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8일 목요일

[범용기 제4권] (104) 독립을 향한 선렬들의 가시밭 행군 - 독립 한국을 향한 가시밭 행군(그래도 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독립 한국을 향한 가시밭 행군

- 그래도 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

 

일청, 일로전쟁을 지내고 1905~1906 “乙巳(을사)보호조약[1]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에 반대하여 의분자살한 지사들 이름만도 민영환[2]을 비롯하여 조병세[3], 홍만식[4], 이한응[5], 이상철[6], 전봉학, 송병준 등등이고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전투한 장군들은 경기도에 허조(許蔦), 유명규[7], 조인환[8], 권준[9], 이은찬[10], 강원도의 민긍호[11], 이린영[12], 김덕제[13], 이언영, 정대일[14], 경상도에 이강령, 신돌석[15], 변학기[16], 유명룡, 최성천[17], 전라도에 김동식[18], 이학사[19], 김해산, 충청도에 지룡기[20], 이인재, 황해도에 이진룡[21], 민효식[22], 김정안[23], 평안도에 량혁진, 이승훈, 함경도에 차도선[24], 홍범도[25], 이범윤[26], 송상봉[27] 등이었다. 동원무장된 의병의 수가 143464, 일본군과의 교전 회수가 2874회로 기록되어 있다.

1908년에 전명진[28], 장인환[29]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의 한국 지배를 당연, 또는 불가피한 것으로 미국에 선전하러 오는 미국인 스티븐스를 총살했고 19091024일에 안중근은 할빈 역에서 이등박문을 암살했다.

그러나 1910822일에 데라우찌’(寺內正毅) 통감은 이완용 내각을 조작하여 어전회의에서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했다.


[각주]

  1.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 대한 제국기, 1905년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맺은 조약
  2. 조선 고종 때의 문신(1861~1905).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이다. 특명 전권 공사로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에 특파되었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폐기를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고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3. 조병세(趙秉世, 1827~1905) - 철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1889년 우의정을 거쳐 1893년 좌의정이 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관제가 개혁되자 사직하고 가평에 은거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을사 5적신의 처형을 황제에게 간청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이루지 못하였다. 심상훈ㆍ민영환 등과 함께 여러 날 궁궐에 머물며 을사조약의 무효를 상소하다, 왜군에게 강제로 끌려가 해산되었다. 그러자 각국 공사 및 동포에게 보내는 글과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향년 79.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4. 홍만식(洪萬植, 1942~1905) -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백헌(伯憲), 호는 호운(湖雲). 서울 출생.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의 아들이며 홍영식(洪英植)의 형으로, 교관(敎官) 홍순경(洪淳敬)에게 입양되었다. 그러나 1884년 아버지 홍순목이 의복제도의 개정을 반대하다가 삭탈관직되자 이 때 관직을 사직하였다. 같은 해 동생 홍영식이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키다가 실패, 역적으로 몰려 사형당하자, 아버지 홍순목은 자살을 하였고 그도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복역하였다. 1894년 관직에 복직되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지방제도 개혁 때 춘천관찰사에 제수되어 여러 번 부임하라는 독촉을 받았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이 해 8월 일제에 의하여 민비(閔妃)가 시해당하고 단발령이 내리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다시 음독자결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5년 일제에 의하여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음독자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은 그 충의를 높이 평가, 숭정대부 참정대신(崇政大夫參政大臣)에 증직하고, 장례를 후히 지내게 하였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5. 이한응(李漢應, 1874~1905) - 본관은 전의(全義). 일명 한응(漢膺). 자는 경천(敬天), 호는 국은(菊隱). 경기도 용인 출신. 이경호(李璟鎬)의 아들이다. 1892년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를 졸업하였다. 1894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1897년 한성부주사가 되고, 1899년 관립영어학교 교관으로 전출하였다. 1901년 영국ㆍ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참사관(駐箚公使館三等參事官)에 임명되어 영국 런던으로 부임하였다. 19042월 한일의정서가 강제 체결되어 한국의 독립이 흔들리자, 영국 및 여러 외국과 유리한 입장에서 외교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그 해 8월 제1차한일협약이 강제로 성립되어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잠식하자, 각국에 주재하는 우리 공사들에게 전신으로 연락, 한국 외교를 위하여 재외사절단이 공동 항쟁을 하도록 토의하였다. 또한 영일동맹의 부당함을 들어 영국 정부에 항의하였다.그러나 영국 정부가 주영 한국공사관을 폐쇄하는 등 영일동맹을 강화하고 일본이 한국 정부의 주권을 강탈할 음모를 획책하자 이를 개탄하여 1905512일 음독자살하였다. 이러한 소식이 후에 국내에 알려져 을사조약 때는 민영환(閔泳煥)ㆍ조병세(趙秉世) 등이 순국하는 등 전국 각지에서 원통함을 참지 못해 자살하는 이가 속출하였다.
  6. 이상철(李相哲, ?~1905) - 대한제국기 학부주사를 역임한 관료. 지사. 학부주사로 있던 중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30세의 나이로 음독자결하였다. 학부협판(學部協辦)에 추증되었다.
  7. 유명규(劉明奎 ?~1907) - 일명 유명계(劉明啓). 경기도 통진(通津) 출신. 19078월 한국군이 강제해산될 때 진위 제1대대 강화분견소 참교를 지내다가 89일에 원주 진위대의 봉기소식을 듣고 부교(副校) 지홍윤(池弘允)과 함께 주민 500명의 호응을 얻어 사졸 50명과 더불어 무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봉기를 도모하였다. 이들은 먼저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를 쓰러뜨린 뒤 이어서 군아(郡衙)로 달려가 친일 군수이며 일진회 총무인 정경수(鄭景洙)를 처단하고 강화성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일군사령관은 진위대 소속 일인교관에게 보병 1개 소대와 기관총 2문을 주어 진압하도록 군대를 출동시켰다. 이에 이들에게 쫓겨다니다가 96일 통진에서 잡혀 총살당하였다.
  8. 조인환(曺仁煥) - 본관은 창녕(昌寧). 경기도 양평 출신. 1907년 충청도에서 농민을 규합하여 의병부대를 편성한 뒤 경기도 임진강 유역을 중심으로 항일의병전쟁을 전개하였다.
  9. 권준(權俊) - 경기도 적성 출신. 의병장으로 경기도 북부지방에서 활동했다. 1907년 경기도 파주(坡州), 적성 등지에서 의병장으로 3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인환(曹仁煥)ㆍ왕회종(王會鍾)ㆍ김진묵(金溱默) 등과 함께 임진강(臨津江) 유역에서 활동을 전개했다.
  10. 이은찬(李殷瓚, 1878~1909) - 본관은 전주(全州). 일명 언찬(諺瓚헌찬(憲瓚). 강원도 원주 출신이다. 1907년 고종의 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각지에서 의병이 다시 일어나자, 그 해 9월 이구재(李九載)와 더불어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3도의병연합부대가 이인영 총대장의 부친상으로 무산된 후 유격전술로 일본군과 싸웠다. 1909년 간도로 들어가 적극적인 항전을 계속할 계획을 세웠으나 서울에 있던 박노천(朴魯天)과 신좌균(申左均) 등이 이와 같은 계획을 탐지하고 군자금을 제공하겠다는 미끼로 서울로 유인하였다.그들의 말을 믿고 331일 서울에 잠입하여 용산역에 나타났다가, 잠복하고 있던 일본경찰에 잡혀 1909년 경성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하였다.
  11. 민긍호(閔肯鎬, 1865~1908) - 본관은 여흥(驪興). 서울 출신. 1897년 원주진위대 고성분견대의 정교(正校)를 지내고, 뒤에 춘천분견대에 전입, 1901년 특무정교가 되고 원주진위대에 전입되었다. 19078월 일제가 원주수비대를 해산하려 하자 약 3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원주 우편취급소와 일본경찰을 습격, 3시간 동안 격전하였다. 그 뒤 의병부대를 소단위의 의병부대로 재편성하여제천ㆍ죽산ㆍ장호원ㆍ여주ㆍ홍천 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쳐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1908229일 일본군과 접전했을 때, 의병 20여 명이 사살되고 민긍호는 사로잡혀 강림으로 호송되었다. 그날 밤 부하 60여 명이 강림을 습격해 탈출하려 하다가 사살되었다. 민긍호가 거느린 의병부대는 당시 강원도 일대에서는 가장 세력이 큰 부대였다강원도ㆍ충청도ㆍ경상도로 전전하면서 모두 10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12. 이인영(李麟榮, 1867~1909) - 일명 준영(竣榮). 경기도 여주 출신.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閔氏)가 시해되고 이어서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인석(柳麟錫)ㆍ이강년(李康秊) 등의 의거에 호응하여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유인석의 제천전투에도 참여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가 경상북도 문경으로 이주, 은둔 생활을 하면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국권 회복을 위한 의병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했으나, 때마침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있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 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이를 계기로 의병 활동을 재기, 일부 해산당한 군인과 손을 잡았다. 뒤이어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은찬(李殷瓚)ㆍ이구재(李九載, 본명은 求采)가 해산 군인 80명을 포함한 500명의 의병을 모집한 뒤 이인영을 찾아와 총대장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있어 망설였으나, 사사로써 공사를 미룰 수 있겠느냐는 간곡한 권유를 받아들여 원주로 출진,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에 오른 뒤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였다.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각 도에 격문을 보내 경기도 양주로 모일 것을 촉구했는데, 11월에 격문에 호응한 각 도의 의병장들이 속속 양주로 모여들었다. 이 때 양주에 모인 의병 수는 약 1만여 명(또는 8,000)으로, 그 중에 근대식 무기를 가진 진위대 출신 병사와 기타 훈련받은 군인이 약 3,000명이었다. 13도 의병장들의 연합전략회의 결과 원수부13도총대장에 추대되어, 전병력을 24진으로 하는 13도의병연합부대를 편성하였다. 의병부대는 서로 기일을 정하고 서울 동대문 밖에 모여서 대오를 정비한 뒤 일거에 서울을 공략할 작전계획을 세우고 진격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이 중대한 시기에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전해져 문경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장례를 마쳤다. 그 뒤 여러 차례 의병들이 찾아가 재기할 것을 권유했으나, 아버지의 3년상을 마친 뒤 다시 13도의 창의군을 일으켜 권토중래(捲土重來)의 세력으로 일본인을 소탕하겠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뒤 노모와 두 아들을 데리고 상주군에 숨어 살다가 다시 충청북도 황간군 금계동으로 옮겼는데, 190967일 일본 헌병에게 잡혀 경성감옥에서 죽었다.
  13. 김덕제(金德濟) - 강원도 원주 출신. 19078월 군대해산 당시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 정위로 81일 서울 양시위대 항전의 소식을 전해 들은 진위대의 애국병사들은 봉기하려 하였으나 대대장인 참령 홍유형(洪裕馨)의 무마로 일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홍유형이 상경하자 특무정교(特務正校) 민긍호(閔肯鎬)와 함께 봉기할 것을 계획하고 동지를 규합하였다. 85일 진위대 병사 250명을 거느리고 원주의 우편취급소ㆍ군아(郡衙)ㆍ경찰분서ㆍ일본인가옥을 기습하고 원주읍을 완전 장악하였다. 810일에 의병진압대가 도착하자 항전을 계속하였으나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의병을 거느리고 양양ㆍ간성ㆍ고성 등지에서 계속 분전하였다.
  14. 정대일(鄭戴一) - 구한말 예천을 지킨 의병장
  15. 신돌석(申乭石, 1878~1908) - 본관은 평산(平山). 본명은 신태호(申泰浩), 자는 순경(舜卿), 이명은 신돌석(申乭錫신태홍(申泰洪신태을(申泰乙신대호(申大浩). ‘태백산의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불렸다. 경상북도 영해(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출신. 아버지는 신석주(申錫柱)이다. 신돌석은 한말 의병투쟁에 있어서 평민 출신의 의병대장으로는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민중적 기반 위에 막강한 의병세력으로 성장,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특히, 신돌석은 교묘한 게릴라 전법으로 장기간 전투를 계속하였다. 1908년 부하 김상렬의 집에 은신했을 때 이들 형제의 계략에 빠져 암살당하였다.
  16. 변학기(邊鶴基) - 경상북도 봉화 출신. 1907년 각지에서 항일의병이 일어날 때 이에 호응하여 영남창의대장으로 부장(副將) 홍병팔(紅秉八)과 부장(部將) 박원도(朴元道) 등을 지휘하여 의병 300400여 명을 이끌고, 경상북도 봉화ㆍ울진ㆍ삼척 등지에서 일본군과 항전하였다. 1908322일 봉화군 소천면 석개리에서 항전하던 중 부장 홍병팔이 일본군에게 붙잡혔으나, 이에 굴하지 아니하고 박원도와 같이 태백산 북록에 있는 천평리(川坪里)ㆍ영월ㆍ성양(性陽)ㆍ덕구(德邱) 등지에서 계속 항전하였다. 당시 일월산(日月山) 일대에는 각지에서 모인 수천명의 의병이 이강년(李康䄵) 부대의 지휘하에 들어갔으며, 이때 우군장이 되었다. 일본군 수비대가 일월산 주위에 삼엄한 경계망을 펴고 이른바 토벌작전을 전개하자, 계속 항전하다가 1908년 대폭 증강된 일본군에 붙잡혔다.
  17. 최성천(崔聖天, ?~1910) - 충청북도 충주 출신. 1908년 김상태(金相泰) 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중, 19098월 경상북도 봉화에서 밀정의 신고로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일본군 수비대에 감금되었다가 탈출, 이 후 소백산을 중심으로 봉화 예천 등지에서 일본군 밀정의 처단 및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활동규모는 일제가 편찬한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에 의하면 약 3백 명 정도로 나타나 있다. 1910년 초부터 일본군이 소백산 지역에 대한 토벌을 실시하자, 부하 20여 명을 이끌고 일제의 포위망을 벗어나 활동을 계속하였다. 19104월 한명선(韓明善)과 함께 일본군에 또다시 체포되었다. 같은 해 9월 대구지방 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18. 김동식(金東植, 1854~1909) - 경기도 안성 출신. 19079월 진안에서 의거하여 고광순(高光洵)의 의진과 연합하여 순창우체국을 습격, 군자금을 노획하고 방화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그해 10월 고광순의 의진과 함께 지리산 화개곡(花開谷)으로 옮기고 의병 300명을 인솔하여 진주 일본군 수비대와 크게 접전하였다. 그러나 의병장 고광순 등 의진의 중진인사들이 크게 사상하자, 의진을 해산하는 한편, 다시 잔병을 이끌고 이석용(李錫庸)의 의진과 합진하였다. 그달 22일 의병 100여 명을 인솔하고 심원암(深院庵) 아래에서 적과 접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그뒤에도 일본군 수비대 10여 개소를 습격하여 적군 다수를 사살하였으며, 일진회 회원 등 부일배(附日輩)를 숙청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 이석용(李錫庸, 1878~1914) -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갑술(李甲戌), 자는 경항(敬恒), 호는 정재(靜齋). 전라북도 임실 출신. 의병 투쟁 때는 이학사로 불렸다. 19078월 우리나라 군대가 강제 해산을 당하자, 같은 고향의 전해산(全海山)과 함께 거의토적(擧義討賊)할 것을 의논하고, 당시 기삼연(奇參衍)이 영광 수록산(隨綠山) 석수승암(石水僧庵)에서 회맹하여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를 구성하자, 전해산과 더불어 종사 중 1인이 되었다. 19099월 의진 해산 뒤 잠행 유랑하던 중 1912년 성수면 삼청리에서 붙잡혀 1914112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 해 4월 대구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의병활동에 관한 진중일기를 남겨 정재선생호남창의일록(靜齋先生湖南倡義日錄)이 간행되었다.
  20. 지용기(池龍起, ?~1908) - 별명은 홍민(弘敏). 강원도 양양 출신. 19079월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일환으로 이언용(李彦用)ㆍ이완채(李完蔡)ㆍ이인재(李寅在) 및 신창호(申昌鎬) 등과 의병을 모아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의병 600여 명을 지휘하여 강원도 양양, 충청북도 청주ㆍ쌍호 및 경상북도 송면 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 및 헌병대와 싸워 큰 타격을 주었다. 또한, 같은 해 10월 의병 250여 명을 이끌고 낭천(狼川)에서 동쪽으로 약 10리 떨어진 곳에서 일본군과 조우, 교전하였다. 그 뒤 여러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으나 190811월 적군과 교전하던 중 순국하였다.
  21. 이진룡(李鎭龍) - 일명 석대(錫大). 황해도 평산 출신. 유인석(柳麟錫)의 문인.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일제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자, 박정빈(朴正彬)ㆍ조맹선(趙孟善)ㆍ신준빈(申俊彬)ㆍ신정희(申貞熙)ㆍ한정만(韓貞萬) 등과 함께 애국청년들을 규합, 평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박기섭(朴箕燮)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선봉장이 되었다. 한일합방 이후에 국내에서 의병운동이 불가능해지자 191110월 지휘권을 한정만에게 위임하고 조맹선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31운동이 일어나자,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고자 만주로 망명해 오는 애국청년들을 규합하여 항일사상을 고취하며 계몽운동에 주력하는 한편, 군사훈련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만주에 분산되어 있던 독립운동단체를 규합하여 국내침공을 감행하기 위한 대규모 기구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주구 임곡(林谷)의 밀고로 관전현(寬甸縣)에서 잡혀 여순(旅順)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황봉운ㆍ황봉신 형제가 이진룡을 탈출시키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여 잡히고 말았다. 그 뒤 이들은 평양지방법원에서 함께 사형언도를 받고 순국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우씨(禹氏)도 따라서 순절하였다.
  22. 민효식(閔孝植, 1854~1929) - 본관은 여흥(驪興). 호는 석촌(石村). 황해도 벽성(碧城) 출신. 진사 민영태(閔泳泰)의 장남이다. 1907년 정미7조약에 이어 군대해산이 강행되자 민효식은 19078월 황해도 연백과 평산 지역의 유학자 신재봉(申在鳳)을 비롯하여 신석(申襫)ㆍ신필수(申弼秀)ㆍ채홍두(蔡洪斗)ㆍ우병렬(禹炳烈)ㆍ변석현(邊錫鉉)ㆍ조도환(曺道煥) 등과 평산군 마산면의 도평산(挑坪山)에서 의병을 봉기, 전 목천군수 박기섭(朴箕燮)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신재봉 등이 체포되어 순국하자, 19082월부터 허덕천(許德天) 과 함께 독립부대(많을 때는 600여 명)를 이끌고 일본군과의 유격전을 감행하면서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주요 활동지는 재령ㆍ신천ㆍ장연ㆍ평산ㆍ은율ㆍ옹진ㆍ송화ㆍ해주 등 황해도 지역이었다.
  23. 김정안(金貞安, ?~1914) - 황해도에서 기의한 이진용(李鎭龍) 의진의 부장(部將)으로 활동하였으며 1910년 황해도 해주(海州)ㆍ평산(平山)지방에서 정예부대를 이끌고 일군수비대와 격전을 벌이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후 1914515일 황해도 수안군(遂安郡)의 일헌병대 연탄출장소(燕灘出張所)를 습격하여 병기를 탈취하고 동년 521일에는 수안군 연탄 남방(南方) 20리 지점인 대율리(大栗里) 암혈(岩穴)에서 일헌병대와 교전하다가 전사 순국하였다.
  24. 차도선(車道善, 1863~1939) - 함경남도 갑산 출신. 일제의 침략세력이 점점 강화되자, 이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먼저 일진회원을 암살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혀 북청군의 태양욱(太陽郁)과 함께 군읍민들을 교육시켰다. 19071116일에 북청군 안산면장 주도익(朱道翼)을 암살하였다. 또 홍범도(洪範圖)ㆍ송상봉(宋相鳳) 등과 의병을 모집하여 산포대(山砲隊)를 조직하였고, 같은해 1122일에 북청후치령(厚峙嶺)에서 혜산진으로 가는 목재창고원ㆍ총기 호위병 2명과 경찰관 1명을 사살하고, 이튿날 일본 헌병과 호위병 2명 및 우편물 호위병을 사살하였다.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뒤 만주로 망명, 청년들을 모아 포수단(砲手團)을 조직하여 광복운동을 하였다.
  25. 홍범도(洪範圖, 1868~1943) - 일명 홍범도(洪範道). 평안북도 양덕 출신이다. 1907년 전국적인 의병봉기가 일어나자 이 해 9월 일제가 민중의 무장투쟁을 약화시키기 위해 총포급화약류단속법(銃砲及火藥類團束法)을 공포,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크게 분노하여 11월 차도선(車道善)ㆍ태양욱(太陽郁)과 산포대(山砲隊)를 조직하여 의병을 일으킨 뒤, 북청의 후치령(厚峙嶺)을 중심으로 갑산(甲山)ㆍ삼수(三水)ㆍ혜산(惠山)ㆍ풍산(豊山)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일본 수비대를 격파하였다. 1910년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간도로 건너가 차도선ㆍ조맹선(趙孟善) 등과 포수단(砲手團)을 조직하였다. 이후 교포들에게 광복사상을 고취하며 국내와 연락, 애국지사 소집과 독립군 양성에 진력하였다. 191931운동 후 3~6월 사이 대한독립군을 창설했다. 191931운동 후 동만주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간도대한국민회(間島大韓國民會)를 결성하자 19205월 합작하였다. 간도대한국민회와 대한독립군의 합작 군사조직으로 제1군사령부가 결성되었고 홍범도는 정일 제1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206월 최진동과 협력하여 종성(鍾城) 삼둔자(三屯子) 부근에서 국경수비대와 격전을 벌여 120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렸으며, 두만강 대안의 봉오동(鳳梧洞)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전멸시키는 큰 성과를 올리니, 이것이 유명한 봉오동전투이다. 또한 같은 해 10월 청산리전투에서도 제1연대장으로 참가, 2연대장 김좌진(金佐鎭), 3연대장 최진동 등과 함께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26. 이범윤(李範允, 1856~1940) - 본관은 전주(全州). 아버지는 이경하(李景夏)이며, 법부대신 및 주로공사(駐露公使) 이범진(李範晉)이 형이다. 1904년 러일전쟁 중에는 500여 명의 부대를 이끌고 참전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범윤의 부대는 사포대를 중심으로 이뤄졌고, 구한국군과 의병 출신들이 포함되어 있어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다. 1905년 이후 노령에 많은 지도자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나 이범윤이 동의회(同義會) 부총장에 추대되었다. 1907년을 전후로 노령 내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여 가장 유력한 지도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한인지도자의 최고 영수이며 자산가인 최재형(崔才亨, 일명 在亨)과 결의형제하고 최재형의 원조로 대부대의 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19105월경 가쓰라[桂太郎] 등 일본의 요인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였다. 그 해 8월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자 유인석(柳麟錫) 등과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여 병합반대와 무장투쟁을 호소하였다. 19115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된 권업회(勸業會) 총재로 추대되었다. 이 회는 유인석이 수총재(首總裁), 최재형ㆍ최봉준(崔鳳俊)이 부총재, 이상설이 의장, 홍범도가 경찰부장 등으로 구성된 전 노령 최대 최고의 한인기관이었다. 1920년 김성극(金星極)ㆍ홍두식(洪斗植) 등이 조직한 대한광복단의 단장으로 추대되어 400여 명의 독립군을 통솔하였다. 일본군의 간도 출병으로 독립군이 일시 노령으로 근거를 옮겼으나 만주에 남아 계속해서 활동하였다. 청산리전투 후 서일ㆍ홍범도 등 각 군단 수령들이 전만군사통일체(全滿軍事統一體)를 조직하기로 하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을 때 의군부도 가맹시키고, 서일의 뒤를 이어 총재로 추대되었다. 1921년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으로 대한독립군단이 거의 전멸할 정도의 희생을 당하자 각 단은 독자적 정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19249월 해림(海林)에서 문창범(文昌範)ㆍ지청천(池靑天)ㆍ이동휘ㆍ최명록(崔明祿)ㆍ김좌진(金佐鎭)ㆍ김규식(金奎植)ㆍ현천묵(玄天默)ㆍ나중소(羅仲昭) 등과 군사연합회의준비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1925년 신민부가 조직되었을 때, 63세의 노령으로 참여하여 고문이 되었으며 그 뒤로도 각 단의 고문역을 계속하였다.
  27. 송상봉(宋相鳳, ?~1909) - 1907년 양봉익(梁鳳翼) 의진에 참여하여 함남 장진군 동상면(東上面) 운산동(雲山洞)에서 군수품을 모집하고 부일배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8년에는 150여 명의 군사들과 함께 함남 삼수군(三水郡)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 대일항쟁을 전개하였고, 같은 해 3월에는 장진군 운산동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빙하산(氷河山)에서 일본 정찰대를 기습할 목적으로 행군 중 갑자기 일본군과 조우하여 패전하기도 하였다. 이후 19088월 휘하 의병 40여 명을 이끌고 홍범도(洪範圖) 의진에 합류하여 장진군 일대에서 활동하다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전사, 순국하였다.
  28. 전명운(田明雲, 1884~1947) - 1905년 노동이민으로 하와이로 건너간 뒤 이듬해 6월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철도공사와 알래스카 어장 등에서 일했다. 애국운동의 전개와 동족간의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안창호 등이 만든 공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908323일 한국정부 외국인고문인 친일파 미국인 D. W. 스티븐스가 오전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려고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페리 정거장에 도착했을 때, 그에게 다가가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되었다. 스티븐스가 그를 잡으려고 하는 순간 뒤에 있던 장인환이 3발을 쏘았다. 1발은 전명운의 어깨에 맞았으나 2발은 스티븐스의 허파와 허리에 명중시켰다. 총을 맞은 전명운은 병원에 실려갔고, 장인환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스티븐스는 이틀 만인 25일 죽고, 전명운은 퇴원한 뒤 구속되었다. 미주 내 한인사회는 이 의거를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하고 나아가 국권회복운동의 전기로 삼았으며,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는 재판비용을 모금해 변호사를 선임해 재판투쟁을 했다. 재판 결과 무죄로 풀려났다. 1930년경부터 로스앤젤레스에 살면서 한인연합장로교회에 나가기도 하고 동지회(同志會) 모임에도 참석했다. 19471119일 죽은 뒤 로스앤젤레스 근교 가톨릭 묘지에 묻혔다.
  29. 장인환(張仁煥, 1876~1930) - 1887년 공립학교에 입학하여 다녔지만 1892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경제적 어려움으로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다. 그후 1894년 잡화점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전쟁을 피해 여러 곳을 전전하였다. 1895년부터 1903년까지 잡화장사를 시작하였으나, 동업자의 배신으로 사업에 실패하고 하와이로 이민하게 되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다. 이후 알래스카, 캘리포니아를 거쳐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그는 1907년 캘리포니아주 파사디나(pasadena)에서 설립된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08320일 대한제국의 외부(外部) 고문(顧問)임에도 일본에 적극 협력하였던 미국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323일 전명운이 스티븐스를 저격하려고 하였고 불발하여 격투를 벌이고 있을 때, 장인환이 다가가 세 발을 총을 쏘았고 한발은 전명운의 가슴에, 두 번째와 세 번재 총알은 스티븐스의 어깨와 하복부를 관통하였다. 경찰에 구속된 후 살인혐의로 327일부터 재판을 받게 되었다. 미국 주재 일본총영사관측과 스티븐스 유족들은 사형을 받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재판은 280일 동안 계속되었다. 여덟 차례의 비밀투표와 토론 끝에 애국적 환상에 의한 2급 살인죄(Insane Delusion)’로 의견 일치를 보았다. 190912일 쿡 판사는 25년 금고형을 선고하였다. 2급 살인죄는 최고 30년에서 최하 10년까지 형기를 채워야만 하였다. 1918년 당시 강영소(姜永韶) 대한인국민회 총회장과 황사선(黃思宣) 목사 등이 장인환이 출옥하면 생계를 보장한다는 각서를 제출하였다. 교도소 측에서는 1919110일 가석방을 허락함으로써 108개월 만에 옥중생활을 끝냈다. 192742923년 만에 귀국하여 그해 610일 평양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생인 윤치복(尹致福)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귀국 후 요시찰 인물로 일제의 끈질긴 감시와 억압에 대한 좌절감, 그리고 건강악화로 인해 결혼생활과 고아원 사업도 제대로 할 수가 없게 되자, 그해 1027일 샌프란시스코로 다시 돌아갔다. 미국에 돌아온 후 세탁업과 막노동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으나, 형무소에서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회복되지 못했다. 1930510일 공립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다가 병세가 위독해지자 다시 안식교회의 위생병원(Health Betterment Institute)에 입원하였다. 그러나 대소변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심해지자, 522일 창문을 열고 투신하였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