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8일 목요일

[범용기 제4권] (105) 독립을 향한 선렬들의 가시밭 행군 - 民族과 國家 生命의 은류(隱流)

民族國家 生命의 은류(隱流)

 

이것은 물론 조선나라 전체가 망한 것이고 어느 한 부분만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 민족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 민족 생명은 지하(地下)에서 왕양(汪洋)[1]한 대하(大河)를 이루어 숨어 흐르고 있었다.

조선이란 나라도 겉모양은 없어졌으나, ‘은 살아 민족 에 또는 민족 가운데화산맥같이 불타고 있었다. 어디서나 구멍만 생기면 불꽃이 치솟는다.

 

1910이시영, 이동령 등이 중국 요녕현 유하현에서 한족회조직, 경학사와 신흥 강습소 등을 설립하고 항일 교육을 실시했다.

1910년 안창호는 미국 L.A.에서 항일 독립을 위한 민족성격 개조를 기반으로 항일 독립을 위한 장기전을 시작했다.

191012105인 사건이 있었다.

1912서간도 통화현에서 윤기섭[2], 김창환[3] 등의 의병출신 주도로 부민단’(扶民團)[4]이 조직되어 항일운동을 벌였다.

1912일년간에 조선인 52천명이 투옥됐다.

1912이상설은 시베리아 조선동포와 함께 항일운동을 일으켰다.

19139임병찬[5], 이용순, 전용규 등이 독립의군부[6] 조직, 일본 정부에 국권반환을 요구했다.

1916경상도 영주의 대한광복단원인 채기중[7], 한군, 김상옥, 김동순 등과 노백린[8], 김좌진, 박성태 등이 합류하여 광복단[9]을 강화했다. 1917년의 광복회사건, 1919년의 31운동, 1920년의 제등총독 암살기도 등에 정신적 인연이 되었다.

1914이승만은 미국 하와이에서 한국태평양지 발간, 항일이론을 전개했다.

19151경상도 달성군을 중심으로 윤상태[10], 서상일[11], 이시영, 홍주일[12], 황병규 등이 국권회복단[13]을 조직, 후에 31운동, 광복단군사훈련,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 서명운동 등등에 활약했다.

1915조선총독에 의하여 조선인 14만 명이 투옥됐다. 서울에서는 서울국민대회를 열고, 대한민국 집정관 총재에 이승만, 각료에 이동휘, 이동녕, 박용만[14], 노백린, 이시영, 김규식, 안창호 등을 밀었다.

1918이동휘는 각 계열의 조선독립군을 규합하여 고려독립연대를 조직, 볼세비키군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191810손병희, 오세창[15] 등 천도교 관계자와 이승훈 등 기독교 관계자와 한용운 등 불교관계자들이 서울에 조선독립운동 본부를 설치했다.

191812지청천[16]은 서간도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17]를 설치했다.

항일군사행동에 가장 치열하고 효과적이었던 무력투쟁은 홍범도, 김좌진, 이범석 등 장성들이었다.

한편, 일본 동경에서는 조선유학생이 중심이 되어 민족자결원칙을 지지하는 웅변대회를 열었다. 12명 투옥.

19191- ‘고종이 급서

19191신한청년단의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

19192최팔용[18] 등과 조선독립청년단원들 6백여 명이 동경에서 독립선언서와 대회결의문 채택, 이것이 “28독립선언서[19]. 관계학생 백여 명이 구속됐다.


[각주]

  1. 왕양(汪洋) - 바다가 끝이 없을 정도로 넓음, 미루어 헤아리기 어려움
  2. 윤기섭(尹琦燮, 1887~1959) - 경기도 장단 출신으로, 호는 완운(蜿雲), 이명은 윤중규(尹仲珪)이다.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한동안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사로 재직했다. 1908년 안창호(安昌浩) 등과 청년학우회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중국 만주로 망명한 후 신흥무관학교 교사·교장으로 10여 년간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20년대 중반 이후 민족유일당운동에 동참하여 1929년 신익희(申翼熙) 등과 한국혁명당, 1930년 임시정부를 비롯한 민족주의계열 인사들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해방이 되자 19462월 귀국하여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으로 당기관지인 앞길의 사장이 되었고, 같은 달 좌익세력의 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부의장 및 상임위원을 지냈다.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조선민족혁명당 대표로 관선의원에 선출되어 부의장을 지냈고, 1948년 국학대학 학장을 지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고, 19567월 안재홍(安在鴻) 등 납북인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59년 반혁명분자혐의로 구속되어 숙청되었다.
  3. 김창환(金昌煥, 1872~1937) - 일제강점기 신흥무관학교 훈련감, 대한독립군단 대대장, 대한국독립군 총사령 대리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별명은 김석주(金錫柱), 호는 추당(秋堂). 서울 출신. 1909년 독립운동의 해외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가 이철영(李哲榮)ㆍ이회영(李會榮)ㆍ이시영(李始榮)ㆍ이상룡(李相龍)ㆍ이동녕(李東寧)ㆍ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개척 사업을 벌이는 한편, 청년 교육을 위해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였다. 1911년 국내에 잠입하였다가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붙잡혀 악형을 당하였으며, 출옥 후에는 배재학교 등에서 체육 교육을 담당하면서 독립 사상을 고취시키다가 다시 만주로 망명하였다. 1937년 현익철(玄益哲)ㆍ양기탁ㆍ이복원(李復源) 등과 같이 전당비상대표대회(全黨非常代表大會)를 열어, 한국민족혁명당을 조직하고 적색 분자를 숙청하는 운동을 벌여 나갔는데, 그 뒤 조선혁명당으로 개칭하고 적극적인 항일 독립운동을 추진하다가 과로로 죽었다.
  4. 부민단(扶民團) - 1912년 이상룡 등이 주동하여 서간도 퉁화에서 조직한 기관. 대외적인 사업은 한인사회에서 발생하는 분쟁을 해결하고, 중국인 또는 중국관청과의 분쟁사건을 맡아 처리하며,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대내적으로는 각종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퉁화 현 하니 강에 본부를 두었으며, 단장 허혁, 부단장 김동삼 등이 일했다. 지방 조직을 정비하고 호별로 책임자 1명을 두었다. 그리고 대표자대회를 개최하여, 부민단을 정부의 기능을 가진 조직을 지향했다. 남만주에서 독립운동의 총본영으로 군정부가 조직되자 19194월 류허현, 퉁화현, 싱징현, 환런현, 지안현 등의 한인주민들은 부민회를 자치기관인 한족회로 개편했다.
  5. 임병찬(林炳瓚, 1851~1916) - 대한제국기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 등을 역임한 의병. 19062월 최익현(崔益鉉)과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같은 해 6월 순창전투에서 일본군과 격전하다가 최익현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감금 2년 선고를 받고,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가 19071월 귀국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은거하면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도모하던 중, 19129월 고종의 밀조(密詔)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전라남도 순무대장(巡撫大將)에 임명되었다. 1914년 일본경찰에 동지 김창식(金昌植)이 잡힌 뒤 독립의군부의 조직과 계획이 탄로나면서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613일 거문도로 유배되었으나, 19165월 이곳에서 병사하였다.
  6.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 - 1912년 전라남북도 지방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독립의군부라고도 불렀다. 독립의군부의 활동 목표는 일본의 내각 총리대신과 조선총독 및 주요 관리들에게 국권반환 요구서를 보내 한국 강점의 부당함을 깨우치고, 대규모 의병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145월 국권반환 요구서를 전국의 조직을 통해 일제히 발송하고, 360여 곳에서 조선총독부로 도잇에 국권 반환과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하는 전화를 하기로 하였다. 1916년 임병찬이 병사하면서 해체되었다.
  7. 채기중(蔡基中, 1873~1921) -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극오(極五). 호는 소몽(素夢). 일명 기중(基仲). 경상북도 상주 출신. 1910년대 국내에서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인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여 활약하였다. 191711월 광복회가 친일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할 때 이 공작을 직접 지휘하여 결행하였다. 1918년 광복회가 일본경찰에게 발각되자 상해로 망명하기 위하여 전라남도 목포에 잠적하였다가 붙잡혀 사형되었다.
  8. 노백린(盧伯麟, 1874~1925) - 1895년 일본 유학생으로 추천을 받아 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보통과와 특별과를 수학하였다. 1898년 세이조학교[成城學校]를 졸업하였으며, 이듬해 11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078월 한국군이 강제 해산당하고 육군 연성학교도 폐교되자 군부 교육국장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뒤 경술국권 피탈 때 낙향하여 신민회운동(新民會運動)에 관여하기도 하고, 김구(金九)와 함께 해서교육총회장(海西敎育總會長)으로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수안금광, 서울에서 피혁상 등을 경영하였으나, 10여 만원의 손해만 내고 가산을 탕진하였다. 1916년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1918태평양시사(太平洋時事)를 창간하였다. 이후 1919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의 중책을 맡았다. 독립전쟁의 필요성을 설파하기 위해 1919년 후반부 미국으로 건너가 여러 도시를 순방하며 한인사회의 단결을 호소하였고, 1920년 미국 캘리포니아에 도착하여 재미 동포인 김종림(金鍾林)의 지원을 얻어 항공 학교를 설립하고 공군 용사를 육성하였다. 그 뒤 192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하였다.
  9.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 1910년대 독립을 목적으로 무장투장을 전개해 독립을 달성하려했던 대표적인 국내독립운동단체이다. 광복회는 1915715()대구 달성공원에서 한말의병계열과 계몽운동계열이 연합 결성한 단체로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조직된 광복단(光復團)1915년 대구에서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이 중심이 되어 창립되었다. 광복회 창립에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본부조직, 풍기광복단ㆍ민단조합을 중심으로 한 경북지역 조직, 달성친목회와 조선국권회복단을 중심으로 한 대구조직과 서북지역 조직이 참여했다. 조직은 본부에 총사령 박상진(朴尙鎭), 지휘장 우재룡(禹在龍권영만(權寧萬)을 두었고, 그 아래에 재무부·선전부를 설치했다. 만주에는 이석대(李奭大)를 부사령으로 임명했으며 이석대가 순국한 이후에는 김좌진(金佐鎭)을 파견했다. 광복회는 친일세력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 자금모집을 원할히 하기 위해 친일세력들을 처단하는 의협투쟁도 전개했다. 의협투쟁은 경상도와 충청도, 전라도에서 이루어졌으며, 식민지배에 안주하려는 친일세력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일깨웠다. 그러나 의연금 모집을 위해 발송한 통고문이 발각되고, 의협투쟁이 전개되면서 일제 경찰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19181월 충청도 지부원들을 시작으로 주요 인물들이 체포되어 조직이 크게 와해되었다. 체포된 광복회원 중 총사령 박상진을 비롯해 김한종ㆍ임세규(林世圭)ㆍ김경태(金敬泰)ㆍ채기중이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했고, 다수의 회원들이 체포됨으로써 광복회는 큰 타격을 받았다.
  10. 윤상태(尹相泰, 1882~1942) - 본적은 경북 달성군(達城郡) 월배면(月背面). 대한제국시절 군수(郡守)를 지냈으나 1905(광무 9)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1911년 경상남도 고령(高靈)에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설립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위한 교육에 전념하였다. 1915115일 이시영(李始榮)ㆍ박상진(朴尙鎭)ㆍ박영모(朴永模)ㆍ서상일(徐相日)ㆍ홍주일(洪宙一) 등과 함께 달성군 안일암(安逸庵)에서 표면상으로는 시회를 개최하면서 내부적으로는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라는 비밀결사 조직을 만든 후에 중앙총부(中央總部)를 결성하고 통령(統領)에 선출되었다. 독립자금을 원활히 마련하기 위해 향산상회(香山商會)ㆍ백산상회(白山商會)ㆍ태궁상점(太弓商店) 등의 상점을 경영하면서 항일투쟁의 근거지로 삼았다. 1917년 비밀결사조직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 당원으로 가입하였다. 191931운동 때는 김관제(金觀濟)와 변상태(卞相泰)를 시켜 경상남도 창원(昌原) 일대의 만세운동을 주도하게 하였다. 31운동 후 독립운동의 열기가 높아지자 군자금 모금 활동에 힘썼다. 같은 해 4월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영문으로 번역하여 김응섭과 남형우(南亨祐)로 하여금 파리장서를 가지고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갈 때 쓸 경비 5천 원을 지원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소한 후에는 달성군에 항일민족교육을 위한 교육기관인 덕산학교(德山學校)와 회보당(會輔當)송석정(松石亭) 등을 세워 후학 양성에 힘썼다.
  11. 서상일(徐相日, 1887~1962) - 본관은 달성(達城). 호는 동암(東菴). 대구 출신. 서봉기(徐鳳基)의 아들로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09년 안희제(安熙濟)ㆍ김동삼(金東三)ㆍ윤병호(尹炳浩)ㆍ남형우(南亨祐)ㆍ박중화(朴重華)ㆍ배천택(裵天澤) 80여 명의 동지들과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청년단체로서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 지하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병탄하자 ‘9인결사대를 조직, 민족의 강경한 반일의지를 담은 선언문을 서울에 있던 각국 공사에게 돌린 뒤 전원이 할복자살을 계획했던 세칭 ‘9공사사건을 일으켰다. 1913 대구에서 박상진(朴尙鎭) 등과 함께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사업을 했으며,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중앙총부에서 활동하였다. 1919 대구에서 31운동에 참가했으며, 19203월 만주에서 무기를 반입해 일제 관서를 습격할 계획을 세우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투옥되었다. 19218월 미국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에 동지들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이 청원서에 대표로 서명하였다. 1924농림(農林)민중운동(衆運動)이란 잡지를 발행하고, 흑우회(黑友會) 계통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송진우(宋鎭禹장덕수(張德秀) 등과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창립하여 총무로 선임되었고, 국민대회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의 직책을 맡기도 하였다. 1946년 비상국민회의 의원에 취임하였고,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度立法議院)의 민선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헌법기초위원으로 활약했으며, 제헌국회 말기에는 내각책임제 개헌을 발기하여 최초의 개헌안을 제출하였다. 1950년대는 사회민주주의 정당 활동을 벌여, 1956년 진보당(進步黨) 창당에 참가해 간부로 활동하고, 1960년 사회대중당(社會大衆黨)을 창당해 대표총무위원에 취임하였다. 1960년 제5대민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신병으로 큰 활동을 못하였다. 1961년 사회대중당이 분열되자 재야 혁신세력을 정비, 결집하여 통일대중당(統一大衆黨)을 발기하였으나 5·16으로 무산되었다.
  12. 홍주일(洪宙一, 1876~1927) - 1915115일 달성군 수성면 안일암에서 시회(詩會)라는 명목으로 모임을 가지고 윤상태(尹相泰)ㆍ서상일(徐相日)ㆍ이시영(李始榮) 등과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朝鮮國權回復團中央總部)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어 기밀부장으로 활동하다가 붙잡혀 대구형무소에서 1년 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하던 1916년 대구에 명신학교(明新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하여 학생들에게 조국광복의 기수가 될 것을 역설하고, 광복회ㆍ의용민족대동단 등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각 민족단체의 지도자들과 계속 연락을 취하였다. 19193월 서울의 이갑성(李甲成)과 연락을 취하면서 김태련(金兌鍊)ㆍ이만집(李萬集) 등과 대구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던 중 33일 일제에 예비검속되어 다시 2년 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대구에서 교남학교(嶠南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을 통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일제에 의하여 교직을 박탈당하였다.
  13. 국권회복단(國權恢復團) - 박상진(朴尙鎭)19151월 동지들과 함께 국권회복운동과 단군봉사(檀君奉祀)를 목적으로 조직하였다. 임원은 중앙총부통령(中央總部統領) 윤상태(尹相泰), 외교부장 서상일(徐相日), 문서부장 서병룡(徐丙龍이영국(李永局), 유세부장 정순영(鄭舜永, 또는 舜泳), 교통부장 이시영(李始榮)ㆍ박영모(朴永模), 기밀부장 홍주일(洪宙一), 권유부장 김규(金圭), 결사대장(決死隊長) 황병기(黃炳基)였으며마산에 설치된 경상남도지부 지부장은 안확(安廓)이었다. 단원은 혁신 유림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중요한 활동 거점은 대구박상진의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 서상일의 태궁상회(太弓商會), 경상북도 칠곡윤한병(尹翰炳)의 향산상회(香山商會), 부산안희제(安熙濟)의 백산상회(白山商會) 등으로서 모두 곡물상회였다.
  14. 박용만(朴容萬, 1881~1928) - 일제강점기 신한민보 주필, 한성임시정부 외무총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호는 우성(宇醒). 강원도 철원 출신.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이듬해 네브라스카주(Nebraska)에 있는 링컨고등학교에서 1년간 수학하였다. 1906년 헤이스팅스대학에서 정치학으로 학사학위를 취득하였다.1909년에 네브라스카의 커니농장(Kearney農場)에서 독립운동과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해 1912년 첫번 졸업생 13명을 배출하였다. 1911년 미주에서 설립된 재미동포의 단체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이 때 국민개병설군인수지라는 책을 저술, 발간하였다. 1912년 하와이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의 기관지인 신한국보(新韓國報)의 주필로 언론활동을 폈다. 1914년에는 농장을 임대하여 동포의 청년들이 공동으로 경작하게 하였다. 또 항일무장 독립운동단체인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을 조직해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130여 명을 독립전쟁에 대비한 인원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1918년 국제정세 홍보를 목적으로 태평양시사((太平洋時事)라는 신문을 창간하여 주필이 되었다. 19193월 호놀룰루에 대조선독립단(大朝鮮獨立團)을 창단하고 태평양시사를 인수하여 기관지로 삼았다. 19194월 서울에서 세칭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가 수립되었을 때 외무총장에 선출되었다. 그 해 9월 상해에서 각처의 임시정부를 통합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개편할 때도 역시 외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과 독립운동 방략에 있어 견해 차이가 컸기 때문에 부임하지 않았다. 519일 하와이를 떠나 북경에 도착하여 신채호(申采浩)ㆍ신숙(申肅) 등 이승만의 독립노선에 반대하는 인사들과 함께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를 결성하였다. 국제 외교활동에 중점을 두고 있는 이승만의 독립운동 방안과는 달리, 이들은 독립군을 통합하여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해야한다는 입장이었다. 1923년 중국 상해에서 국민대표대회(國民代表大會)가 개최되자 임시정부 불신임운동에 앞장섰다. 19257월 호놀룰루에서 태평양연안 국제신문기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 활동하였다. 1928년 북경에서 대본공사 사업을 추진하던 중 1017일 이해명의 권총 저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15. 오세창(吳世昌, 1864~1953) -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중명(仲銘), 호는 위창(葦滄韙傖). 서울 출생. 20세에 역관이 되었다가, 1886년 박문국 주사로서 한성순보기자를 겸하였다. 1894년에 군국기무처 총재비서관이 되었고, 이어 농상공부 참서관, 통신원 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1897년 일본 문부성의 초청으로 동경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교사로 1년동안 체류하였다. 1902년 개화당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던 중에 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1906년 귀국 후 만세보대한민보사장을 역임하였고,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다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6. 지청천(池靑天, 1888~1957) - 호는 백산(白山). 본명은 대형(大亨), 일명 이청천(李靑天). 서울 출신. 한말 무관학교(武官學校)에 입교, 2학년 때 1, 2년생 40여 명과 함께 정부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校)에 들어갔다. 26기생으로 1913년 졸업, 중위가 되면서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일무력항쟁을 지도하기 위해 일본의 병서와 군용지도를 가지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찾았다. 독립군 간부양성에 진력하고 1920년 상해임시정부 산하의 만주군정부(滿洲軍政府)ㆍ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간부가 되었다. 1940917일 임시정부가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자 사령관이 되어 1945년 환국할 때까지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환국 후 26개 청년단체를 통합한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을 창설하여 단장이 되었다. 제헌국회의원과 초대 무임소 장관을 역임하고 제2대 국회의원,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을 지냈다.
  17.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군정부. 경학사는 1912년 부민단(扶民團)으로, 1919년 한족회(韓族會)로 발전하고 5월 산하에 군정부를 설치하였다. , 유하(柳河)ㆍ통화(通化)ㆍ흥경(興京)ㆍ환인(桓仁)ㆍ집안(集安) 등 남만주 각 현에서 활동하던 민족 지도자들이 삼원보(三源堡)에 모여 항일 운동 단체의 통일 기구 결성을 결의, 남만주 일대 독립 운동 총본영으로서의 군정부를 조직하였다. 그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안정근(安定根)ㆍ왕삼덕(王三德, 본명 金炳憲)의 제의로 서로군정서로 개칭하였다. 독판부(督辦府) 독판 이상룡, 부독판 여준(呂準), 정무청장 이탁(李沰), 군정청장 양재훈(梁在薰, 일명 梁圭烈), 내무사장(內務司長) 곽문(郭文), 법무사장 김응섭(金應燮), 재무사장 남정섭(南庭燮), 학무사장 김형식(金衡植), 참모부장 김동삼(金東三), 사령관 지청천(池靑天) 등으로 구성되었다.
  18. 최팔용(崔八鏞, 1891~1922) -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당남(塘南). 함경남도 홍원 출신. 28독립선언의 조선청년독립단대표 중의 한 사람이다. 1910년 봄에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몇 달 뒤 일제에 조국이 강점당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오성중학교(五星中學校)를 졸업하였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치과에 입학하고, 재일유학생단체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91928일 오후 2시 조선유학생학우회총회라는 명목으로 400여 명의 남녀 유학생들이 동경 기독교청년회관에 모였다. 동경 경시청에서도 이미 눈치를 채고 정ㆍ사복 경찰을 그 곳에 파견하였다. 식이 진행되어 회장이 개회선언을 한 뒤 연단에 올라가 조선청년독립단을 발족할 것을 건의하여 찬성을 얻었다. 이어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낭독이 끝나고 서춘이 연설하려 할 때, 일본 경찰에 의해 검거되어 1년간의 금고형을 받고 귀국하였다.
  19. 28독립선언(二八獨立宣言) - 191928일 도쿄[東京] 유학생들이 발표한 독립선언. 일명 조선청년독립선언이라고도 한다. 31운동 전후에 발표된 독립선언서는 모두 셋이다. 첫째는 191811월 만주ㆍ러시아령에서 발표한 무오독립선언서, 둘째는 28독립선언서, 셋째는 191931일 서울에서 발표된 31독립선언서이다. 28독립선언서는 학생들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점과 31운동 발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데 특색이 있다. 동경유학생들은 이미 한말 때부터 대한흥학회를 조직하고 학회지 대한흥학보를 간행하여 국내에 배포하는 등 애국개화운동에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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