야에 따라 제제 명사들이 시간 강사로 출입했다.

모두가 자유 분위기 속에서 자기들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나는 주로 실천신학 부문에서 설교학, 목회학 등을 강의했다. 내게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른 교수들이 안하려는 부스러기 과목들을 주워 모은 것이다. 그래도 그것이 열두 광주리에 넘쳤다.

 

나는 교육 책임만 맡은 부학장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를 학장이라고 부른다.

일일이 변명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함태영 부통령은 자주 신학교에 행차하신다. 나도 높이 모셨고 교직원, 학생들도 존경과 예의로 맞이했다.

 

그가 학장이기 때문에 나는 한 달에 몇 번씩 그의 관저에 찾아가 학교 사정을 상세하게 보고 했다.

 

언제나 그는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가 부통령으로 된 초기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자주 방문했었다. 행정에 관한 자기 의견도 진술했다고 한다.

 

하루는 이승만 박사가 잔뜩 성이 났더란다. “내가 대통령이지 당신이 대통령이오?”

 

그 다음부터는 일체 경무대나 중앙청에 발길을 들여 놓지 않았다. 민원(民願)[6] 사건으로 행정당국에 지시 또는 부탁할 일이 있을 경우에는 같은 종씨인 함 비서실장을 보내곤 했다.

 

신학교에서 원족[7]이나 명소 순례로 나갈 때에는 반드시 느지막해서[8] 그리로 행차한다. 뭔가 푸짐한 음식이나 선물을 나누어 준다. 그리고서는 얼마 안 있고 간다.

 

옹은 부통령 실무를 사퇴했다.

 

이승만 박사는 옹에게 위로금으로 금일봉을 보내왔다. 그리 좀스러운[9] 액수는 아니었을 것이다.

옹은 그것으로 세계일주 여행을 떠나려했다. 함 비서실장은 으레 자기가 모시고 다닐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김춘배는 김정준을 추천했다.

 

김정준은 영어, 독일어, 일본어 등에 능숙할 뿐 아니라, 민첩하고 그때 그때의 착상이 재빠르다. 김춘배의 추천이 잘못이랄 수는 없겠다.

몇 달의 긴 여로(旅路)[10]90 노인을 모시고 다닌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디서 뜻하지 않은 사고가 생길지 모른다. 그래도 정준은 유감없이 책임을 다했다.

김정준은 에딘버러 대학교 대학원에서 구약을 전공하여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전공은 시편이었다.

 

돌아오자마자, 김정준이 쓴 함태영 옹 세계일주기가 두툼한 책으로 나왔다.

 

여행 중에 옹은 헤이그에 묻힌 이준열사의 무덤을 참배하려 했다. 이준 열사와는 한말 법률학고 제1회 동기동창이었다니 그럴 밖에 없었을 것이다.

헤이그 시청에 들어가 그 고장을 물었다.

여기는 산 사람 다루는 데고, 죽은 사람 건사하는 데가 아니오.”

 

죽은 사람 건사하는 고장이란, 공동묘지일 것이다. 여기저기 탐문 끝에 중앙공동묘지에서 이준무덤을 발견했다.

옹은 묘비를 안고 통곡했다.

 

나는 그렇게 진짜로 통곡하는 광경을 난생처음 봤다고 김정준은 술회한다. 90 노인이지만 감정이 메마르지 않았던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홍콩에 들렀다.

그때 한신동지인 김창준이 무역 관계로 홍콩에 와 있었다. 김정준은 옹 몰래, 김창준과 함께 홍콩의 밤거리를 산책했다. ‘옹은 호텔 방에서 혼자 고적했다.

김정준이 돌아왔을 때, ‘옹은 노여움이 풀무불처럼 타올랐다.

 

너는 나의 수행 비서. 나 몰래, 네 멋대로 돌아다닐 처지가 아니다. 허락 맡고 나가든지, 모시고 나가든지 해야할 거 아니냐? 그런 무례한 버릇이 어디 있단 말이냐?”

 

노인 심리다. 사실은 같이 나가 구경하고 싶었던 것인데 젊은 것들이 늙은이라고 일부러 제쳐놓았다는 것이 노여웠던 것이다.


[각주]

  1. 문동환(文東煥, 1921~2019) - 1921년 북간도에서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여사의 3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곳에서 그는 형 문익환 목사, 윤동주 시인 등과 어린시절을 보냈다. 어릴 때 김약연 목사를 보면서 목회자가 될 꿈을 키웠다. 용정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중 아버지(문재린 목사)와 친분이 있던 김재준 목사를 만났고, 그의 영향을 받아 일본의 신학교로 유학했다. 당시 태평양 전쟁 말기라 학도병 징집의 위험이 있어서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서울에서 문익환 목사와 함께 조선신학교에 편입하였고,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에 미국으로 유학하여 웨스턴, 프린스턴, 하트포트에서 공부했다. 유학중 만난 페이문(문혜림)과 결혼하였으며,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1961년부터 한신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수도교회 등에서 목회를 하였다. 1975년 해직된 그는 동료 해직교쉰 서남동, 안병무, 이문영 등과 갈릴리교회를 설립해 민중교회의 모태가 되게 했다. 1988년 평화민주당 소속으로 제13대 전국구 국회위원과 평화민주당 부총재를 지냈으며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3당합당에 반대해 정계 은퇴하고 1992년 미국으로 건너가 살다가 2013년 귀국했다.
  2. 김경재 교수는 1940년 광주 출생으로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 백영흠 목사의 안내로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하였다. 한국신학대학 졸업(1964) 후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문학석사를 취득하고 미국 듀뷰크대학교에서 신학석사, 네덜란드 유드레흐트 대학교에서 철학박사를 취득하였다. 이화여대, 숭실대, 한신대학교에서 수십년 교수로 봉직했으며, 한신신학연구소장, 한국 크리스찬아카데미 원장, 장공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은퇴후 2006년부터 삭개오작은교회를 개척하여 섬기고 있다.
  3. 나운영(羅運榮, 1922~1993) - 서울 출생으로 중앙중학교를 거쳐 1943년 일본제국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였다. 1952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작곡한 이후 기독교 찬송가를 1,105곡 작곡하였다. 가장 오랜기간(1955-1976)을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덕성여자대학교 재직시절에는 최초로 국악과 설립에 기여하였다.
  4. 유경손(柳慶孫, 1921~2011) - 1943년 일본고등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하고 1945년에 나운영과 결혼하였다. 서울성남교회 집사로 활동할 당시 고해성 목사를 도와 정락교회(전 문정리교회)를 개척하기도 하였으며(1961), 1980년부터는 개척교회인 호산나교회(전 운경교회)를 설립하고 장로임직을 받은 후 교회에 헌신했다.
  5. 구두회(1921~2018) - 충남 공주읍 출생으로, 평양요한신학교,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 미국 보스톤 음악대학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캘리포니아 신학대학원에서 음악박사, 미드웨스트대학에서 교회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명한 찬송가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어머니의 넓은 사랑등을 작곡하였다.
  6. 민원(民願) - 국민이 정부나 시청, 구청 등의 행정 기관에 어떤 행정 처리를 요구하는 일
  7. 원족(遠足) - 소풍(학교에서, 운동이나 자연 관찰, 역사 유적 따위의 견학을 겸하여 야외로 갔다오는 일)
  8. 느지막하다 정해진 때보다 꽤 늦은 감이 있다.
  9. 좀스럽다 성질이 잘고 옹졸하다
  10. 여로(旅路) - 여행을 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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