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5일 목요일

[낙수] 落穗集(낙수집) - 羈旅記(기려기)

羈旅記(기려기)[1]

 

장공김재준저작전집(5)한국신학대학출판부, 1971, 5, 40~45.
김재준전집(18)한신대학출판부, 1992, 1, 125~131. (여기에는 旅記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다)


十二月(12) 十七日(17), 싸늘한 바닷바람에 옷삭 떨며 釜山驛(부산역)에 나리니 어떤 늙은 할머니 한분이 따라 나렸으나 어디 갈줄 몰라 망사리고 있기에 어디 가느냐고 물었더니 주머니 끈을 풀고 封套(봉투)조각을 끄집어낸다.

凡一町(범일정) 三八四番地(384번지)

나도 처음이라 지향을 몰르는 터이므로 驛派出所(역파출소)에 물으니 ()하여 右便(우편)으로 가는 電車(전차)를 타고 終點(종점)에 가서 나리라는 것이였다. 終點(종점)에서 나려서 또 派出所(파출소)에 들어 가니 踏切(답체)[2]를 건너 한참 가다가 또 派出所(파출소)가 있으니 거기서 물어보라 한다. 무던히 오래 걸어 겨우 그 派出所(파출소)를 찾었더니 바로 저기가 凡一町(범일정) 三八四番地(384번지)이지만 그 番地(번지) 안에 집이 六十戶(60) 以上(이상)된다고 한다. 벌서 해는 저물어 컴컴한데 이 올랑졸랑[3] 널조각으로 무어지는 개천가 오막사리를 一一(일일)히 뒤질수도 없고해서 그 () 古參者(고참자)라는 집에 들어가 이름을 대이여 어디쯤 되는가 물었다. 개천가로 다섯 번채 집에 가 보란다.

여기가 三百八十四番地(384번지) 아모네 집인가요?

젊은 婦人(부인)이 나오며 여기는 三百八十四番地(384번지)가 아니야요』 『그럼 몇 番地(번지)인가요』 『三八四(384) 番地(번지)하고 말시가 當當(당당)하다. 그렇습니까하고 도로나왔다. 番地(번지)何如間(하여간) 그집에는 우리가 찾는 사람의 이름이 붙어 있지 않었다 할수없이 그 老婆(노파)를 다시 古參者(고참자)라는 광주릿집 主人(주인)한테 마끼고 나는 도로 내길을 걸었다.

집떠난 孫子(손자)를 찾노라고 그렇게 어이없는 길을 떠난 것이였다.

아이고 나 때문에 이렇게 手苦(수고)하시고 이 恩功(은공)을 무어로 갚으리까. 아이고 고마운게요 고마운게요!

하며 진심으로 치사를 한다. 古參者(고참자)라는 그 사람은 침대 광주리를 틀어파는 사람인 모양인데 素性(소성)이 어떤 친구인지도 몰르고 그 어쩔줄 몰르는 老婆(노파)를 마낀 것을 나는 그윽히 不安(불안)하게 생각하였다. 차라리 派出所(파출소)에 맛겼더면 하고 아주 멀리까지 와서야 생각나서 도로 갈가하다가 그만두었다.

 

내가 가려는데는 佐用町(좌용정) 七九六(796) 宋兄(송형)寓居(우거)하는 聖貧庵(성빈암)이다. ()등상이에 있다는데 어두운 첫길이라 알길이 漠然(막연)하였다. 派出所(파출소)에 들어갔다. 한참 調査(조사)를 받었다.

마침 그 派出所(파출소) 給仕(급사)[4] 노릇하는 열 살쯤 된 少年(소년)이 내가 案內(안내)해 주마고 自請(자청)한다. 나는 懷中傳燈(회중전등)을 하나 사가지고 그 少年(소년)을 딸어 섰다.

나두 예배당 당겼어요, 주일학교도 잘 다니고. 그랬는데 二年前(2년전) 派出所(파출소) 給仕(급사)로 들어온 다음부터는 이럭저럭 못나가게 되어서 인저 하나님 은혜를 작구 잊어 버려요하고 이 少年(소년)은 아주 어른답게 이야기를 부친다. 찾는 내가 牧師(목사)요 찾어가는 宋兄(송형)이 또한 牧師(목사)라니까 마음 그윽히 이전 생각이 나서 아마 自願手苦(자원수고)하는 모양이었다.

()등상이에 올라가서 이집 저집 傳燈(전등)을 빗최가며 ()패를 조사하다가 마침 目的(목적)宋兄(송형)庵子(암자)發見(발견)하자 그 少年(소년)은 어느틈에 벌서 쏜살같이 달어나 어둠 속에 사라지고 말었다. 나는 고맙다고 치사할 틈도 없었다. 그는 가장 純粹(순수)好誼(호의)에서 나온 그의 奉仕(봉사)에 어떤 傷處(상처)를 받을가 두려워한 것이였다.

나는 그 少年(소년)이 무척 귀엽고 고맙게 생각되였다.

 

十二月(12) 十九日(19). 宋兄(송형)과 함께 釜山(부산) 복판을 걸어 龍頭山(용두산)에 올라가 우아래를 바라보았다. 스탄리 쭌스의 有名(유명)한 말 不可避(불가피)福音化(복음화)하라한 그길 밖에 남은 거 없다. 肉身(육신)으로 가난한 ()에게 ()으로 ()하게 하는 그것이다. 一簞食(일단사), 一瓢飮(일표음)[5]으로 在陋巷(재누항)[6]이라도 不改其樂(불개기락)[7]하는 道心(도심)이 있으면 그는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을 가진 ()일 것이다.[8] 이것이 돌아 ()편 앞으로 하여 落伍者(낙오자)前頭(전두)에 서는 奇蹟(기적)이다.[9]

 

사람들은 잠간 서서 自己(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를 좀더 깊히 생각할 여유도 없이 그저 분주히 달음질 친다. 그런 것은 한가한 선비들께 맡겨두자. 우리는 돈을 追求(추구)한다. 우리는 勢力(세력)獲得(획득)한다.

그리하여 그들의 집은 높아지고 그들의 밭은 넓어지고 그들의 돈지갑은 퉁퉁해진다. 그러나 그러므로 그들은 ()한가? 그들은 有力(유명)한가? 그들의 內面生活(내면생활)食慾(음식) 以外(이외)에 다른 것이 없고 교만이 마음의 王座(왕좌)占據(점거)하였으니 無慈悲(무자비)가 그 찬바람을 뽑고 있을 뿐이다. 天下(천하)를 차지한다 한들 그의 內面生活(내면생활)空虛(공허)하면 무엇이 有益(유익)하랴. 그는 모든 것을 가졌으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이다.

宋兄(송형)의 말을 듣건대 그가 兩年(양년)[10]동안 이곳 저곳에다가 託兒所(탁아소), 幼稚園(유치원), 無産兒童學院(무산아동학원), 施療所(시료소) ()設置(설치)여 아이들을 건사하기 始作(시작)했는데 그 아이들은 勿論(물론), 그 아이들 부모에게까지 福音(복음)의 손은 至極容易(지극용이)하게 닿을 수 있었다 한다. 그리하여 그 事業設置(사업설치)했던 곳마다 지금은 敎會(교회)新設(신설)되어 當當(당당)自立(자립)한 곳도 數個所(수개소) 있다 한다.

兄弟(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世上(세상)의 가난한 ()()하여 믿음에 豊盛(풍성)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에게 허락하신 나라의 後嗣(후사)가 되게 하시지 않으셨느냐(야고보 2:5)聖句(성구)가 생각난다.

우리에게 傳道(전도)熱誠(열성)이 없으며 도 傳道(전도)方法(방법)()하여[11] 그들의 心情(심정)에 미치지 못한 ()은 있을망정 그들 自身(자신)은 그리 막힌 사람들이 아니다.

()를 마시고 다리를 건너 絶影島(절영도)의 그늘을 밟았다. 날은 따스하고 바닷물은 푸르다. 뱃사공들의 그물 걷는 노래가 기운차게 울려온다. 고요한 牧場(목장) 위에 봄구름처럼 흘러가는 牧歌(목가)도 좋지만 여기여차 저어가는 波浪(파랑)[12]위의 漁歌(어가)도 굳센 情趣(정취)가 버리기 어렵다.

한참 가노라니 온통 술집과 私娼(사창)들만 사는 거리가 展開(전개)된다. 보기에 지긋지긋한 野俗(야속)[13]스럽게 肉感的(육감적)인 젊은 女子(여자)들이 길모퉁이에 서 있다. 우리는 조그마한 구멍가게 모양으로 된 藥房(약방) 비슷한 집에 들어갔다. 그 가게 主人(주인)C라는 中年(중년) 傳道師(전도사)라고 宋兄(송형)紹介(소개)하였다. 그는 미쳐 人事(인사)도 하기 전에 옷을 주워 입고 나서 우리를 三中井(삼중정) 食堂(식당)으로 인도하였다. 미상불[14] 맘성 좋은 친구로구나 하는 인상을 주는 친구였다. 그는 醫生(의생)으로서 相當(상당)經驗(경험)이 있기 때문에 收入(수입)은 어느 醫師(의사)에 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돈벌이 하는 醫生(의생)이라는 이보다도 그 동리 술집 아가씨네의 아버지라는 데에 그의 本職(본직)이 있다 한다. 그는 그곳 警察署長(경찰서장)에게 交涉(교섭)하여 抱主(포주)女子(여자)들과의 契約(계약)更正(경정)[15]하며 또 機會(기회)있는대로 그 女子(여자)들을 ()하여 새 살림을 차리게 하는 일과 ()에 걸리면 내 딸처럼 돌보아 주는 일 ()에 그의 收入(수입)의 거의 全部(전부)를 써버린다 한다. 그리하여 그 거리 遊女(유녀)[16]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를 따른다는 것이다. 그는 宋兄(송형)聖貧學社(성빈학사) 事業(사업)에도 全力(전력)을 기울여 도왔으며 敎會經理(교회경리)에도 있는 힘을 다 쓴다. 그는 하나님만 알고 돈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는 생기는 돈을 그날 그날로 다 흩어버리고 그 自身(자신)家族(가족)과 함께 如前(여전)히 이 구멍가게의 뒷골방에 不變(불변)貧者(빈자)로 지낸다. 다니며 보노라면 아니꼬운 친구도 있지만 이렇게 갸륵한 친구도 많은 것을 감사 안할 수 없었다.

 

宋兄(송형) 同行(동행). 버스로 海雲臺(해운대)()하였다. 똥장구 달구지를 지나고 지나 흰실같이 늘어진 新作路(신작로)에 먼지를 날리며 달아나는 버스여행도 무던히 愉快(유쾌)하였다. 大和室(대화실)이란 旅館(여관)에 들었다. 溫泉(온천) -르에 잠겨 반나절이나 지냈다. 旅館(여관)에도 溫泉休憩室(온천휴게실)에도 20左右(좌우)의 꽃다운 處女(처녀)들이 눈으로 웃음으로 노래로 이야기로 가고 오는 나그네의 피곤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나는 休憩室(휴게실) 煖爐(난로)옆에 가로누어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靑春(청춘)感激(감격)을 더듬어 보았다.

靑春(청춘)! 그들의 눈에는 꿈이 서리어 있다. 그들의 가슴엔 (), 그들의 입에는 노래가 있다. 그들의 ()은 부드럽다. 그들은 ()[17]()觸手(촉수)로 무엇을 붙잡으려고 憧憬(동경)한다.

() 御正月(어정월)[18]へるのが こわくて ならないのよ[19]하고 安子(안자)란 키적고 몹시 상냥스럽게 생긴 處女(처녀)가 말한다.

몇살이냐?하고 물었더니

싫어요!하고 목을 움츠리며 돌아 앉다가

스물하나하고 대답한다. 설새기 싫을 것도 事實(사실)이다.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20]이라. 靑春(청춘)은 그리 오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 오래지 않아 시들어질 꽃봉오리를 가슴에 안고 未知(미지)世界(세계)()앞에 서서 待望(대망)하며 떨고 있다. 人間(인간)으로서 다시 없는 가장 尊嚴(존엄)하고도 안타까운 情調(정조).

나는 내 靈魂(영혼)이 벌써 硬化病(경화병)[21]에 걸려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의 施律(시율)에 맞추어 울리기에는 나의 心琴(심금)은 너무나 굳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永遠(영원)靑春(청춘)保有(보유)하고 싶다.

, 靑春(청춘)幸福(행복)이여하고 나는 아무 로맨스도 없는 나의 過去(과거)를 돌아보며 쓰린 웃음을 던지었다.

아니다. 나에게도 로맨스도 많았다. 그것은 ()님을 ()한 로맨스였다. 나는 나의 있는 情熱(정열)을 다 바쳐 ()님을 仰慕(앙모)하였다.

앗시시, 푸랜시스의 心情(심정)이 곧 나의 그때 心情(심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近者(근자)에 와서 거의 非人間的(비인간적)이라고 하리만큼 感情(감정)痲痺(마비)에 걸리어 있다. 슬프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다. 났다, 죽었다, 앓는다, 괴롭다하는 온갖 人間生活(인간생활)斷面(단면)이 나에게는 거의 뜬 구름같이 보인다. 좋게하자면 達觀(달관)이랄지 모르지만 언찮게 생각하면 아주 鈍物(둔물)[22]이 되고만 셈이다. 이렇게 人間生活(인간생활)實感(실감)을 잃고서야 文學(문학)宗敎(종교)結局(결국) 한 개의 化石(화석)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나의 感激(감격)을 도로 찾아야 하겠다.

12() 20()

宋兄(송형)自動車(자동차)釜山(부산)에 보내고 나는 停車場(정거장)에 가서 京城行(경성행) 車票(차표)를 샀다. 車票(차표)釜山鎭經由(부산진경유)라고 했길래 나는 慶州經由(경주경유)로 가야 할텐데 잘못됐다니까 出札係員(출찰계원) 몹시 깔보며 나무람 하였다. 나는 여기서 京城票(경성표) 달라면 의례 慶州經由(경주경유)로만 되는 줄 알았습니다그려. 몰라 그렇게 했으니 未安(미안)합니다하고 紳士的(신사적)으로 될려고 무던히 애써 말씀을 사뢰였다.

그는 더 한층 輕蔑(경멸)히 여기는 모양이어서

몰라서? !하고 한참 쳐다보더니 慶州經由(경주경유)()를 바꾸어 써서 出札(출찰)밖으로 휙 팽게친다. 大監(대감)이나 된 듯이 뽐내는 것도 꼴사납지만 旅客(여객)[23]()하여 그렇게 失禮(실례), 不親切(불친절)驛員(역원)은 그대로 둘 수 없다고 골이 머리끝까지 치미는 것을 꿀꺽 참았다. 그러나 어느틈에 벌써 敎養(교양)없는 건 할 수 없어!하고 ()품은 ()을 중얼거려 버렸다.

나는 아직도 나를 죽이지 못했어!

내가 좀더 큼직했다면 왜 이런데 다 ()을 낼건가하고 時間(시간)도 아직 한 時間(시간) 남았길래 혼자 바닷가에 나갔다.

白砂(백사)[24]에 부서지는 고요한 물결, 56() 스쳐가는 흰돛 좋기는 하련만 事實(사실)은 아무 感興(감흥)도 일지 않는다.

 

앉으면 海月(해월)이오,

누우면 山月(산월)이라.

가만이 눈감으면

胸中(흉중)에도 明月(명월)있다.

五六島(오륙도) 스쳐가는 배도

明月(명월) 실고.

 

春園(춘원)海雲臺(해운대) 紀行文(기행문)一節(일절)이 제절로 읽어진다. 그러나 어렸을 때 春園(춘원)紀行文(기행문)에서 읽던 想像(상상)海雲臺(해운대)는 아무리 더듬어도 찾을 수 없었다.

나의 눈에 비취는 바닷물, 모래언덕 솔밭, 그리고 논두렁 旅舘(여관), 그런 것들은 다만 그런 것들 以上(이상)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 마음에 春園(춘원)()가 없으니 海雲臺(해운대)가 나에게 무슨 ()를 주랴! 나는 모래위에 ()친 발자욱을 돌아보며 내 靈魂(영혼)의 가을, 꿈이 사라진 내 가슴의 憤怒(분노)을 슬퍼하면서 海雲臺(해운대)를 떠난다.

()慶州(경주)()하여 달음질 친다. 숨었다 보였다 하는 東海(동해)의 푸른 물결은 진실로 아름답다.

慶州(경주)! 생각만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곳은 나의 聖地(성지). 나는 敬虔(경건)巡禮者(순례자). 午後(오후) 3() ()慶州驛(경주역)에 닿았다.

爲先(위선) 安東旅舘(안동여관)에 가방을 들여다 놓고서는 자리에 앉아도 보지 않고 ()밖에 뛰어 나갔다.

선물파는 집에 들어가 慶州(경주)史蹟(사적)傳說(전설)이란 ()을 사들고 그 옆에 있는 鳳凰臺(봉황대)라는 古墳(고분)(무덤이라기보다 ()이라는 것이 더 實感的(실감적)이다)에 올라가 두루 내려다 보았다. 百萬生靈(백만생령)이 욱신북신 하던 古都(고도)인 만큼 그 範圍(범위)가 무던히 넓다.

보아야 할 古蹟(고적)五里(5), 十里(10), 十五里(15) 이렇게 東西南北(동서남북)에 두루 널려 있어서 마치 누구의 庭園(정원)이나 漫步(만보)하듯이 아주 재미스럽게 걸어 다닐 줄로만 생각한 나의 幻像(환상)은 아주 깨뜨려지고 말았다. 나는 이틀동안 ()自動車(자동차)()汽車(기차)()徒步(도보)巡禮(순례)할 수 있는 데까지 巡禮(순례)하였다. 鮑石亭(포석정)[25], 蘿井(나정)[26], 三體石佛(삼체석불)[27], 五陵(오릉)[28], 半月城(반월성)[29], 石氷庫(석빙고)[30], 始林(시림)[31], 瞻星臺(첨성대), 雁鴨池(안압지)[32], 皇龍寺址(황룡사지)[33] 芬皇寺址(분황사지)[34], 財買井(재매정)[35], 蚊川(문천)[36]가의 허물어진 다리터들, 皇南里(황남리)王陵(왕릉)祀堂(사당)들 그리고 佛國寺(불국사), 石窟庵(석굴암) ()을 보았다. 이 모든 데에는 千年後(천년후) 王孫(왕손)의 가슴속에 눈물이 맺히게 할만한 由來(유래)傳說(전설)이 감돌고 있다. 나는 味鄒王陵(미추왕릉)에 절하고 財買井(재매정)의 물을 마시고 閼英井(알영정)[37]을 들여다보고 始林(시림)의 늙은 나무를 만지며 瞻星臺(첨성대) 돌에 뺨을 대어보았다. 千年前(천년전), 幽靈(유령)들이 이곳 저곳서 뛰쳐나와 나를 에워싸고 춤추는 것 같았다.

 

194012昭和(소화) 一五(15)


[각주]

  1. 羈旅(기려) - 객지에 머물거나 여행함
  2. 踏切(답체, ふみきり) - 철도선로와 도로가 교차하는 장소, (철로의) 건널목
  3. 올랑졸랑 키가 작은 사람들이 뒤따르는 모양
  4. 給仕(급사) - 회사나 관청 따위에서 잔심부름을 시키기 위해 고용하는 사람
  5. 一簞食 一瓢飮(일단사 일표음) - 도시락에 담긴 밥과 표주박 물이라는 뜻으로, 청빈하고 소박한 생활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6. 陋巷(누항) - 좁고 지저분한 거리나 마을, 자신이 사는 거리나 동네를 겸손하게 이르는 말
  7. 不改其樂(불개기락) -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다
  8. 이 부분은 논어에서 인용한 것이다. [子曰 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 回也 - 어질구나 안회여 한 대그릇의 밥과 표주박의 마실 것으로 누추한 동네에 사는 것을 남들은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거늘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구나 안회여]
  9. 여기까지 원본이며, 이후는 누락되어 있음 이후부터는 1971년에 편집 출간된 장공전집5권의 40쪽부터 45쪽에 수록되어 있는 본문을 참조하였음.
  10. 兩年(양년) - 두 해
  11. (못날 졸, 옹졸할 졸) - 못나다, 운이 나쁘다, 쓸모 없다, 솜씨가 서투르다
  12. 波浪(파랑) - 작은 물결과 큰 물결
  13. 野俗(야속) - 상스럽고 천한 풍속
  14. 未嘗不(미상불) -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게
  15. 更正(경정)하다 바르게 고치다
  16. 遊女(유녀) - 몸을 파는 것을 업으로 하는 여자, 고려시대에 기녀를 이르던 말
  17. (어릴 눈) - 어리다, 아리따운 모양, 엷다, 연약함
  18. 御正月(어정월, みしょうがつ 오쇼-가츠) - 정월 / 신정)
  19. 정월을 맞이하는 것이 무서워서 못견디겠어라는 의미
  20.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 -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뜻으로, 힘이나 세력 따위가 한번 성하면 얼마 못가서 반드시 쇠하여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21. 硬化病(경화병) - 사상균의 기생으로 곤충류, 거미류 등에게 발생하는 병
  22. 鈍物(둔물) - 둔한 사람이나 동물을 얕잡거나 낮잡아 이르는 말
  23. 旅客(여객) - 여행을 하는 사람
  24. 白砂(백사, はくしゃ) - 흰 모래
  25. 鮑石亭(포석정) - 경북 경주시 배동에 있는, 통일 신라 때의 연회 장소
  26. 蘿井(나정) -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나온 알이 그 곁에 있었다는 우물
  27. 三體石佛(삼체석불) - 경주 남산 삼불사(三佛寺)에 있는 삼존석불입상
  28. 五陵(오릉) -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에 있는 능묘(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알영 왕비,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의 능이라고 전해진다)
  29. 半月城(반월성) - 경북 경주시에 있는 반달 모양의 성
  30. 石氷庫(석빙고) - 신라 때, 얼음을 넣어 두던 창고.
  31. 始林(시림) -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에 위치한 숲으로 鷄林(계림)이라고도 불린다.
  32. 雁鴨池(안압지) - 경북 경주시의 북동쪽에 있는 신라 때의 연못
  33. 皇龍寺址(황룡사지) - 경북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신라 때의 절터
  34. 芬皇寺址(분황사지) - 경북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신라 때의 절터
  35. 財買井(재매정) - 경북 경주시 교동에 위치한 곳으로 신라 김유신 장군 집에 있던 우물
  36. 蚊川(문천) - 신라의 명소인 월성의 해자이면서 가장 가까운 강이다. 신라때 문천은 형상간을 거처 조운선이 출입할 정도로 큰 강이었다. 임진왜란 때에 경주의 의병들이 회맹했던 곳이다.
  37. 閼英井(알영정) - 박혁거세의 왕후인 알영부인이 탄생했던 곳의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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