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6일 금요일

[범용기 제3권] (12) 정계의 파노라마와 남북공동성명 - 박창암이란 사나이

박창암이란 사나이

 

그 동안에 박정희에게 소외당한, 게릴라 전술의 전문가라는 박창암[1]이 자주 우리집에 오곤 했었다. 김종필[2]과는 견원지간(犬猿之間)[3]이었지만 그만큼 그는 강직한 군인이었다.

군사 혁명때 그는 같이 도강[4]한 주류였지만 자유당 때의 정치범을 심판하는 특검 책임자라는 미움받는 자리밖에 차례지지[5] 않았었다.

어쨌든 그는 일사천리고 그 검부러기[6]를 처치해 버렸다. 최인규[7]에게 사형언도한 것도 그가 한 일이었다.

그 후에 그는 오래 무료(無聊)하게 지내다가 남북회담이 된다는 소문에 들떠서 차제에 잡지라도 하나 해 본다고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잡지 이름은 자유[8]였다.

그는 나에게 74 공동성명에 대한 논평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그래서 상당히 긴 글을 써 줬다.

거기서 나는 이념과 사상과 제도를 초월하여……란 전제가 너무 추상적이라고 지적했다. “제도에서 온전히 자유하는 사람도 찾기 어렵겠지만, 인간이 현실로서의 인간인 한, 이념이나 사상을 초월한다는 것은 공상이다. 이념도 사상도 없이 어떻게 대화가 되느냐?

허공만 때리는 권투선수가 되란 말이냐 등등.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공산체제와 자유민주체제 등을 대좌시키고 또박또박 따지면서 동시에 제3의 통일된, 또는 통일될 한국의 원칙적인 설 자리를 허심탄회하게 찾아봐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단일민족이란 것도 이념과 사상이 반대되는 경우에는 으로 대립된다는 것이 625 때의 시민경험에서 뼈저리게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고 대화 자체를 단념하란 말은 물론 아니다. 대화를 하되 진실하고 솔직하게, 서로 다른 의견을 존중하면서 합일점을 위하여 피차 양보할 줄 아는 민족적인 기반 위에서 성실과 인내로 꾸준하게 진행시켜야 할 것이라고 해 두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단일민족이란 전제는 진짜 무의미한 것이냐? 그렇지 않다.

만일 이북이 일본족()이나 러시아족이라면 아예 이런 말이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끼리니 같은 혈육으로서의 사랑이 통할 수 있지 않겠느냐? 625 때 인민군 열성분자라는 사람이 이남의 형제자매를 찾아 인사를 나누던 경험을 나는 기억한다. 그 순간 그들은 형제요 자매요, 친척인 것 이외로, 또는 이상으로, “인민군인 것이 아니었다. “만나니 반가운 것뿐이었다. 이것이 사랑이다. 이 사랑이 민족사랑에로 발전한다면 이념과 사상과 제도를 초월한하나로 남북을 통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민족애라는 활력소가 단일민족을 성숙시킨다.

박창암 씨가 내던 자유지는 내용이 괜찮고 부피도 있고 했지만, 출판비, 고료 등에 쓰여지는 재정 내막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박창암에게 서울시장을 하라는 둥, 공화당 국회의원이 되라는 둥, 여러 가지로 회유해 오는 모양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게 와서 의논했다. 내가 보기에는 강직한 것이 그의 인격적 생명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시장으로서 대통령 지시를 거부한다면 관료질서를 범한 죄로 처벌되고 할 말이 없을 것이고, 공화당 국회의원이 되도 거수기[9] 노릇밖에 못 할 것인데 그런 걸 각오하고 하겠거든 하시오. 했다.

그는 둘 다 거부하고 야인으로 머물면서 육사에서 시간강사로 게릴라 전술을 강의한다고 들었다. 지금의 소식은 모른다.

 

남북공동성명의 반응은 국제적으로 좋은 편이었다. 19731121일 제28UN 총회 정치위원회에서는 남북한의 대립된 두 제안을 둘 다 채택하고 타결의 기회를 모색하기로 했다 한다. 그날 정치위원회 의장의 성명 내용을 보면 UN

197274 남북공동성명에 있는 통일 3원칙을 인정한다.

남북간의 대화를 추진시켜 남북간의 다면적 교류협력이 실현되도록 희망한다.

국련한국통일부흥위원단은 해체한다.

등등이었다.

 

그 후 얼마 동안은 이남의 대이북 방송에서 상대방을 모욕하는 욕설이 없어졌었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것은 불과 며칠만이었고 또 다시 험악하고 거친 말투가 쏟아져 나왔다. 박정희는 국제정세의 급변과 이북의 남침준비라는 것을 구실로 비상을 걸고 독재 합법화를 진행시키는 데만 열을 올리고 있었다.


[각주]

  1. 박창암(朴蒼巖, 1923~2003) - 함경남도 북청 출생. 만주간도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간도의 조양천 초등학교에서 교사를 하다 1943년 만주국 군대인 간도특설대에 입대했다. 해방 이후 평양에서 협신공업학교 교사를 하다가 서울로 옮겨 1949년 육군 중위로 임관해 한국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1961516 군사정변에 참여하였으나 1963년 김재춘의 중앙정보부는 그가 반혁명사건에 연루되었다고 발표하였다. 법정에 선 박창암은 혁명의 목적은 달성되었으므로 군은 당초의 약속대로 참신한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한다며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맹비난했다. 징역 13년이 선고되었으나 1년후에 형 면제처분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그는 사재를 털어 월간 자유지를 창간해 2002년까지 발행인으로 일했다. 국사바로세우기 운동을 하던 이유립이 환단고기의 내용을 자유지에 도배하였다.
  2. 김종필(金鐘必, 1926~2018) -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일으킬 당시 예비역 육군 중령으로 쿠데타에 참여했다. 박정희의 형(박상희)의 장녀 박영옥과 결혼하였다. 초대 중앙정보부장, 9선 국회의원, 국무총리(박정희 정권, 김대중 정부)를 역임하였다. 1965년에 조인된 한일굴욕협정을 위해 일본의 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와의 회동(1962)하기도 하였다.
  3. 견원지간(犬猿之間) - 개와 원숭이 사이라는 뜻으로, 사이가 몹시 좋지 않은 관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4. 도강(渡江) - 강을 건넘
  5. 차례지다 일정한 차례나 기준에 따라 몫으로 분배되다
  6. 검부러기 마른 풀이나 낙엽 따위의 부스러기
  7. 최인규(崔仁圭, 1919~1961) - 경기도 광주 출생. 1933년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 1941년 경성고등상업학교(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전신)를 졸업하고, 1949년 뉴욕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하였다. 귀국 후 1958년 민의원 당선, 교통부 장관, 1959년 내무부장관에 기용되어 315 부정선거를 총지휘하였다. 1960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53일에 구속되었다. 조사결과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1961년 혁명재판부에서 사형이 확정되었고 12월 서울교도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8. 자유- 박창암이 반공정신을 함양하고 민족사관을 확립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창간한 월간지.
  9. 거수기(擧手機) - 손을 드는 기계라는 뜻으로, 회의에서 가부를 결정할 때 자신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남이 시키는 대로 손을 드는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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