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8일 목요일

[범용기 제4권] (110) 독립을 향한 선렬들의 가시밭 행군 - 모스크바 삼상회의와 신탁통치(좌우익 분립과 좌익폭동)

모스크바 삼상회의와 신탁통치

- 좌우익 분립과 좌익폭동 -

 

19451020미국무성 극동부장 빈센트는 미국외교협회석상에서 조선이 신탁통치하에 있게 될지 모른다고 시사했다.

1945114에 이승만은 미, , , 중 연합국에 보내는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의에서 조선통치에 암담한 공동신탁제가 제기됐다는 보도에 접하고 경악해 마지 않는다……고 술회했다.

모스크바 삼상회담[1] 결의는 19451228일에 미, , 소에서 동시에 발표되었다. 그러나 서울에는 그 전날인 27일 그 정보가 들어왔다.[2] 자주독립을 갈망하다가, 이제 그것이 이루어진다고 환호와 축제에 극도로 흥분됐던 한국 민중은 실망과 함께 분노했다. 서울역 광장은 반탁데모로 매일 붐비었고, 시내도 마찬가지였다.

이 반탁데모에는 좌익계열도 참여하여 같이 열렬했었다. 사흘후에던가 갑작스레 좌익계열은 신탁찬성의 플렉카드를 들고 같은 고장에 나선다. 지령을 받은 것이라 짐작했다. 민족진영 데모대는 저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고 남의 지령에 꼭두각시 노릇하는 사람들이니 문제삼을 것도 없다고 냉소했다. 그러는 동안에 해외에서는 귀국한 동포들이 동조하여 반탁을 날마다 성황이었다. 이승만으로부터도 신탁반대 담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송진우는 훈정 5을 주장했다. 그것이 암살 원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9461삼상회의 결정지지 데모가 격화되는 가운데 좌익 각당파는 통일전선 결성에 착수했다.

194621남조선민주주의 민족전선(民戰) 준비위원회가 발기됐다. 그 선언문은 아래와 같은 요지로 되어 있다.

 

“‘민전은 선거에 의하여 인민대표회의가 구성될 때까지 과도적 임시국회의 역할을 장악한다. ‘민전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의 원칙에 의하여 조선임시정부가 조직될 때까지 조선민족 유일의 정식대표로서의 발언권을 확보한다. ‘민전은 친일파, 민족반역자, 파시스트, 민족분열주의자 등을 배제했다. 민주주의적 민족 총통일체다. ‘민전은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부문을 통하여 참된 민주적 과업을 실시한다.”

 

194621516일까지의 창립대회를 열고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3]을 결성했다. 우익정당과 사회단체는 참가를 거부했다.

의장에 여운형, 허헌, 박헌영, 김원봉이 선출됐다. 사무국장에 이강국[4]이 임명됐다.

 

1945816이영, 최익한, 정백 등 서울파(長安派) 공산주의자들이 장안빌딩에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했다.

1945912- ‘콩구루가 조선공산당 주도권을 장악하고 21일에 조선공산당재건위원회(재건파)를 조직했다.

재건공산당은 그날 박헌영, 허헌, 이강국, 이주하[5], 이성렵 등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했다.

19458- ‘콩구루파는 건준조직을 장악했다.

194593허헌을 건준 부위원장으로, ‘건준인민위원회로 개칭하면서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을 발표했다.

1946119삼상회의 결정 지지를 발표하고 인민당과 함께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발기, 215일에 남조선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했다. 박헌영, 허헌이 의장단이다.

19465한민당계의 경무국장 조병옥[6]과 검사 조재천[7]정판사 위조지폐[8] 사건을 적발했다. 그 당시 공산당의 전국적인 빈번한 파업과 사보타쥬’, 기계류와 시설 파괴 등으로 산업은 거의 마비상태에 들어갔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도 그 중의 하나라 하겠다. 이런 관계로 공산당에 대한 국민의 신임을 땅에 떨어지고 학생들도 완연하게 좌ㆍ우 두 파로 갈라섰다. 미군정은 공산당 불법화 방침을 세우고 일제 검거했다. 간부급은 지하에 숨었다가 많이 월북했다.

1946101대구에서 공산당 폭동이 일어났다. 이어서 전라도 일대에 폭동이 일어났다.

19461016조병옥 경무부장이 습격됐다.

19461020경기도 광주, 개성, 연일 등지의 폭동에서 경찰관 2명 살해됐다.

19461031이후에 光山(광산), 장성, 화순, 보성, 해남, 함평, 나주, 영광, 남양, 장흥, 영암, 무안, 光州(광주), 목포 등지에 폭동이 일어났다. 민간인 사망 약 40, 부상자 약 50, 사망경관 7, 부상경관 5, 검거된 인원 약 12백 명이었다.

19461111전주형무소 수인 400명이 탈옥, 1122일에 광주형무소 수인 900명이 탈옥했다. 탈옥 중에 15명이 사망했다.

이런 관계로 미군정의 공산당 탄압은 격화되었다. 조직체로 존재할 수는 없게 되었다.


[각주]

  1. 모스크바삼상회의 -  19451216일부터 25일 사이에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미국의 국무장관 번스(James F. Byrnes), 소련의 외무장관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 영국의 외무장관 베빈(Ernest Bevin)이 모여 모두 7개 의제에 대해 토의하였다. 이때 한국에 미ㆍ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일정기간의 신탁통치에 관하여 협의한다는 사안이 결정되었다.
  2. 사실 신탁통치는 미국의 오래된 공식적인 전후처리 방침이었다. 필리핀의 신탁통치가 이루어진 예에서 보이듯이 미국은 식민지였던 국가에 신탁통치를 실시하자는 입장이었지만 많은 식민지를 확보하고 있던 영국 등이 맹렬하게 반대하여 제대로 실시되지는 않았다. 한국에 대해서도 미국은 신탁통치를 실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이미 19451020일 미 국무부 극동국장이던 빈센트(John C. Vincent)에 의해 이러한 방침이 확인되어 국내에 보도되기도 했었다.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한국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소련이 미국의 제안을 수정한 새로운 안을 제출했고 이것에 미국이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즉 소련의 안은 임시민주정부 수립을 앞세우고 임시정부와 연합국이 협의하여 최장 5년 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관계가 이러했음에도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한국문제 결정내용이 동아일보에 의해 한국에 최초로 보도된 내용은 소련의 주장에 의해 신탁통치를 실시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동아일보의 보도는 미국 태평양 사령부가 발간하던 태평양판 성조지(Pacific Stars and Stripes) 보도 내용을 전달해준 합동통신사의 뉴스기사를 이용한 것이었다. 동아일보의 보도 내용은 사실관계가 부정확한 오보에 가까운 것이었음에도 국내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3. 광복 후 남북한에 각각 결성되었던 제정당ㆍ사회단체 대표들이 모여 조직한 민주주의 민족전선이 통합된 것으로, 주로 대남평화공세에 활용되고 있다. 남한에서는 1946215일 박헌영(朴憲永)ㆍ여운형(呂運亨)ㆍ허헌(許憲) 등 남한 공산주의자들(398)이 주도하여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근오인민당ㆍ인민당ㆍ신민당ㆍ노동조합 전국평의회ㆍ농민조합 전국총연맹 등 좌익계 40여 정당ㆍ사회단체들을 묶어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을 조직하였으며, 북한에서는 1946722일 김일성(金日成)ㆍ김두봉(金枓奉)ㆍ최용건(崔庸健) 등이 주도하여 북조선노동당을 중심으로 천도교청우당ㆍ북조선민주당ㆍ조선민주청년동맹 등 13개 단체로 구성된 북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을 조직하였다.
  4. 이강국(李康國, 1906~1956) - 경기도 양주(楊州) 출신. 1925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예과 제2기에 입학하였으며, 1926년 유진오 등이 조직한 경제연구회(經濟硏究會)에 가입하였다. 이때 맑스의 자본론, 힐퍼딩의 금융자본론, 플레하노프의 유물사관의 근본문제, 부하린의 유물사관등을 학습하였다. 1927년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진학한 그는 이무렵 재정학 교수로 부임한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에게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을 배웠다. 1931~1932년 초 이강국은 이우한(李愚漢)이란 필명으로 비판(批判)등에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자인 막스 아들러(Max Adler)에 대한 비판의 글과 소련의 계획경제에 대한 찬양의 글, 독일 자본주의 경제공황의 상황과 파시즘의 실상 등의 글을 기고하였다. 193210월 이강국은 독일공산당에 가입하였고, 구니사키 데이도가 조직한 혁명적아시아인협회에 참가하여 코민테른의 각종 테제를 국내에 전달하는 활동 등을 하였다. 1945년 조국이 해방되자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서기장과 조직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462월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상임위원 및 사무국장으로도 활동하였는데, 동년 9월 미군정의 정책을 비판하는 선언서를 발표하여 박헌영과 함께 체포령이 내리자 월북하였다. 19471월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 1948년 상업성법규국장, 195012월 인민군 제69호 병원장, 195211월 무역성 조선 일반제품 수입상사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33월 남로당계 숙청 때 미제국주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사건으로 체포되어 1956년 사형되었다.
  5. 이주하(李舟河, 1905~1950) - 함경남도 북청 출신으로, 일명 이주화(李舟花)로도 불렸다. 1914년 원산 광성학교(光成學校)에 입학하고, 1917년 보광학교(保光學校)에 입학 후,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31운동이 일어나자 교사의 유인물 제작을 도왔다가 탄로나자 형이 있던 갑산으로 피신했다.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3학년 때인 1923년 동맹휴학을 주도한 일로 퇴학당하였다. 1924년경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전문부 사회과에서 수학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사상에 심취하였고, 지바千葉에서 공산청년동맹에 참여했다. 같은 해 학비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자퇴한 뒤 귀국했다. 귀국 후 원산부두에서 화물 운반 날품팔이로 일하면서 원산노동연합회 재건에 힘썼고, 1929년 조선공산당재조직준비위원회에 가입했다. 1931년 정달헌(鄭達憲) 등과 평양노동연맹 좌익위원회를 조직하고, 태평양노동조합 함경남도 책임위원을 맡았다가 소위 1차 태로 사건(태평양노동조합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고 1936년까지 복역했다. 출옥한 뒤 원산으로 돌아와 적색노동조합운동에 착수했다. 1937년 최용달(崔容達) 등과 원산공산주의자그룹을 결성했으나 조직이 노출되어 흥남ㆍ원산ㆍ평양ㆍ진남포 등에서 지하활동을 하던 중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직후인 19458월 원산에서 조선공산당 함경남도지구위원회와 인민위원회를 결성하고, 9월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2월 당의 요청에 따라 월남해 194611월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 1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이 되었다. 19488월 이후 김삼룡과 함께 남로당을 지도했고,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503월 안영달(安永達)의 밀고로 경찰에 체포, 그 뒤 북측에 억류되어 있던 조만식(曺晩植)과의 교환 제의가 오가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6. 조병옥(趙炳玉, 1894~1960) - 충청남도 천안 출생. 초명은 조병갑(趙炳甲), 호는 유석(維石). 한학을 수학하고 케블 목사의 추천으로 공주 영명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이후 영명중학을 거쳐 1909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편입하였다. 졸업 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에 졸업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18년 펜실바니아주 와이오밍 고교를 졸업하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했다. 유학 중인 191931운동의 여파로 북미 지역의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조병옥도 이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413일부터 415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하였고, 416일에는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박사학위를 받은 1925년에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기독교여자청년회(YWCA) 이사와 비밀 독립단체인 그리스도교 신우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같은해 이루어진 신간회의 창립에 참가하여 재정부장ㆍ총무부장 등을 지냈다. 1929년에는 광주학생운동 탄압을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열어 광주학생운동의 배후조종 혐의로 한용운 등과 함께 3년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조병옥은 미국 체류 중 안창호와 교류하게 되면서 깊은 영향을 받아 기호지역인 충청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서북파가 주도하던 흥사단ㆍ수양동우회의 활동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귀국 후 안창호의 강력한 영항아래 있던 이광수를 찾아가 함께 흥사단과 수양동우회의 국내 지부 결성을 추진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수감되어 2년을 복역하였다. 한편 1932년 조만식 등 서북 출신들이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사 경영을 담당하게 되자 전무로 참여하였고, 보인광업회사라는 광산회사를 운영했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가하였고 미군정청 경무부장으로 취임하여 1948년까지 재직하면서 수도경찰청장이던 장택상과 함께 경찰력을 장악했다. 미군정기 가장 중요했던 물리력인 경찰력을 장악함으로써 좌익 탄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애초 조병옥은 안창호를 지지하였으나 그가 사망하고 해방이 된 후에는 이승만을 지지하였다. 경무부장으로서 그는 이승만의 정치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정부 수립 후 이승만과 한민당이 결별하게 되면서 조병옥도 이승만과 멀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1949210일 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의 신익희ㆍ지청천 계열이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할 때 참여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이승만의 부름으로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대구 방어에 공을 세웠으나, 19515월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19545월 대구에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범야 신당 창당 준비조직인 호헌동지회 창설에 참여하였을 때에는 곽상훈ㆍ김도연ㆍ김준연ㆍ장면ㆍ박순천 등과 함께 조봉암의 신당 참여에 반대하였다. 결국 조봉암이 배제된 채 1955년 민주당이 결성되었고, 조병옥이 이에 참여하면서 1956년 신익희의 급서로 대표 최고위원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민주당 내 신파와 구파 간 분쟁이 가시화되면서 조병옥은 구파의 리더로 활약하였다. 19591126일 민주당 정ㆍ부통령 선거 지명대회 표결 결과 조병옥은 세 표 차이로 승리하여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조병옥은 대통령 후보등록까지 마쳤지만 갑자기 발병하자 도미하여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한 지 23일 만에, 선거를 불과 한 달여 남겨두고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는 1960225일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7. 조재천(曺在千, 1912~1970) - 1912년 전라남도 광양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일운(逸雲)이다. 19313월 광주서공립중학교, 19333월 대구사범학교 강습과를 수료하고, 전라북도 청하(靑蝦)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해 19374월 전라북도 남원공립보통학교에서 훈도로 재직하다가 퇴직했다. 곧이어 전라북도 산업부 농무과 촉탁으로 들어가 193812월까지 근무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주오대학[中央大學] 전문부 법학과에 진학했다. 재학 중이던 19408월 조선변호사시험, 10월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해, 그해 12월 주오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했다. 19411월 조선총독부 사법관시보로 광주지방법원 및 동 검사국에서 16개월 간 근무했으며, 19433월 평양지방법원 예비판사를 거쳐 같은 해 7월 판사에 임명되었다. 19456월 평양지방법원 검사로 옮겨 해방 때까지 재직했다. 해방 정국에서 좌익의 척결에 노력하였다. 19461월 서울지방검찰청 부장검사에 임명되어 같은 해 7월 이른바 조선정판사위폐사건의 담당검사로 활동했다. 19481월 철도관구 경찰청장, 9월 제1관구 경찰청장, 11월 경무관으로 내무부 치안국 경무과장 등을 역임했다. 19491월 경상북도 경찰국장을 거쳐 19501월 경상북도지사에 임명되어 한국전쟁 중 퇴직했다. 19546월 대구에서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하였다. 또한 19586월과 19608월 대구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제4, 5대 민의원에 거듭 당선되었다. 1960년 민주당내각 성립과 함께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었고, 1961년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퇴임했다. 196312월 민주당 소속으로 제6대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9643월 민주당 부총재를 맡았다. 19674월 민주당 총재에 추대되었으나, 총선에서 민주당이 참패하자 정계를 은퇴했다. 197075일 사망했다.
  8. 조선정판사위폐사건(朝鮮精版社僞幣事件) - 19451020일부터 6회에 걸쳐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朴洛鍾) 등 조선공산당원 7명이 위조지폐를 발행한 사건. 당시 공산당에서는 해방일보등의 좌익신문을 통하여 이 사건을 전혀 허위날조된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사건을 당시 우익지들이 주장하던 조선공산당위폐사건이라 하지 않고 조선정판사사건이라 칭한 것은 국민들의 선입견을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516일 조선공산당 기관지인 해방일보는 정간되고 말았다. , 미군정 당국은 공산당의 불법행동에 강력한 조처를 취하게 되어 공산당은 지하로 잠입하여 파괴공작을 벌이게 되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