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3권] (109) 北美留記 第三年 1976 - 스웨덴에 입양한 우리 애기들

스웨덴에 입양한 우리 애기들

 

197613() - 1선 민주운동 동지인 신필균[1] 양이 점심때쯤에 토론토의 내 사무실에 찾아왔다.

신필균은 이화대학을 졸업하고 스웨덴(서전)에 유학중이다. 이화대학 재학 중에도 민주운동의 선봉을 섰었다. 스웨덴은 한국 민주화에 열렬한 지원자로 나선 나라다. 스웨덴 정부에서 장학금을 설정하고 신필균을 스웨덴 정부 장학생으로 선정해서 지금 유학중이다. 와싱톤에서 가정생활하는 언니 만나러 왔던 길에 Toronto 내 사무실에 찾아온 것이었다.

그의 말 -

스웨덴 사람들은 한국 애기들을 양자Adapt[2]하는 일이 많은데 한국의 어떤 중개업자들은 부양능력 없는 딱한 한국 부모들을 설득하여 친권을 포기하게 하고 그 어린이를 스웨덴의 양부모에게 내어주는 모든 절차를 맡아 해주는 것이다. 스웨덴의 양부모들은 한국에 와서 애기를 타간다. 조막[3]만한 생명을 비니루 봉지에 넣어 들고 간다. 그 중에는 제법 큰 아이들도 있다. 7, 8세로 10대 소년까지 섞인다. 스웨덴 공항에 내리자 아이들은 각기 낯선 양코백이들에게 끌려간다. 제각기 혼자다. 철든 아이들도 그때에사 자기들이 팔려가는 것을 알게 된다. 마구 통곡하기 시작한다. 안 가겠다고 자기 부모들을 부르며 길바닥에 딩군다. 기진맥진하여 앉은채로 잔다. 서서 울던 아이들은 선대로 꾸벅꾸벅 존다.”

신필균 여사의 마음에는 차마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인상밖에 남지 않는다고 했다.

이렇게 입양한 한국 아이들 인구가 8천에서 1만명 선에 이르고 있단다. 오랜 후일에 어떤 역사가 형성될른지는 하느님만이 아신다. 그 후예에서 스웨덴의 요셉이 태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하느님은 고난을 통하여 영화(榮華)를 빚어낸다. 그러나 심판이 앞선다는 두려움이 있다.


[각주]

  1. 신필균 1947년 경기 남양주 출생. 1971년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스웨덴 스톡홀름대학교 사회학 석사를 마쳤다(1973). 스웨덴 사회보험청 책임연구원(1988~1995) 등을 역임하였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크리스찬아카데미 사회교육원 원장(1996~1999), 김대중 정부 대통령 비서실 시민사회비서관(1999~2002), 2006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총장에 선임되었다.
  2. 문맥상 adopt(채택하다, 입양하다)
  3. 조막 주먹보다 작은 물건의 덩이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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