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2일 화요일

[범용기 제3권] (62) 北美留記 第一年 1974 - “민통” 총회에 갔다

민통총회에 갔다

시일 - 19741123

 

민통이란 이름은 한국 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의 약칭이다. 김대중 씨는 와싱톤에 주재할 동안에 그의 정치거점으로 조직을 서둘다가, 일본에도 같은 조직을 만들어 동시에 발족하려는 큰 뜻을 품고 일본에 갔다. 일본에도 조직은 됐다. 그러나 그가 88일 동경 프린스 호텔에서 박 정권 정보부대에 납치되자 일은 미완성으로 좌절됐다.

그후 와싱톤 민통과 동경 민통은 가인아벨처럼 성격을 달리했다. 그러나 김대중 씨는 두 군데 다 제1대 의장이었다.

와싱톤에서는 안병국 목사가 이 미완성 조직체를 떠맡았고 이근팔 씨가 실무자로 일생의 천직인양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없는 민통은 시민의 정열에 불을 돋우지 못했다. 운영비도 말랐다. 체납된 전화료 때문에 전화를 떼우는 형편이었다. 납치된 김대중의 정치 아지트에 돈 내고 의심받을 필요가 뭐냐 하는 것이 일반시민의 여론이었다. 그러므로 민통이 살 길은 어느 개인 정치가의 정치 운동 지점이란 테두리를 벗어나 범민주국민운동 본거지로 도약발전하는 길 밖에 없었던 것이다. 간판은 같으나 내용은 발전적으로 지양[1]되지 않을 수 없었다. 와싱톤 민통본부에서는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밤낮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헌장 초안 작성 위원회가 선임되어 거의 완성 단계에 들어갔다. 새 헌장 통과와 그 헌장에 따른 기구개편 총회가 소집됐다. 와싱톤 사무당국에서는 장공에게 축사를 부탁해 왔다. 김대중 씨가 남긴 사업에 축사쯤은 당연한 의무라 느끼어 1121일 와싱톤에로 날았다. 김대중 씨가 유숙하던 메이풀라워 호텔에 들었다.

1123 오전 10시에 개회하여 동원모 부의장 사회로 의사가 진행됐다. 우선 헌장 초안 독회가 있었다. 축조 토의하여 약간의 수정을 거쳐 통과했다. 새 헌장에 의하여 의장 한 명을 추대한다. 회원의 투표가 결정한다. 대회에 참가할 때, 회비로 8불을 내면 투표회원이 된다. 나는 단 위에서 회원석을 살펴 봤다. 세 갈래의 성분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은 정통적인 민주회원 그룹이고 (2)는 평상시에는 얼굴 한번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현장에서 8불씩 내고 회원된 사람들이고 (3)은 전혀 흥미를 갖지 않는 방관자 그룹이었다. (1)(2)는 수가 비슷했다. (3)은 소수여서 입구 구석진 모새기에 앉았다가 중도에 나갔다.

(1)은 장공을 추천한다. (2)는 임창영을 민다. 임창영은 절대사퇴를 선언하고 일장 연설한 다음에 퇴장태세를 취한다. 나도 절대 사퇴를 선언했다. 투표하기로 의결되어서 무기명 투표, 그 결과로 내 표가 몇 표 더 많았다. 나는 기어코 승낙을 거부했다. 임창영은 퇴장했다.

민윤기 박사가 특별 발언을 했다.

우리가 어른을 추대하면서 투표한다는 자체가 잘못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사과드리고 일제 기립하여 장공 선생을 의장으로 모십시다한다. “옳소하고 함성을 올리며 일제 기립하여 박수했다.

그래도 나는 승낙을 거부했다. 거부하는 이유로서는 원격한 딴 나라인 캐나다에 살면서 일체 내무를 감찰지도할 시간도 능력도 없다는 것이다. 여기 저기서 쪽지가 들어온다. (1)은 지금 장공이 수습하지 않으면 민통은 저절로 해체되고 다시는 세워낼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이고 (2)는 우리가 여기까지 밀어온 전공이 가석하게 된다[2]는 것이었다.

, , 중간 등 다른 성분인들의 집합이산(集合離散)에 견뎌낼 뿌리가 내려지지 못했다고도 한다.

그것도 그럴 것 같았다. 낫살이나 먹은 것이 돕지는 못해도 망개놓고 간다는 것이 부끄럽고 창피한 도망자일 것이다. 나는 승낙했다.

시정연설(?)이랄까 취임사랄까를 뺑퀐 장소인 중국식당 황후에서 발표하고 산회했다.

김대중은 명예의장으로 추대됐다.[3]


[각주]

  1. 지양(止揚) - 더 높은 단계로 오르기 위하여 어떠한 것을 하지 아니함
  2. 전공가석하다 애써 한 일이 보람없이 되거나 공을 세운 이가 도중에 일을 크게 망치어 안타깝다. 이전에 세운 공로가 아깝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3. 김대중은 한민통미주본부를 결성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한민통일본지부 결성을 준비하던 중 한국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당하게 된다. 김대중의 납치로 위기에 빠진 한민통미주본부는 조직을 새로 다지고 새로운 헌장을 마련하기위해 197411월 워싱턴 D.C.에서 모임을 갖고 2대 의장에 김재준을 선출했다. 김재준은 한국신학대학의 교수로서 1970년대 초까지 한국에서 민주화운동에 깊이 관여하다가 정부의 탄압이 심화되자, 1974년 초 캐나다의 토론토로 와 있었다. 그와 김재준의장과 같이한 한민통미주본부의 임원진으로는 명예의장에 김대중, 부의장에 이용운, 동원모, 고문에 김상돈, 전규홍, 안병국, 이재현, 송정율, 김성락, 최석남이 추대되었다. 또한 한민통은 전국적 조직임을 표방하고 출범하였기에 한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는 미국의 주요도시에 조직을 두었는데, 1975년 당시의 지역을 대표하는 중앙상임위원과 임원직책명단은 다음과 같다. 중앙위원은 15인으로 김응찬, 이근팔(와싱턴), 김원국, 이승만(뉴욕), 송영창, 고종구, 김운하(로스앤젤레스), 강한수, 최명상(시카고), 이하전, 송선근(샌프란시스코), 김동건(세인트루이스), 김장호(보스톤), 전계상(씨아틀), 이상철(토론토), 정책기획연구실장(이재현), 징계위원장(안병국), 사무총장(강영채), 조직위원장(김응창), 재정위원장(이성호), 홍보위원장(정기용), 사무차장(이근팔)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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