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6일 화요일

[범용기 제2권] (98) 다시 “한신” 캠퍼스에 - 김홍륙이란 인간

김홍륙이란 인간

 

이조 말, 내 고향인 경흥읍에 비범한 인간이 하나 있었다. 그의 이름은 김홍륙이다. 그는 청년 시절에 금단두만강을 몰래 건너 러시아에 도망했다.

러스키교육을 받고 출세하여 서울 주재 러시아영사관통역으로 임명됐다.

고종 황제의 아관파천[1] 때 그는 밤낮 침대 옆에 모시고 신변을 보호했다.

정부가 그리로 옮겨진 셈이다.

 

그는 본래부터 양반들을 아니꼽게 보았다. 그 당시 서울 거리란 종각 뒷골목 납작한 기와집들이 좌우에 앉아 있는 그 고장이었다. 상수도도, 하수도도 없다. 밤이면 대소변을 길에 버린다.

 

김홍륙은 러시아 승마복에 루바슈까[2]를 걸치고 장화를 신고 그 거리를 활보한다.

양반들은 에헴하고 갓신 신고 팔자걸음한다. 그는 뚜벅뚜벅 빨리 간다. 양반걸음이 거추장스럽다. 그는 뒤에서 양반들의 흰 행건 아랫도리를 똥 묻은 구둣발로 건드린다.

좀 빨리 가소. 양반님들!”

 

그러니 양반들의 앙심이 어떠했을 것은 상상할 수 있겠다.

 

그는 고종 황제의 아관파천을 기화로 폐하의 어명이라면서 관찰사고 군수고 마음대로 뗐다 붙였다 한다. 자기가 좋게 생각한 사람의 명단을 갖고 고종 황제의 싸인(어쇄)[3]를 받는다.

 

러시아 세력이 밀리자, 그도 약세가 됐다. 고종 황제는 물론 대궐에 돌아왔다.

 

그 당시 한국에는 커피가 없었다.

러시아 영사관에서 고종에게 커피를 진상한다.

황태자가 그 커피를 마시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김홍륙은 황태자 독살혐의로 체포됐다. 으레 사형이다.

 

이 사건을 평리원 판사였던 함태영이 맡았다.

 

옹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민씨네가 조작한 음모였다고 한다. 김명길[4]낙선재 주변[5] 31면에 보면 이 일은 1889726일 고종 탄일 다음 날에 생긴 것으로 되어 있다. 거기 보면 김홍륙은 시베리아에서 서양 요리인으로 이름난 김종호를 궁중요리사로 추천하여, 오래전에 고종과 황태자의 수라상(음식차림)을 차려드렸다 한다. 수라상은 내소주방(內燒廚房)에서 접시와 음식을 먼저 검사하고 맛보고서야 드리는 것인데 그 커피를 맛본 사람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민씨 가문이나 이등박문의 모략이 아니었을까 의심된다고 쓰여 있다.

 

어쨌든, 함태영 평리원 판사는 김홍륙에게 증거 불충분이란 이유로 무죄 또는 가벼운 처벌로 끝내려 했다. 민씨 가문에서는 장관들, 세도가들을 동원하여 극형에 처하라고 연방 압력을 보낸다. 그때에는 사법권 독립이 제대로 돼 있었기에 함 판사는 끝까지 항거했다.

하루는 밤에 고종 황제로부터 입궐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황제의 침실에 단 둘이 앉았다.

비밀 지시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말씀에 단서를 잡으려고 다그쳐 물었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역시 상감 자리에 앉은 분은 달라!” 하고 감탄할 뿐이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법정에 선 김홍륙은 당당하고 태연했다. 이것저것 질문해도 도무지 대답하지 않았다. 예정된 사형인데 말할 건 무어냐 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역시 거인(巨人)이었다.”

 

이것이 그의 김홍륙 인물평이다.

 

사전에 혀를 짤랐다는 것이 항간의 얘기다. 그랬을 수도 있겠다. (낙선재 주변32)

 

함태영은 김홍륙이 혀가 잘려 있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말 없이 태연했다고만 했다.

 

고종과 함태영의 밀회에서도 그런 내용이 밀담된 것이 아니었을까?


[각주]

  1. 아관파천(俄館播遷) - 조선 말기인 1896211일부터 다음해 225일까지고종 황제와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서 거처한 사건
  2. 루바시카(rubashka) - 러시아 남자가 입는, 블라우스와 비슷한 겉 옷
  3. 어새(御璽) - 예전에 옥새를 높여 이르던 말
  4. 김명길(金命吉, 1894~1983) - 대한제국의 마지막 상궁 나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5. 대한제국기의 마지막 황후였던 윤비의 지밀상궁 김명길 상국의 조선과 대한제국기의 황실 마지막 모습에 대한 수기를 동아일보사에서 출간한 책으로, 대한제국기의 왕녀, 후궁, 황후, 궁녀들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는 증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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