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3권] (138) 野花園 餘錄 - 야화원 여록

야화원 여록

 

1976나는 주로 경용 효순 집에 있다. 아내는 이집 저집 애기 봐달라는 요청에 따라, “일소부재”(一所不在)[1]의 탁발승(托鉢僧, Mendican Priest)[2]처럼 떠돌이 노릇을 한다. “직업이 아니라 봉사.

둘째 며늘애 효순은 할머니를 부엌에 얼씬도 못하게 한다. “할머니를 아껴서 하는 일이다. 오늘도 혼자서 떡국 준비에 바쁘다.

Finch 막치기[3] Apt에 사는 은용, 행강은 못왔다. 하륜애가 열나고 기침하고 누워 앓기에, 곁을 떠날 수 없었단다. 점심 후에 인철ㆍ혜원과 지영, 영철 식구들, 저녁 때에 상철, 신자와 3자매, 모두 화려한 한복차림으로 세배한다.

수유리 막내들은 편지로 세배한다. 크리스머스 5일 전에 부친 편지가 바루[4] 오늘 아침에 들어왔으니, 그들도 세배꾼들 축에 든 셈이 됐다.

밖은 눈 속에 언 땅이다. 매섭게 춥다. 다 흩어지고 아이들도 자고 나 혼자 불꽃 튀기는 Fire-Place[5] 앞에 앉아 침울에 잠긴다. 고독의 축복이랄까, “언어불통의 바벨족속이랄까? 어쩐지 내 왕국은 아닌 것 같았다.

12() - 하륜 생일이라고 은용이네로 갔다. 행강이 터키[6] 굽고. 11시까지 맥주 마시며 T.V.보며 맛을 다셨다.

막내 식구들이 보고 싶지만 그런 내색을 안 보이려는 데서 우울이 뚜껑을 들먹이는 게 아닐까.

14() - 토론토 한인연합교회에서는 예배, 장로 임직, 집사 취임, 성찬식 등 행사가 순조롭게 진행됐다.

장로들의 다과 향연이 있었고 대학생회와 신필균 양의 좌담모임도 있었다. 나는 이 좌담회에 배석해서 신필균을 대학생들에게 소개했다.

15() - 금호동 정자에게 편지 회답을 보냈다. “정자는 늙은 부모에 대한 관심이 깊다.

2PM에 이남순[7] 여사가 와서 통일방안을 얘기하고, 민간지도자의 왕래가 빈번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7PMNKT. 전충림 사장 주선으로 토론토 민건간부 몇 사람과 함께 신필균 양을 주빈으로 중국 음식점에서 식사를 나누며 간담했다. 나도 초정돼서 동석했다.

16() - 스웨덴의 신필균이 12시 비행기로 토론토를 떠났다.

18() - 하령의 아빠 경용의 생일이다. 효순은 선물 사고 디너차리고 정성껏 남편을 즐겁게 한다.

나는 이빨이 쑤셔서 기분이 제로.

나의 건강기후에는 변덕이 많다. 아푸다, 안 아푸다, 우울하다, 즐겁다, 뭔가 잘못된 데가 있는 것이 아닐까! 아내는 나보다 더 쇠약해진 것 같다.

다섯 살짜리 손주 하령, 늦은 밤인데도 두 번이나 할아버지침대 옆에 들어와 “Good Night Kiss”를 하고서는 할아버지 가지 말아요!” 한다. 조손(祖孫)간의 사랑이다.


[각주]

  1. 일소부재(一所不在) -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아니하고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 다니다.
  2. 탁발승(托鉢僧) - 경문을 외면서 집집마다 다니며 보시를 받는 승려
  3. 막치기 마구잡이로 조잡하게 만들어 질이 낮은 물품
  4. 바루 바로(특정한 대상을 집어서, 다른 것이 아니라 곧)의 비표준어
  5. Fire-Place - 벽난로
  6. 터키 - 칠면조
  7. 이남순(1922~2013) - 현재 울산광역시인 경상남도 울산군 출생. 동덕여고를 거쳐 일본여자대학 사범과를 졸업하고 1944년에 돌아와 해방전까지 모교에서 육아과목을 가르치다 박상철 씨와 결혼했다. 한국 전쟁 이후 남편 사업을 돕다 419 혁명과 516 쿠데타 혼란기를 겪은 뒤 1964년 브라질로 이민하였다. 이후 1968년 캐나다로 재이민해 38년간 살다가 2006년 귀국하여 제주도에 정착하였다. 캐나다에서 사회주의 성향의 통일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환갑 무렵인 80년대 초반 영성공동체인 에미서리와 인연을 맺고 영적 수행의 길을 걸었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 최고의 금광왕이자 대동주의자였던 이종만 씨로(1885~1977) 씨로 1949년 평양에서 열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 참가하러 갔다가 북에 남았으며 김일성은 그를 애국적 기업가라고 치하했다. 이종만 씨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힌 유일한 자본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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