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6일 금요일

[범용기 제3권] (8)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 학생들의 궐기

학생들의 궐기

 

그동안 외유[1] 중이던 함석헌 옹이 귀국했기에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표위원 가운데 하나로 선임했고 가톨릭의 지학순[2] 주교가 열심이었기에 그도 대표위원으로 뽑았다.

학생들의 반정부 운동은 치열했다. 서울대학을 위시하여 고려, 연세, 동국, 성균관 모두 그 있는 고장에서 반기를 들었다. 우리는 각 대학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학생들을 방문했다. 학교마다 수십 명 학생이 농성하고 있었다. 함석헌 옹은 우리 나이 먹은 것들이 일을 쓰게 못해서 학생들을 고생시키니 미안하오! 학생들이나 잘 해 주오하며 사과한다. 학생들은 거의 무표정인 것 같았다. 아무 대답도 없었다. 무시하는 태도였다.

그래도 기독학생들만은 맘을 열어 통로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새문안교회에 기독학생들이 모여 시국대책을 토의한다고 했다. 나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때문에 날마다 바쁘게 지내는 중이었는데 무언가 강연(?)같은 걸 청해왔다. 나는 준비할 사이도 없이 그리로 갔다. 수백 명이 빼꾹 찼다. 나는 학생들의 운동이 사회적 시국적이기 전에 신학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학적으로 일관된 신앙과 이론을 정리한 터전 위에서 투쟁하지 않고서는 장기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자신을 여러분의 현실에서 발견하라하는 얘기였던 것 같다.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의 방향을 찾으라고 권했던 것이다. 강연이 끝나자 곧 나왔다. 어쨌든 학생들은 용감했다. 새문안 서병호[3] 장로님 아드님이 리더라고 들었다.


[각주]

  1. 외유(外遊) - 외국으로 여행함
  2. 지학순(池學淳, 1921~1993) - 세례명은 다니엘(Daniel). 평안남도 중화 출생. 1934년 중화공립보통학교 재학중에 중화본당 신부 콜먼(Coleman)에게서 영세하였고, 이듬해 동성상업학교 을조(乙組, 小神學校)에 입학하였다. 1940년 병으로 중퇴한 뒤, 1943년 함경남도 덕원신학교로 편입하였다. 1949년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 덕원신학교가 폐쇄되자 월남을 시도했다가 공산군에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그해 말 동료 윤공희(尹恭熙)와 함께 월남에 성공, 다시 성신대학으로 편입하였다. 625 전쟁 때 자원 입대하였다가 부상으로 제대하였고, 1952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1956년 로마 프로파간다 대학에 유학, 교회법 석ㆍ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59년 귀국하였다. 1962년 부산 초장동본당 주임을 거쳐 1965년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에 임명되었고, 6월 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1972년 교구 내에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설치하여 재해민 구제에 힘쓰는 한편, 한국의 사회ㆍ정의ㆍ인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하여 1974년 내란선동과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15,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다가 이듬해 구속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교회 안팎으로 큰 영향을 주었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 사제단이 결성되는 데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19859월 남북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북한에서 휴전 후 최초로 공식 미사를 봉헌하기도 하였다.
  3. 서병호(徐丙浩, 1885~1972) - 호는 송암(松巖). 황해도 장연 출신. 개신교 최초의 유아세례 수세자. 아버지는 장로교 최초의 7인 목사 중의 한 사람인 서경조(徐景祚)이다. 1905년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해서제일학교, 평양대성학교, 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4년 중국 난징 금릉대학을 다녔다. 1919년 김규식ㆍ여운형ㆍ선우혁ㆍ신석우ㆍ장덕수 등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당수로 취임하였다. 1920년대에는 상하이에 학교를 세우면서 교육활동을 하였으며, 광복 후 1947년에 귀국하여 새문안교회 장로, 서울중앙기독청년회 이사, 경신학교 이사장, 교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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