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6일 금요일

[범용기 제3권] (7)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 3선개헌된 헌법에 의한 선거

3선개헌된 헌법에 의한 선거

-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

 

1971427일에 3선 개헌된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실시한다고 공고됐다. 어차피 선거를 할바에는 공정선거라도 실시되도록 해보자는 의도에서 1971419일에 종로 YMCA 꼭대기 층에서 민주수호 국민협의회[1]를 결성했다. 이것은 애당초 정계, 법조계, 언론계, 학계 등에서 믿을만한 민주인사들을 초청하여 의견을 들으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서울대 상과대학교수 한 분에게 한일간의 경제적 제문제라는 Keynote Speech[2]를 부탁했다.

그는 많은 재료와 통계를 제시하며 한국경제의 대일예속상을 파헤쳤다. 듣고나서 회중은 우리가 그런 것을 보고만 있을 것이냐? 뜻있는 분은 딴방으로 옮겨 얘기해 보자고 했더니 더러는 흩어졌지만 십여 명이 딴방에 모였다. 딴 방이래야 YMCA 지붕 밑 너저분한 먼지 구뎅이[3]에 망가져 내버린 의자들을 주워다 놓고 앉은 것이었다. 제일 연소자로 김지하[4]도 거기 있었다. 이름을 무어라할까 하자 김지하는 민주수호 국민협의회란 원래의 이름 그대로 좋다고 해서 그렇게 됐다. 이름 자체가 스스로를 말하는 것이니 규약은 따로 만들 것 없이 모든 것을 대표위원에게 맡기자고들 했다.

대표위원들이 맘대로 하되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우리들 누구든 불러 심부름 시키라는 것이다. 대표위원은 김재준, 이병린[5], 천관우[6] 셋으로 선정됐다. 그날 결의문 초안은 천관우가 쓰고 이병린과 김재준이 함께 검토했다. 이병린은 변호사협회 회장도 지낸 법조계의 중진이니만큼 그가 앞에 나섰고 광화문 뒷거리 적선동에 있는 그의 사무실이 우리 집회소이기도 했다. 다른 책상이나 의자가 마련된 것도 아니었고 접수 데스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의문에서는

민주적 기본질서가 파괴된 현실을 직시하고 그 회복에 국민의 총궐기를 촉구한다. 이번 선거는 민주헌정의 역사에서 분수령을 이루는 것이므로 이 선거에서 부정불법을 감행하는 자는 역사의 범죄자로 민족적 규탄을 받아야 한다. 국민은 집권층의 탄압과 유혹을 일축하고 신성한 주권을 행사하라. 학생의 평화적 양심적인 데모에 잔학한 탄압을 가하는 정부당국의 행위에 강력히 항의한다.

등등이었으나, 그 후에도 어떤 구체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견해와 결의를 성명했다. 그 당시에는 아직도 천관우가 동아일보사에서 아주 파면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 성명은 동아일보에 그 요지가 기사화되곤 했다.

19714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박정희는 김대중과 대결하게 됐다. 우리는 학생과 젊은 성직자 지방 민주인사 등을 전국 투표장에 배치하여 투표소를 감시하게 했다. 법적으로는 단일야당인 신민당에게 파견하는 투표감시원으로 등록된다. 그것은 목숨 건 임전태세였다. 강원도 두메산골에까지도 퍼졌다. KCIA의 압력 때문에 버스 회사가 버스를 태워주지 않으면 도보로 산 넘고 물 건너 현장에 가기도 했다. 개표 결과는 박정희가 6432828[7], 김대중이 5395900표였다고 한다.

지방에서 돌아온 학생들의 말은 이러했다. “우리는 부정투표를 정당화한 것 뿐입니다”, “이제는 민주주의가 다시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하로 갑니다하는 등등의 짧은 절규였다. 사실 부정은 투표 이전에 다 된 것이고 투표장에서는 이미 된 매표가 함에 던져지는 것뿐이었다 한다. “도지사로부터 면사무소 직원까지 동원되어 돈 몇 원, 고무신 한 켤레, 또는 막걸리 몇 잔씩 등등으로 이미 표는 사버린 것이었고 투표장까지는 있는 트럭을 총동원시켜 강제로 날라다 놓는 것이었다. 투표율 79.8%란 이면에는 이런 사연이 숨어 있었다. 선거기간 1개월 동안에 225억 원의 통화를 찍어냈다. 그 많은 돈을 갑자기 어디에 썼겠는가는 묻는 것이 쑥스러울 것이다.

소위 부재자 투표란 것은 정부에서 도맡았으니 그 내막을 알 길이 없다. 전라, 경상지방의 다도해 수천의 섬들에서는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투표할 것인지도 모르고 지낸 주민이 대부분이었다 한다. 그러나 그 도서지방표 역시 여당에서의 임의에 맡겨진 것이었고 군대표는 검열투표였다 한다니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랬는데도 표차는 백만도 못되는 9469백 정도였다는 것은 사실상 의 패배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국민은 아직도 김대중을 그들의 대통령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대도시 특히 서울에서의 김대중 표는 월등하게 우세였다. “의 마감 유세인 서울 장충공원에서의 연설은 비참할 정도였다 한다. “은 죽을상이 되어 아이처럼 울었다고 한다. “제발 내게 4년만 더 심부름시켜 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진짜 충복이 돼 보겠습니다.

사람은 무지하게 많이 모였다. 나는 그날 장충동 126의 경동교회 교육관 이층에 앉아 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 울며 애걸했다는 얘기는 내 옛 친구 김영환[8]으로부터 들었다. 김영환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울면서 호소하는 꼴이 불쌍하다”, “4년 더 시켜보자꾸나!”, “누가 한들 별 수 있겠나?”

이것이 아마도 많은 서울 시민의 심정이 아니었던가 싶다.


[각주]

  1. 민주수호국민협의회(民主守護國民協議會) - 1971년에 결성된 최초의 재야 민주화운동 상설 조직. 1971320일 이병린 등 7인이 발족할 것을 결의하였고, 419일 서울 대성빌딩에서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결성되었고, 공명선거를 달성하기 위한 참관인단 구성과 파견에 힘을 쏟았으며 민주수호청년협의회’, ‘민주수호청년학생연맹’, ‘민주수호기독청년협의회등과 연대하여 공명선거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처음에는 공동투쟁위원회 형태로 출범했지만 선거 이후 재야 운동 최초의 상설조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19711015일 위수령 발동과 1972년 유신선포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지 못했다. 하지만 197312월 제도정치권과 더불어 시국간담회를 개최하여 반유신 운동의 토대를 형성했으며 1974923일 긴급조치 위반자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반유신 민주화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는 민주회복국민회의의 토대가 되었고, 이후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으로 이어졌다.
  2. 기조연설(Keynote Speech)
  3. 구뎅이 - ‘구덩이’(땅이 움푹하게 팬 곳)의 비표준어
  4. 김지하(金芝河) - 1941년 전남 목포 출생. 본명은 김영일(金英一)이다. 1954년 아버지를 따라 원주로 이주하여 원주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유학 중동고등학교를 다녔으며 196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했다. 1969년 시 황톳길을 발표하여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적극 가담하였고, 1970오적(五賊)’을 발표하여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되기도 하였다. 1973년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와 결혼하였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 1975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이후 다시 구속 재판을 받고 무기징역에 징역 7년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1980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1980년대 이후 생명 존중 사상을 수용하고 생명운동을 벌이는 데 힘썼다.
  5. 이병린(李丙璘, 1911~1986) - 호는 심당(心堂). 경기도 양평 출생. 경성제1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5년 서울매동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아 재직하다가 1940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하였다. 190년에 경찰조직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315 부정선거 후에 일어난 마산소요사태의 진상조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박정희 정권 때 3선개헌 반대, 유신헌법철폐를 위해 활동하였다. 1970년 군사정권을 비판한 당시 <오적> 필화사건의 시인 김지하와 윤보선 전 대통령과 강신옥 변호사의 긴급조치 위반 사건 등에서 변론을 맡았다.
  6. 천관우(千寬宇, 1925~1991) - 호는 후석(後石). 충북 제천 출생. 1937년 청주공립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으며, 1944년 경성제대 예와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학부에 진입하면서 한국사를 전공했다. 1949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한국전쟁 당시에 1951년 대한통신 기자로 일하면서 언론계에 투신하였다. 1952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네소타대학 신문학과에서 수학하였다. 1954년부터 한국일보, 조선일보 등을 거쳐 1968신동아필화사건으로 그만두기까지 언론계의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그 뒤 3선개헌을 계기로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가 가시화됨에 따라 반독재ㆍ민주화운동에 주력하였다. 유신체제 속에서는 감시와 탄압이 심해서 칩거하며 한국사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전두환 정권하에서 관직을 맡게 되면서 변절했다는 혹평을 받았다.
  7. 당시 대통령 선거 최종 집계결과는 박정희가 6342828표였다.
  8. 김영환(金永煥, 1905~1970) - 광산(光山) 김씨. 노석 김대현 장로(1873~1940)의 차남으로 호는 백석(白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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