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일 월요일

[범용기 제3권] (54) 北美留記 第一年 1974 - 국회 분과위원장들의 “얼굴”

국회 분과위원장들의 얼굴

 

와싱톤에서는 Korea desk의 레이나드 한국부장을 찾아 자세한 한국내막을 알렸다. 그는 공감하는 태도로 경청했다. 떠날 시간이 되어 네 콤멘트는 어떤 거냐?”고 물었더니 나는 Policy maker가 아니고 이미 만들어진 Policy를 집행하는 자리에 있으니 콤멘트말할 자격이 없소한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을 움직여서 행정부에 압력이 갈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당신들께 남아 있다고 하면서 미안해했다. 한국 민주화 운동에 대한 그의 숨은 공적은 크다.

외교위원회 차장(?)이라나 하는 자브로스키인가 하는 사람을 찾아갔다. 그는 노골적인 친박파인 것 같았다. “의 초청에 따라 미국 국회의원 백명 가까이를 인솔하고 한국에 갔다온 것이 바로 며칠 전 일이라고 한다.

그는 보고서를 작성해서 방금 배부하는 중이었다. 경제부흥, 국방안전, 민심 평온 등등을 높이 찬양한다.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 서강대학 졸업식에 참석했고 거기서 명예학위도 받았다고 한다. 박정희 따님[1]도 그 학교 학생인데 박정희도 학부형 자격으로 그 졸업식에 참석했더란다. 그렇게 검소하고 평민적일 수가 없더라는 것이었다.

그건 한국 정부 대변인들에게서 듣는 말 그대로니까 잘 알고 있소이다하고 나는 나와 버렸다. 다음으로는 뿌름필드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총무감이라고들 한다. 그는 껄껄대며 자기가 개방적임을 가장한다.

미국이 무얼 해주기를 바라느냐?”고 묻는다. 나는 미국이 한국에 무얼 해주기를 바라서 온 사람이 아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이 노상 없는 것이 아니라 전제하고서 -

미국이 건국 초기의 자유, 평등, 정의, 박애 등 건국이념, 다시 말해서 청교도 시대의 이상주의 위에서 자기 역사와 세계 역사를 주름잡는 나라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염원이 있다. 국가 이익(National Interest)이 정치 전반의 가치 기준이 된다는 것은 자유진영의 맹주라는 미국으로서는 지나친 실리주의가 아닐까 싶다고 설교 비슷한 원칙론을 얘기했다. 그때는 마침 미국 건국 2백년 축제 계절이었기에 제절로[2] 이런 말이 나온 것이었다.

미국이 돈 많은 나라라는 그 자체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그 돈을 어떻게 벌어서 어떻게 뭣 때문에 쓰느냐가 영광과 치욕의 갈림길이 아닐까 싶다. National Interest보다도 National Justice를 앞세운다면 모든 나라가 미국을 부러워하는 대신에 미국을 존경할 것이다……

 

그는 너털 웃음으로 얼버무린다.

글세, 미국도 어디 큰소리 치게 됐어요? Watergate니 뭐니 해서……

마감으로는 외교위원회 위원장 대리라 하는 울프를 만났다. 그는, 김대중 씨를 살린 것은 자기였다면서 자유를 위한 운동에는 발 벗고 앞장서는 것이 자기 성격이라고 한참 자기 선전에 열중했다. “민통이근팔[3] 국장과 문명자[4] 부부가 면담 교섭, 소개, 통역 등에 수고해 줬다.

“Washinggon Post”, “Religion” 난에도 Interview 기사가 났다.

와싱톤 강연회는 김대중 씨 떠난 다음의 미완성 민통[5]을 지키고 있는 안병국[6] 목사가 사회했다. 그 때에도 나는 위 아래 수염을 그대로 두고, 머리는 몇 달째 안 깎아서 뒷덜미를 눌렀다. 그는 강연회에서 나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함석헌 옹은 수염을 깎고, 한신대 교수 학생들은 바울의 맹세 표적처럼 머리를 빡빡 면도로 밀었는데 장공은 머리고 수염이고 모두 길르는 것으로 항거의 표를 삼았다. 그래서 지금 저 꼴이오……

송승규 군이 국회 도서관 매점에서 선물로 사준 육중한 손가방이 십년내내 방랑의 괴나리봇짐[7] 노릇을 한다.


[각주]

  1. 박근혜를 말함
  2. 제절로 - ‘저절로의 방언
  3. 이근팔은 한국 외무부(현재 외교통상부) 직원 출신으로 샌프란시스코 영사관과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하다가 1970년 공직을 떠나 미국에 눌러앉았다. 이후 여행사를 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처남 이성호 씨를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1980년대 제2차 망명 생활을 하던 때는 비서실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활동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연합뉴스 2009819일 기사]
  4. 문명자(Julie Moon, 1930~2008) - 재미 교포 언론인.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MBC TV 주미 특파원으로 근무했고 미국여기자협회 부회장, 미국기자협회 이사를 역임했다. ‘줄리 문이라는 이름은 소설 대지를 쓴 펄벅이 지어준 것이다. 경상북도 금릉군에서 태어나 숙명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작가 박완서와 동창), 메이지 대학 상학과, 와세다 대학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전공하였다. 대한민국 출신 기자 최초로 덩사오핑과 김일성을 인터뷰하였다. 김대중 납치 사건 보도와 이후락 정보부장 비난 발언 등으로 신변 위협을 받자 197311월 미국에 망명을 신청하였다. 1999년 회고록 격인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을 출간하였다.
  5. 민통은 미주의 한국민주화운동의 핵심이다. 김대중이 19737월 미국에서 한국 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 미주본부’((Korean Congress for Democracy and Reunification in North America)(약칭 한민통미주본부)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미국에서의 본격적인 민주화운동조직의 시작이었다.김대중은 한민통미주본부를 결성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한민통일본지부 결성을 준비하던 중 한국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당하게 된다. 김대중의 납치로 위기에 빠진 한민통미주본부는 조직을 새로 다지고 새로운 헌장을 마련하기위해 197411월 워싱턴 D.C.에서 모임을 갖고 2대 의장에 김재준을 선출했다. 이후 한민통미주본부는 보수와 진보를 망라한 전국적 단일조직을 지향하며 1977년 한국민주화연합운동(UM, The United Movement for Democracy in Korea)으로 재편의 길을 밟는다.
  6. 안병국 목사는 워싱턴한인침례교회(구 제일침례교회)19583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고 이후 안디옥 침례교회 초대 담임을 맡았다. 미주 남침레회 한인교회 5대 총회장과 워싱턴지역교역자회 10대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1976년까지 김재준 목사가 대표로 있던 한민통대표를 맡았다. 201085세의 나이로 소천하였다.
  7. 괴나리봇짐 먼 길을 떠날 때 짊어지고 가는, 자그마한 보자기로 꾸린 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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