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ㆍ4 공동성명
1972년 7월 4일에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을 때 나는 수유리 우리 집에 있었다. 이후락[1]이 이남을 대표하여 조인했다고 한다. 그는 “대화 있는 대결”을 기자회견에서 강조했다고 한다.
이것은 무력이나 외세에 의하지 않고 이념과 사상과 제도를 초월한 단일민족으로서의 자주 평화통일을 실현한다는 데 남북이 합의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닉슨’의 중국방문을 계기로 긴장완화의 물결이 세계적으로 펴지는 여파였다고 하겠다. 1971년 9월 21일에 남북적십자 회담이 열려서 끊겼던 혈맥이 약간 통할 것 같던 참이었기에 더욱 희망적이었던 것이다.
[각주]
- 이후락(李厚洛, 1924~2009) - 1924년 경남 울산군 웅촌면 출생으로, 1943년 울산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항공기정비학교에 입교해 하사관 과정을 이수해 1944년 12월 일본 육군 하사로 전역했다. 해방이후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고, 이듬해 1946년 3월에 졸업하여 대위로 임관했다.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시절 주로 정보기관에서 활동했으며, 1972년 북한에서 김일성과 회담을 가진 후 7ㆍ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유신헌법 선포 이후에 박정희 후계자로 부상했으나 이로 인해서 박정희 대통령의 견제가 심해졌고 1973년 심장병 치유를 이유로 영국령 바하마 제도로 출국했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회유로 다시 귀국하였다. 10ㆍ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암살된 후, 신군부에 의해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1985년 정치활동 규제에서 풀려났지만 사망할 때까지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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