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일 월요일

[범용기 제3권] (22) 15인 민주선언과 학생궐기 - 재야 민주원로들 모임

재야 민주원로들 모임

 

19731213YWCA 알로하홀에서 모인 민주원로회의도 사실은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간부들이 주최한 것이었다. 이 모임이 실현되기까지에는 장준하가 무던히 수고했다. 가톨릭의 김수환 추기경도 나왔다. 신교측에서는 한경직을 나오게 할 작정으로 그 임무를 내가 맡았다. 두어번 찾아갔었고 모이는 당일 오는 길에 들러서 데리고 나왔다. 이분들이 정계의 원로라지만 과거의 경력으로 볼 때에는 정적()이던 쓰린 기억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종교계로 치더라도 가톨릭과 신교, 유교, 천도교, 불교 등등의 다른 충성대상을 갖고 있는 분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 이렇게 한자리에 모였다는 그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계훈제가 사회하고 천관우가 취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내가 인사말씀이라고 했다. ‘말씀이래야 간단한 것이었다. “민주한국이 독재에로 급전직하[1]하는 위기에 있어서 민주정치의 원로되시는 분이 한자리에 모일 기회라도 마련되기를 바라왔습니다. 그 우리의 숙원이 이루어져서 오늘 이렇게 모실 수 있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여러 어른들을 한자리에 모시게 되는 순간, 우리 임무는 끝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여러분의 모임입니다. 말씀들 하십시오.” 했다. 한참동안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어느 분인가가 말을 꺼냈다.

이렇게 모일 기회란 좀처럼 만들기 어려운 건데 주최하신 분들의 수고를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왕 모였으니 우리 서로 기탄없이 얘기해 봅시다한다.

그리고 회 진행을 위해서 좌장을 한 분 모시기로 합시다. 그런데 우리가 알기로는 백낙준 박사가 최연장자신데 백 박사님 사회하시지요.”

만장일치였다.

결의된 중요사항은 -

자유민주한국을 회복하려는 우리의 목표는 더 토론할 것도 없는 명제로 채택하고

우리 낫살[2]이나 먹은 사람들이 모였다가 또 성명서나 내고 헤어진다는 것은 쑥스러운 일이니 박 대통령에게 직접 면담을 요청하자.

그러나 면담이 허락된 때에도 이쪽에서 말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에 대비하여 우리의 말하려는 내용을 서면으로 작성하여 동시에 제출할 수 있도록 준비하자.

등등이었다.

 

3항의 얘기는 김수환[3] 추기경이 자기 경험에서 하는 말이었다. 김 추기경은 세 번 박정희와 만났는데 세 번 다 의 초청에 의한 것이었다 한다. 한 번은 진해에서, 두 번은 청와대에서였는데 세 번 다 식사를 같이하자는 것이었다. 교회로서의 반정부운동이 표면화한 무렵이었는데 진해별장에서 일부러 초청이 왔었다.

식사시간에 식탁에서 만나도록 짜여 있는 프로였다 한다.

식탁에 앉아마자, 박정희 씨는 자기 얘기를 끄집어낸다. 시국담에서 시정방침에서, 얘기는 그칠 새 없다. 손님은 말 끄어낼 짬이 없게 군다. 그래서 듣기만 하다가 의 얘기 끝날 무렵이면 비서장인가가 들어와서 각하! ○○ 가실 시간입니다한다. ‘, 그래?” 하고서 자리를 뜬다. 그 밖에도 두 번 청와대 초청에 응했었는데, “이번에는하고 말할 항목을 외이다싶이 해 갖고 들어간다. 그러나 여전하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면담했다는 실속없는 선전재료에 이용되지 않기 위해서 미리 서면진술을 준비하자는 것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말했다.

신문사에서는 그때마다 김 추기경이 박 대통령과 직접 면담했다. 박 대통령은 추기경을 만찬에 초청하여 단독회담했다등등으로 보도된다. 그래서 가톨릭은 친여로 변질된 것 같이 보이고, ‘은 기독교에 관대하다는 인상을 받고이래저래 만 손해보고 이용당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이 그럴듯해서 문서기초위원과 면담위원을 선출했다. 기초위원으로서는 천관우, 김재준, 유진오[4]가 선출되고 면담위원으로서는 유진오, 함석헌, 이인[5], 백낙준[6], 김수환 등이 선출되었다.

초안은 곧 작성되었다. 천관우가 기초하고 김재준, 유진오가 수삼차 검토하고 마감으로 면담위원들과 최종검토를 했다. 유진오 씨는 법률가니만큼 무척 신중하고 단어 선택에 정확을 기하는 것이었다. 수정에 수정을 가했지만, 자구와 용어 문제였고 내용이 고쳐진 것은 아니었다.

마감으로 면담위원들과 검토할 때에는 유진오가 축조 낭독하며 검토를 받는 책임을 졌다. 그때에는 주로 이인씨가 비판을 했다. 그분도 법률전공이라 허술한 데가 없었다. 주목되는 것은 우선

탄원서라는 용어가 제거됐고,

박대통령 각하에게라는 구절도 제거되었다.

각하가 다 뭐냐는 것이다.

건강을 빕니다도 빼버렸다. 마감에 붙이는 인사 하나님의 축복을 빕니다등도 물론 제거됐다.

글 이름은 진정도 탄원도 아닌 건의서로 되었고, 우리의 건의내용 이외의 다른 아무 군소리도 섞이지 않았다.

이것을 장지에 활자로 인쇄하여 15인 연서로 청와대에 갖고 가기로 했다.

면담신청은 절차대로 제출됐지만 아무 화답도 없었다. 그래서 19731219일에 이미 준비된 건의서를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직접 수교했다.


[각주]

  1. 급전직하(急轉直下) - 사태나 형세가 갑자기 바뀌어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진행됨
  2. 낫살 지긋한 나이를 낮잡아 이르는 말
  3. 김수환(金壽煥, 1922~2009) - 본관은 광산(光山). 1922년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세례명은 스테파노이다. 조부 김보현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아버지는 김영석, 어머니는 서중하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막내로 출생하였다. 194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 졸업, 1947년부터 1951년까지 가톨릭대 신학부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1951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66년 주교, 1968년 대주교,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4. 유진오(兪鎭午, 1906~1987) - 호는 현민(玄民).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와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수석으로 입학, 19264월 동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하였다. 1929년 경성제국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933년부터 보성전문학교 전임강사, 1937년에 보성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중일전쟁 이후에 친일활동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문인의 길을 접고, 교육자, 법학자, 정치가의 길로 나섰다. 1948년 대한민국 헌법기초위원으로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였고, 1953년 고려대학교 총장에 취임하였다. 1966년 민중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는데, 19671월 민중당과 신한당이 합당한 신민당에서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로 하고 자신은 총재로 취임했으며, 7대 국회의원에 종로구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5. 이인(李仁, 1896~1979) - 호는 애산(愛山). 일제강점기 의열단 사건, 광주학생사건, 수양동우회 사건, 안창호 사건 등을 맡은 법조인. 초대 법무장관이 되었으나 이승만과 뜻이 맞지 않자 물러났다.
  6. 백낙준(白樂濬, 1895~1985) - 1985년 평북 정주군 관주면 출생으로, 장로교 목사이며 역사학자로 호는 용재(庸齋)이다. 1913년 선천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신성학교 교장인 매큔(G. S. McCune)의 도움으로 중국을 거쳐 미국으로 갔다(19169). 매큔의 모교인 미주리 주 파아크대학에서 서양사를 전공하고(19226), 미국 프린스턴(Princeton) 신학교에 들어가 19259월 졸업하였다. 바로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 대학원에 입학해 종교사학을 전공하여 1927조선개신교사로 예일대학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 교장, 연희대 총장, 연세대 총장,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문교부장관에 취임 후 교육행정가로 활동하였다. 1960419 의거 이후 참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고, 8월 초대 참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19669월 민중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으나 고사하였고, 1967년 민중당과 신한당 양당의 합당추진을 지지하면서도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19802월 국정자문회의 위원, 19832월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하였다. 1985113일 사망하여,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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