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6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99)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와 그의 “하야” - 이승만의 부정선거와 4ㆍ19의거

이승만의 부정선거와 419의거

 

이승만 박사의 야심은 자신의 종신대통령 유임에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두 임기 이상은 헌법이 허락지 않는다. 그는 헌법을 고쳐야 하게 됐다. 그래서 소위 발췌개헌[1]을 단행했다. 그것도 시원치 않게 됐다. ‘45[2]의 웃음거리가 됐다.

그는 선거 자체를 마음대로 주무를 계획을 세웠다.

그는 자기를 무조건 지지하는 자기 정당을 만들었다. ‘자유당이란 이름의 도당이다. ‘자유당의 이승만이 아니라 이승만의 자유당이었다.

 

자유당의 부정선거 계획은 이런 것이라고 동아일보에서 폭로했다.

 

자연 기권표, 유령 유권자표, 매수 기권표를 모아 전 유권자의 4할에 해당하는 표수를 사전에 투표해 둔다.

자유당에 투표하기로 약속한 유권자를 3인조, 9인조로 편성하여 조장은 각 조원의 기표 사항을 확인하고 투표지를 우선 자유당 선거위원에게 보인 다음에 투표한다.

자유당을 지지하는 유권자에게 완장을 두르게 하여 야당지지 유권자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함으로 자유당에의 투표수를 증가시킨다.

민주당 측 선거참관인을 매수한다. 매수할 수 없는 때는 무슨 구실을 만들어 개표소에서 축출한다.

 

내무부의 부정선거 지령은 아래와 같다.

 

자유당 완장을 두른 사람들의 많은 수를 투표소에서 약 100미터 밖에 배치하여 선거분위기를 자유당 일색으로 한다.

투표함을 운반도상에서 바꿔챈다.

개표 때에 혼표 또는 환표한다.

개표 종료 후에 투표 집계를 조작 공표한다.

자유당 후보자의 득표 목표를 51, 80%로 한다.

 

이런 비밀 부정전술 아래서 정부는 다음해인 196023일에 제4대 대통령, 5대 부통령 선거를 315일에 시행한다고 공포했다. 그럴듯한 선거공약을 내세웠다.

 

한편, 한국민주당(구파)의 조병옥[3]신파의 장면[4]이 대통령 지명에 대립됐다. 19591126일에 민주당 지명대회가 강행되어 대통령 후보에 조병옥, 부통령 후보에 장면이 지명됐다.[5]

그러나 조병옥이 미국 워싱턴 육군병원에서 병사하자, 315 선거는 맥이 빠졌다.

이승만 대통령 당선은 기정사실로 묵인하고 이승만이 지명한 이기붕 부통령 대신에 장면을 부통령으로 밀기로 했다.

 

1960315일부터 정부기관과 자유당은 장면타도, ‘이기붕당선을 강력 추진했다. 관권, 금력, 폭력, 매수, 그밖에 온갖 부정 수단을 동원하여 이미 예정된 결과를 거두려 했다.

야당 선거연설 집회에 참석하려는 대구고교 학생들을 학교 당국에서 금지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학교 당국에서는 일요 등교 명령을 내렸다. 대구 고교생들은 이에 항의하여 데모에 나섰다.

학원을 정권의 도구로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196038대전에서도 고교생들이 부정선거 규탄 데모를 감행했다.

같은 날에 부산에서도 학생 집회가 열렸다.

 

1960313서울에서 학생들의 데모가 산발적으로 시행됐다.

 

1960315315 선거의 날에 마산에서 대규모의 부정선거 반대 데모가 벌어졌다. 오후 5시쯤에 민주당마산시 당 관계자들이 선거를 포기한다고 고함치면서 시가를 돌았다. 군중이 그 선전차 앞에 모였다. 그것이 부정선거 규탄 데모로 변모했다. 수만 군중이 경찰파출소, 자유당 마산시당부, 서울신문 마산지국, 자유당 간부들 자택 등을 습격하고 파출소를 불태웠다.

당황한 경찰대는 데모대에 발포했다.

26명이 죽고 86명이 부상했다. 체포된 자는 220명이었다고 한다.

이 데모대는 주로 청소년, 행상인, 하급점원, 자동차운전조수, 식당뽀이, 구두닦이 등 하층 시민급이었다. 평시의 피압박 감정과 분노가 폭동화한 것이었다.

 

1960324부산에서 1,000명 학생이 마산 경관들의 만행을 규탄하는 데모를 감행했다.

1960411마산 데모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대로 바다에 던져졌던 김주열소년의 무참한 시체가 바다 위에 떠올랐다.

그것이 마산 시민과 전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1일에서 13일까지 마산은 계속 데모의 도가니[6]가 됐다.

 

1960414마산경찰 당국에서는 마산 데모의 배후에 공산당의 손이 움직였다고 생각되므로 진상을 조사하는 중이라고 발표하여 시민들을 더욱 격분케 했다.

 

그 동안에 서울 학생들은 잠잠했다.

부산과 마산 학생과 시민들은 서울에 항의했다.

서울 학생들은 썩었다. 민주 운동은 시골서만 하는 것인 줄 아느냐? 비겁하다. 독재 정권에 붙어 출세나 하려는 거냐?”

 

이런 내용의 도전이 서울 학생들을 격분케 했다.

 

1960418고려대학교 학생 3천명이 부정선거 무효를 부르짖으며 구보(驅步)[7] 데모에 나섰다.

 

고대 학생들의 선언에는

마산 학생들을 석방하라. 학원 자유를 보장하라. 기성세대 불신한다. 최후까지 싸운다등등이었다.

그들은 2:30PM에 국회의사당 앞에 농성했다. 행진 중에 많은 학생이 연행됐다. 그들은 연행 학생 석방과 폭행 경관 처단을 내무장관에게 요구하면서 동시에 네 가지 결의문을 발표했다.

행정부는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 행정부는 이 이상 민족의 체면을 망치지 말고 무능정치, 부패정치, 야만정치, 독재정치, 몽둥이정치를 집어치워라. 등등.”

 

인촌(仁村) 김성수[8] 선생의 역사는 구원(久遠)[9]하니 조급을 피하고 이성(理性)에 돌아가라한 유훈을 이철승[10]이 인용하며 학생들의 해산을 권하자 학생들은 귀교의 길을 떠났다. 학생 대열이 종로 4가 천일백화점 앞에 이르렀을 때, 그 부근에 잠복했던 정부 깡패들이 부삽, 갈구리, 벽돌, 몽둥이 등등으로 학생들을 급습, 난타하여 많은 학생들이 피를 길바닥에 쏟으며 쓰러졌다. 40명의 학생과 6명의 기자가 부상했다.

 

경찰깡패들아 나오라!” 외치며 학생 대열은 전진했다. 고대 교정에 모였을 때, 연행됐던 학생들도 다 돌아왔다.

유진오[11] 총장은 학생들을 귀가시켰다.

이날 밤, 국무회의에서는 더욱 강경한 탄압책을 쓰기로 의결했다.

 

깡패 습격에 격분한 고교(高校) 학생들 이백여 명이 데모에 나서 종로 4가를 거쳐 화신 앞까지 행진했으나 경찰에 의해 저지됐다.

 

1960419

8:40PM, 대광고교생 일천여 명이 거리에 나서 한 떼는 서울대학 쪽, 한 떼는 화신 쪽으로 전진하는 중, 동성(東星) 고교생들도 합류했었으나 화신 앞에서 무술경관대에 의해 해산됐다.

9:30PM에 서울대학교가 동원되어 각 단과대학이 총출동 약 일만 명이 10:30AM 종로로 집결, 경찰대와 탑동에서 충돌했으나 전진을 계속했다.

거기에 고대, 연대, 성대, 동대, 중대, 건대, 국민대, 경기대가 합세하여 태평로, 세종로 등 거리는 꽉 찼다. 시민들도 학생만세를 불렀다. 당국에서는 이적행위라고 야단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폭정이야말로 이적(利敵)이다하는 플래카드가 쏟아져 나왔다.

 

경향신문 복간하라는 플래카드도 치켜든다.

데모데는 중앙청 방위진을 뚫고 경무대[12]로 가는 대열과 법원으로 가는 부대, 그리고 이기붕[13] 집으로 가는 부대의 셋으로 나뉘었다.

경무대행 데모대는 통의동 파출소 앞에서 경찰의 최루탄 공세로 한 명이 부상했고 대체로 전진이 중단됐다. 사대, 동성중고생 일대가 중앙청 뒷문까지 진출했으나 더 나아가지 못했다.

 

1220

돈화문 방면에서 급파된 헌병 약 100명이 4대의 트럭에 분승[14]되어 나타났다.

소방차들도 동원됐다. 그러나 학생들의 돌에 맞아 박살이 됐다.

데모데는 바리게이트를 뚫고 전진했다.

경찰은 광화문에서 경무대까지 다섯 고장의 방위선을 설정했다. 1선 중앙청 뒷문, 2선 국민대 앞, 3선 효자동, 4선 효자동 중간 경무대 앞까지, 5선 경무대 정문 - 경찰은 제4선을 사수선(死守線)으로 하고 원형 철조망을 친 바리게이트를 치고 있었다.

학생들은 이 선을 돌파했다.

 

130

경찰은 무차별 발포했다. 학생 5, 6십 명이 총탄에 쓰러졌다. 격분한 학생들은 동료의 시체를 넘어 전진했다. 경찰이 던진 최루탄을 재빨리 주어 도루[15] 경찰에 던지기도 했다. 경찰은 마치 적진이나 소사[16]하는 것 같이 앞뒤 없이 기관총을 쏜다.

의대생들은 흰옷을 입은 채, 부상 학생들을 병원에 날랐다. 경무대와 중앙청 뒷문 사이는 격전장으로 화했다.

학생들은 진명여고 앞까지 후퇴했다.

중고생들이 스크럼 짜고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노래 부르며 행진했다.

 

250PM

서울신문사와 반공회관이 탄다.

통의동 파출소가 부서지고 공문서가 바람에 날려 길가와 구렁창[17]에 너더분하다.[18]

파출소는 모조리 부서진다. ‘시경에서도 발포했다.

시민들은 속담처럼 뇌인다.

경향신문은 정부가 잡아먹고, 서울신문은 민중이 잡아먹고.”

 

반공회관이 탄다. ‘반공이란 이름 붙은 데는 모조리 때려 부순다.

이 정권의 반공이 얼마나 가짜 반공이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5PM

군대가 출동한다. 자녀를 찾으러 나온 학부형들은 제절로[19] 시민 데모데가 된다.

 

7PM

비상계엄에 따르는 통금[20] 시간 싸이렌이 난다. 시민들은 많이 집으로 간다.

 

8시 지나자 탱크 소리가 요란했다.

조선일보 기자가 동대문서에 잡혔는데 나는 조선일보 기자다하고 기자로서의 취재 자유를 주장하려 했단다.

조선일보 기자? , 이새끼!” 하고서 쏴 죽이더라는 소식이 퍼졌다.

이날 밤, 서울 시내만도 52개소의 파출소가 부서졌다.

경찰이 자유당 앞자비[21]로 민원을 너무 샀다는 증거라 하겠다.

병원은 어디나 부상자로 초만원이다.

서울의 이날 밤은 조용했다. 군인이 입성했다. “군인이 학생을 쏠까?”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18, 19일 이틀에 걸쳐 부산, 대구, 광주, 청주, 인천, 전주, 수원, 이리, 진주, 창령, 하동 등지에서 학생과 시민이 함께 나서 데모했다.

 

마산 경찰 당국에서는 계속 공산당의 배후 조종설을 유포하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1960423-

송요찬[22] 계엄사령관은 발포 명령을 내렸었지만, 직속부하들이 어디를 향해 발포하리까?” 하고 위협삼아 대드는 바람에 쑥 들어가 버렸다는 막후담도 새어 나왔다.

결국 송요찬은 23일에 아홉 대학교 학생대표들과의 간격 없는 회담을 요청했다.

 

425

대학교수단이 시위했다.

 

540PM

학생들이 흘린 피에 보답하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258명의 교수들이 시가를 행진했다.

학생들은 교수님들 앞뒤와 옆에 시위(侍衛)하며 함께 행진했다.

선생님들 고맙습니다.”

시민들도 교수들의 행동에 감격과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거리는 박수의 홍수였다.

 

물론 교수들의 행동이 여기까지 이르기에는 넘어야 할 난관이 한 두 고비가 아니었다. 더러는 탈락했으나 그것은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교수들의 시국선언은 다음과 같다.


[각주]

  1. 발췌개헌(拔萃改憲) - 195274일 부산의 피난국회에서 통과된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첫 번째 헌법개정. 대통령 직선제와 상ㆍ하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측 안과, 내각책임제와 국회단원제를 골자로 하는 국회안을 절충해서 통과시켰다고 하여 발췌개헌이라 이름붙였지만, 사실상 이승만의 대통령 재선을 위하여 실시된 개헌이다.
  2. 사사오입개헌(四捨五入改憲) - 1954년 제1공화국의 제3대 국회에서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3선제한 철폐를 핵심으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킨 제2차 헌법개정. 표결 결과 재적인원 203, 재석인원 202, 찬성 135, 반대 60, 기권 7표였다. 자유당에서는 재적인원 203명의 3분의 2135.333인데, 반올림해서 사사오입하면 3분의 2135라고 주장하였다. 야당의원이 퇴장한 가운데 번복가결동의안을 상정하여 재석인원 125명 중 123명의 동의로 통과시켰다.
  3. 조병옥(趙炳玉, 1894~1960) - 충남 천안 출생. 호는 유석(維石). 공주소학교,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했다. 신간회, 수양동우회 사건 등과 관련해 옥고를 치르고 해방 후 미군정청 경무부장을 역임하면서 수동경찰청장이던 장택상과 함께 경찰력을 장악했다. 미군정기 가장 중요했던 물리력인 경찰력을 장악함으로써 좌익 탄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정부 수립 후 이승만과 한민당이 결별하게 되면서 이승만과 멀어지게 되었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발병하여 도미 치료 중 사망하였다.
  4. 장면(張勉, 1899~1966) - 호는 운석(雲石). 해방 이후에 부산세관장으로 재직한 장기빈의 아들이다. 1925년 맨해튼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가톨릭교 평양교구와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 활동하다가 해방 후 정계에 입문했다. 초대 주미대사(1949)를 거쳐, 1951년 국무총리가 되었으나 이후 자유당에 맞서 1955년 신익희, 조병옥 등과 민주당을 창당하여 야당 정치인으로 부통령에 당선되기도 했다(1956). 1960315 부정선거에서는 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에게 패하였다. 419 이후 의원내각제인 제2공화국의 총리를 역임했다. 집권 후 민주당의 구파가 신민당을 창당, 이탈해 나가면서 어려움을 겪었고, 516 군사 쿠데타로 실각하였다.
  5. 이때 조병옥이 세 표 차이로 승리하여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6. 도가니 강한 감격과 흥분으로 여러 사람이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7. 구보(驅步) - 뛰어 달려감
  8. 김성수(金性洙, 1891~1955) - 호는 인촌(仁村). 1914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 귀국하여 1917년 중앙학교 교장, 보성전문학교 교장,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하였고 1930년대 말부터 친일행각을 하였다. 광복 후에 한민당에서 활약하였으며, 19515월 국회에서 제2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52년 이승만이 부산정치파동의 서막인 526 정치파동을 일으키자 이에 항거하아여 529일 부통령을 사임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공로훈장 복장이 추서되었으나 친일 행적이 인정되어 20182월 서훈이 취소되었다.
  9. 구원(久遠) - 까마득하게 멀고 오래됨
  10. 이철승(李哲承, 1922~2016) - 호는 소석(素石). 일제강점기 후반에 전주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징집반대 등으로 일제의 감시를 받고, 백부 이석주의 권고로 인촌 김성수를 찾아갔다. 1944년 일제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었다가 탈출하였다. 광복 이후 극우 진영에서 학생운동, 반탁운동을 하였다. 초대 제헌의원 선거에는 낙선하였으나, 3, 4, 5, 8, 9, 10, 12대 국회의원을 지낸 7선 의원이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박정희의 회유를 거부하고 반 군정 운동을 하였다. 1970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후보를 밀어주어 김대중 후보가 김영삼을 제치고 후보가 되는 데 기여하였다.
  11. 유진오(兪鎭午, 1906~1987) - 호는 현민(玄民).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와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수석으로 입학, 19264월 동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하였다. 1929년 경성제국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933년부터 보성전문학교 전임강사, 1937년에 보성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중일전쟁 이후에 친일활동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문인의 길을 접고, 교육자, 법학자, 정치가의 길로 나섰다. 1948년 대한민국 헌법기초위원으로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였고, 1953년 고려대학교 총장에 취임하였다. 1966년 민중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는데, 19671월 민중당과 신한당이 합당한 신민당에서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로 하고 자신은 총재로 취임했으며, 7대 국회의원에 종로구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2. 경무대(景武臺) - ‘청와대의 이전 명칭
  13. 이기붕(李起鵬, 1896~1960) - 호는 만송(晩松). 서울 보성학교를 졸업(1915)하고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가장형편으로 중퇴하고, 선교사 무스(Moose, J.R.)의 통역으로 있다가 그의 도움으로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고학으로 1923년 주립대학인 데이버대학 문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뉴욕에서 허정(許政) 등과 함께 삼일신보발간에 참여하다가 1934년 귀국 후 허정과 충북 영동에서 광산 사업을 하였다. 광복 후 미군정청 통역을 하다가 이승만의 신임을 얻어 비서가 되었다. 1949년 서울특별시장, 1951년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었다. 자유당에서 명실공히 제2인자가 되었고, 1956년 부통령에 도전했다가 낙선하였고, 1960년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315부정선거에 항거하는 419혁명으로 부통령직을 사임하였고, 428일 맏아들 강석의 총격으로 집단자살하였다. 그가 살던 서대문의 집은 419혁명학생도서관이 되었다.
  14. 분승(分乘) - 같은 일행이 둘 이상의 탈 것에 나뉘어서 탐
  15. 도루 - ‘도로의 방언
  16. 소사(掃射) - 기관총 등을 상하좌우로 휘두르며 연달아 쏨
  17. 구렁창 - ‘구렁텅의 방언
  18. 너더분하다 뒤섞여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어수선하다
  19. 제절로 - ‘저절로의 방언
  20. 통금(通禁) - 특정한 지역이나 시간에 사람이나 차량이 다니는 것을 금지하는 일
  21. 앞잡이의 오기인 듯
  22. 송요찬(宋堯讚, 1918~1980) - 충남 청양 출생으로 일본 군 지원병으로 햅아 후 19462월 군사영어학교 제1기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이후 군 관련 작전(제주 43 당시에 진압 작전에 투입되었다) 625전쟁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419혁명에 군의 개입을 막음으로써 정치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쳤다. 516 군사정변을 지지하여 군사정부에 참여하였다가 1963년 박정희의 대통령 출마를 반대하는 글을 동아일보에 발표했다가 구속되었고, 5대 대통령 선거에서 옥중 출마를 선언하기도 하였다. 야당단일후보 옹립을 위하여 사퇴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한 뒤에 11월에 석방되었다. 그 뒤 다시 친정부 노선으로 전향하여 1970년 인천제철 사장, 1980년에는 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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